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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2-11 09:40:36

고르몽 드 픽퀴니



1. 개요2. 생애

1. 개요

고르몽 드 픽퀴니(Gormond de Picquigny : 1069년 ~ 1128년)는 1118년부터 1128년 시돈(Sidon)에서 선종할 때까지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였다.

2. 생애

고르몽은 같은 이름의 아버지 고르몽(Gormond de Picquigny)과 아내 아델(Adele)의 아들이었다. 그의 형제로 아미앵(Amiens)의 주교 대리 외스타슈 다미앵(Eustache d'Amiens)과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참전 기사 아르눌 드 픽퀴니(Arnoul de Picquigny)가 있었다. 고르몽은 아르눌과 1차 십자군에 참전하여 예루살렘 왕국에서 성직자로 지내다가 1118년 말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아르눌 드 쇼크(Arnoul de Chocques)가 사망하자 그를 대체하기 위해 선출되었다.

당시 십자군은 무슬림의 반격으로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그러자 1120년 고르몽은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보두앵 2세과 함께 나블루스에서 공의회를 회합한다. 나블루스 공의회에서 선포된 조항은 일종의 우트르메르 교회와 십자군 국가 간의 일치를 보여준다. 내용인 즉 지난 4년간 전염병이 퍼지고, 메뚜기 떼가 창궐하여 왕국이 궁핍해지고, 거의 모든 십자군 국가들이 사탄과 같은 무슬림의 반복적인 공격으로부터 고통을 받아, 급기야 아제르 상귀니스(AGER SANGUINIS) 전투에서 안티오키아 공국의 수뇌부와 남자 전투원들이 한 번에 끔살당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렇게 안티오키아 공국의 지도부가 와해되자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있다면서, 공의회는 십자군 국가의 오만과 비 종교적인 행태로 하느님의 분노로 인한 단죄라고 여겼기에 공의회는 일종의 자기반성의 일환이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조항은 보두앵 2세가 예루살렘 총대주교에게 십일조를 책정하여 헌납, 다시 말해 예루살렘, 나블루스, 아크레의 왕실 사유지 봉헌을 약속했다. 두 번째 조항에서는 보두앵 2세 이전에 보류했던 십일조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고르몽은 그 죄를 사하여준다는 식이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왕국의 태생적인 병사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고르몽은 십자군 왕국을 방어하기 위해 그들을 이끌 지도자를 선출하도록 허가를 요청한 기독교 기사들을 불러들인다. 그리하여 보두앵 2세는 왕궁의 지근거리에 있는 솔로몬 성전이라고 알려진 구역을 그들에게 주었다. 위그 드 파앵(Hugues de Payens)은 그들의 단장으로 선출되었고 고르몽은 예루살렘으로가는 길에 순례길을 정기적으로 순찰하여 안전하게 지켜 순례자를 도둑과 같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보호하는 의무를 지게했다. 그들은 1129년에 교황청이 주관했던 트루아 공의회(Council of Troyes)에서 기사 수도회로 정식으로 인준 되기까지 9년이 걸렸지만 그때까지 계속해서 봉사했다.

고르몽은 약 1119년에서 1125년 사이에 왕국 내 대규모 작물 수확의 실패와 무슬림의 위협이 계속되자 지속적으로 유럽에 왕국의 지원을 부탁했다. 그는 성묘 교회를 지키던 성묘 수도회의 수도원장 제라드(Gerard)와 함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의 대주교인 디에고 겔미에즈(Diego Gelmírez)에게 원조 요청 편지를 쓴다. 당시 산티아고는 디에고가 40년 가까이 봉직하면서 또 다른 크리스찬이슬람의 서부 전선이었던 이베리아 반도에서 성공적인 레콩키스타 운동을 전개하여 예루살렘 왕국의 이상적 모범이었다. 도움 내용은 대부분 식량과 금전, 예루살렘 왕국을 유지하기 위한 군사 원조였다.

그러던중 1123년 4월 18일 보두앵 2세가 무슬림에게 생포당하는 변고가 생긴다. 왕이 무슬림에게 구금되는 변을 당하자 왕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보두앵 2세가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 고르몽은 고위 성직자와 영주들을 대의회에 호출하여 국왕 대행(Bailliff)으로 당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시돈(Sidon)과 카이사레아(Caesarea)의 영주 외스타슈 그레니에(Eustace Grenier)를 선출했다. 같은 해에는 베네치아 공화국 사이의 무역 동맹을 협상했다. 조약의 이름은 Pactum Warmundi, 예루살렘 왕국이 갑의 입장이었기에 고르몽의 라틴어 이름 Warmundus에서 명명 되었다. 고르몽은 그들에게 상업적 특권을 제공하고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항구들을 대항하는 베네치아 해군력의 보조를 받았다. 1124년 7월 7일 예루살렘 왕국은 고르몽을 십자군 부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베네치아 해군을 앞세워 마지막으로 남은 레반트의 무슬림 항구도시 침공, 티레를 하루만에 점령한다.

보두앵 2세는 당시 무슬림들에 이리저리 전리품처럼 떠돌다 티무르타쉬의 수중에 있었다. 무슬림은 분열 상태였고 그는 고르몽과 면식이 있는 샤이자르(Shaizar)의 술탄에게 국왕의 석방을 중재를 부탁했다. 고르몽은 그 협상에서 그들에게 8만 디나르를 지불하고 아타리브, 자다나, 아자즈 및 다른 안티오키아 공국의 요새를 티무르타쉬에게 양도해야 했다. 또한 그들과 적대 관계였던 무슬림의 베두인 군벌들을 상대로 티무트타쉬를 도울 것이라고 약속했다. 보두앵 2세는 몸값의 4분의 1이 지불하고 12명의 인질(보두앵 2세의 막내 딸 이오베타 드 레텔과 에데사 백국의 조슬랭 1세의 아들을 조슬랭을 포함)이 체납금 지불을 보장하기 위해 티무트타쉬에게 넘겨지면서 보두앵 2세는 1124년 8월 29일에 드디어 석방되었다.

보두앵 2세의 부재중에 고르몽은 왕국의 정신적 지주로써 잘 대처했었다. 1127년 가을이 되자 보두앵 2세는 자신의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대의회에서 귀족들과 상의한다. 그리하여 왕국의 상속녀로 지명된 장녀 멜리장드에게 든든한 힘을 제공해줄 것으로 예상되는 프랑스 대 귀족을 초대하기 위하여 기욤 드 뷔르와 기 드 브리세발레를 프랑스에 파견했다. 그 때 고르몽은 성전기사단장 위그 드 파앵과 그의 다섯 동료들을 프랑스로 향하는 사신들과 동행하게 하여 로마 교황청으로가 성전 기사단 수도회 설립의 의의와 목적을 설명하게 하여 정식 인준을 받게 한다. 고르몽은 보두앵 2세의 막역하고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 고르몽은 1128년 7월에 선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