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04-02 15:14:17

모리스 드 포르투



1. 개요2. 생애

1. 개요

모리스 드 포르투(Maurice de Porto : ?년 ~ 1102년)는 1095년부터 1099년까지 포르투-산타 루피나(Porto-Santa Rufina) 교구의 주교며, 1102 년부터는 추기경으로서 예루살렘 왕국에 파견된 교황 대사였다. 1101년 후반부터는 임시로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를 맡았으나 그 다음해 사망한다.

2. 생애

모리스가 추기경으로 임명되기 전의 삶은 별로 알려진 바 없다. 여러가지 모순된 기록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그는 1088년에 교황 우르바노 2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1]되었다고 하지만, 1095년 2월 18일에는 아직 포르투의 주교로 존이라는 사제가 있었다. 1098년 2월 24일에는 산타 체칠리아 인 트라스테베레(Santa Cecilia in Trastevere) 성당의 제단을 축성하는 기록도 있다. 이런 기록의 근거는 모두 다 불확실하고 그 과거의 역사학자들이 참고한 원전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주교로써 모리스의 첫 번째 믿을만한 기록은 교황 연대표(Liber Pontificalis)[2]에서 나오며, 기록 상 1099년 8월 14일에 교황 파스칼 2세가 임명한 6명의 주교 사이에서 그의 이름이 처음 나타난다.

1100 년 5월 4일, 파스칼 2세는 제노바 상인들에게 예루살렘 왕국의 재해권을 도우라는 임무를 하달했고, 모리스를 레반트 지역의 교황 특사로 임명하며 추기경으로 승진시켜 새로운 십자군 국가를 교황의 통제 하에 두는 임무를 맡게 했다. 그는 7월 20일 제노바에 도착한 뒤 때마침 건설된 성 테오도로(San Teodoro) 성당의 축성을 지원했다. 그 후 8월 1일에 제노바 해군의 배를 타고 늦어도 9월 25일 안티오키아 공국라타키아(Latakia)에 도착했다. 하필 그 시점에 안티오키아 공국의 보에몽 1세 공작이 최근에 북쪽 변경 지대를 정비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다니슈멘드(Danishmend) 왕조에 사로잡혔다. 당시 고드프루아 역시 사망했던 시점이였고, 에데사 백국의 보두앵이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이동하다 통치자가 없는 안티오크의 무방비 상태를 정비하고 나아가려는 찰나에 모리스 추기경을 만난다. 그래서 아마 10 월 중순쯤에 그는 에데사 백국의 보두앵 백작의 수행단에 동행하여 예루살렘으로 이동했다. 기록에는 없지만 보두앵은 당시 총대주교 다임베르트와 앙숙이었다. 분명히 안티오크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면서 보두앵은 모리스에게 다임베르트에 대한 온갖 험담과 부정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12월 25일, 보두앵은 베들레헴에서 앙숙인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다임베르트에 의해 예루살렘의 왕으로 등극했다.

보두앵 1세의 대관식이 얼마 지나지 않아 보두앵은 다임베르트가 십자군 국가를 배신하여 정교회 도시를 공격하는 보에몽을 말리지 않고 동참했다고 고발하며, 또한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들통났다며 의회에서 총대주교를 비난했다. 기록에는 모리스가 이러한 고발에 즉시 어떻게 대응했는지 나타나 있지는 않다. 다만 다음해에 당대 역사학자 아헨의 알버트(Albert d'Aix)에 따르면 모리스가 다임베르트의 부활절 미사를 진행하는것을 금지했고, 모리스 스스로 집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리스와 제노바 함선에 같이 승선하여 예루살렘까지 함께 동행한 제노바의 역사학자이자 외교관인 카팔로 디 루스티코(Caffaro di Rustico da Caschifellone)는 이 장면을 성묘 교회에서 모리스와 다임베르트가 부활절인 1101년 4월 21일 함께 집전했다고 기록한다.

어쨌든 보두앵과 다임베르트 사이의 경쟁은 다음 해에도 지속되었으며, 모리스는 예루살렘의 교회권을 상승시키는 임무를 다하기 위해 다임베르트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둘 사이에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맡았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더 이상 방어가 될 수 없을 정도의 고발이 지속해서 재기되었고, 방어를 할수록 교회권의 위상이 계속해서 하락하자 1101년 가을에 모리스는 교황 특사의 전권으로 총대주교 다임베르트를 탄핵하여 폐위시켰다. 그래서 임시로 총대주교의 임무를 모리스가 맡았으며 이 상황은 모리스가 1102년 봄에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의 죽음 후 총대주교 자리는 보두앵 1세에 의해 왕권을 보장하는 파벌의 에브르마르 드 테루안(Evremar de Thérouanne)이 승계했고, 교황 특사의 자리는 파리의 로버트(Robert de Paris)가 그해 가을에 성지에 도착해서 승계했다. 다임베르트는 안티오크로 피신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안티오키아 공국의 도움이 필요했던 보두앵이 조건부로 예루살렘 총대주교로 돌아와 봉직하는걸 묵인했지만, 다임베르트는 로버트에게 또 파직당한다. 1103년 7월 29일 포르투의 주교는 피에트로(Pietro)에게 인수되었다.
[1] 포르투의 주교가 되기 전인데 추기경?[2] 기독교 역사상 베드로부터 15세기까지 재위한 교황들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