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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PATRIARCHA HIEROSOLYMITANUS LATINORUM)는 예루살렘의 라틴 교회 가톨릭 대주교의 칭호이다. 기록에 남아 있는 초대 예루살렘 주교는 의인 소 야고보이나 638년 지위가 공석이 되었다. 이후 그리스도교 종파 세 곳[1]에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따로 있다.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이 성도 예루살렘을 해방했다. 본래는 교황이 총사령관으로 파견했던 르퓌의 아데마르 주교가 예루살렘 총대주교로 되어야 했지만 안티오키아에서 병에 걸려 선종했다. 그리하여 2주 뒤 8월 1일 명맥이 끊긴 지 장장 461년 만에, 동서교회의 분열 이후 라틴 그리스도교로서는 처음으로 아르눌 드 쇼크가 초대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로 선출되었다. 아크레 점령 이후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는 예루살렘 총대주교 문서에서 서술. 이 페이지는 교회의 관점에서 예루살렘 왕국을 조명한다.
2. 명단
대수 | 이름 | 재위기간 | 비고 |
01대 | 아르눌 드 쇼크(Arnoul de Chocques) | 1099년 | |
02대 | 다임베르트 다 피사(Dagoberto da Pisa) | 1099–1101 | 탄핵 |
03대 | 모리스 드 포르투(Maurice de Porto) | 1101–1102 | 임시 |
04대 | 에브르마르 드 테루안(Evremar de Thérouanne) | 1102–1107[2] | |
05대 | 다임베르트 다 피사(Dagoberto da Pisa) | 1105–1107[3] | 복권 |
06대 | 기벨린 드 사브란(Gibelin de Sabran) | 1107–1112 | |
07대 | 아르눌 드 쇼크(Arnoul de Chocques) | 1112–1118 | 재임명 |
08대 | 고르몽 드 픽퀴니(Gormond de Picquigny) | 1119–1128 | |
09대 | 스테판 드 라 페르테(Stephen de La Ferté) | 1128–1130 | |
10대 | 기욤 드 말린(Guillaume de Malines) | 1130–1145 | |
11대 | 풀크 당굴렘(Foulques d'Angoulême) | 1145–1157 | |
12대 | 아모리 드 네슬레(Amaury de Nesle) | 1157–1180 | |
13대 | 헤라클레스 도베르뉴(Héraclès d'Auvergne) | 1180–1191 | |
1187년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1194년까지 주교좌 공석(SEDE VACANTE), 이후 왕국과 아크레로 이전 함. | |||
14대 | 아이마로 모나코 디 코르비치(Aimaro Monaco dei Corbizzi) | 1194–1202 | |
15대 | 소페르도 에리코 가에타니(Soffredo Errico Gaetani) | 1202–1204 | |
16대 | 알베르토 아보가드로(Albert Avogadro) | 1204–1214 | |
17대 | 라울 드 메렝쿠르(Raoul de Mérencourt) | 1214–1225 | |
18대 | 제라르도 드 로잔(Gerardo de Lausana) | 1225–1238 | |
1240년까지 주교좌 공석(SEDE VACANTE), 자크 드 비트리가 임명되었지만 봉사하지 못함. | |||
19대 | 로베르 드 낭트(Robert de Nantes) | 1240–1254 | |
20대 | 자크 드 판탈레온(Jacques de Pantaléon) | 1255–1261 | 교황 우르바노 4세 |
21대 | 기욤 다장(Guillaume d'Agen) | 1261–1270 | |
22대 | 토마스 아그니 드 코센차(Tomás Agni de Cosenza) | 1271–1277 | |
23대 | 조반니 다 베르첼리(Giovanni da Vercelli) | 1278–1279 | |
24대 | 엘리야(Elijah) | 1279–1287 | ?? |
25대 | 니콜라 드 하나페스(Nicolás de Hanapes) | 1288–(1291)-1294 | |
1291년 아크레가 점령당하고 키프로스 왕국으로 망명함. |
3. 관련 문서
[1]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2] 다임베르트가 복권되어 부제장으로 내려와야했지만 다임베르트가 2년이란 시간동안 이탈리아에 머물다 사망하여 성지에 파견 된 교황 대사 기벨린 드 사브란이 그 시기를 바칸데(주교좌 공석)를 선포했다.[3] 1105년 복권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중 110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