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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포로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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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포로수용소 모습 1952년 당시 거제도 일대 포로수용소 시설도[1]

1. 개요2. 상세3. 생활4. 외부 링크5.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6. 관련 문서

1. 개요

Kŏje[2] P.O.W.[3] Camp

거제포로수용소 홈페이지

거제 포로수용소는 6.25 전쟁 중에 붙잡은 북한군중공군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세워진 포로수용소다. 전쟁 기간 동안 전국에 세워졌던 포로수용소 중 가장 규모가 컸으며 17만명이 넘게 수용되었다.

6.25 전쟁의 참상을 증언하는 자료지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1983년 12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전쟁과 인권을 주제로 한 역사적 기록으로서 보존가치가 있다는 점이 중시되어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2. 상세

1951년 2월 독봉산을 사이에 둔 현재의 거제시 고현동과 수양동 주변에[4] 설치해 1953년 7월까지 운영됐다. 북한군 15만, 중공군 2만, 여자 포로 300명이 수용되었다. 당시 미군을 따라왔던 종군기자들 중 일부가 포로수용소를 취재하면서 거제도 일대를 촬영한 사진들이 다수 남아있다. # 1950년대 거제도의 모습들

거제는 육지와 가까워 포로를 수송하기 수월하면서도 거제대교가 지어지지 않았던 당시에는 육지와의 교통수단이 오로지 배밖에 없어 포로를 격리 수용하기에 적합한 데다 가장 후방에 있어 전쟁 와중에도 그나마 안전한 곳이었기 때문에[5] 이곳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 포로들을 데려올 땐 배에 태워서 지금의 장평동 일대에 정박했다.

위에선 간단하게 북한군 15만이라고 서술했지만 따지고 보면 11만 1천 명의 오리지널 북한군(N.K) 외에도 38,000명의 남한에서 징모된 의용군(S.K) 출신이 있었으며 각자 사연이 복잡한 남한 출신 민간인도 2만 2천 명에 달했다.

수용소는 크게 60단위, 70단위, 80단위, 90단위가 있었고 각 단위마다 몇 개씩 수용소가 있어 총 28개가 존재했다. 의용군 출신은 60단위인 61·63·65 수용소에, 민간인은 62·65 수용소에 억류하고 64 수용소는 야전 병원이었다. 가장 수가 많은 N.K들은 70단위, 80단위, 90단위에 수용하였다. 북한 출신 민간인도 N.K에 포함했다. 중공군은 72·82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이학구 총좌 이하 장교들은 66수용소에 수용되었으나 그 이상으로 많은 장교들이 신분을 숨기고 사병 수용소에 있었다.

총좌는 2명(이학구[6], 홍철), 대좌 5명, 그 외 다수의 중좌 이하 장교들이 있었다. 공식적인 포로들의 대표는 이학구 총좌였으나 사단장을 총으로 쏘고 헬기 타고 항복 방송을 하고 다녔다는 원죄 때문에 발언권이 없었고 중좌들의 인의 장막에 둘러 싸여 항상 면회사절 상태였다. 실제로는 부대표인 엄정엽이 실권을 쥐고 있었으며 홍철 총좌와 임인엽이 뒤에서 조종하였다. 수용소 당국과 협상하러 갈 때도 이학구는 항상 홍철, 임인엽의 감시를 받기 위해 동행하여만 했다.

이렇게 포로들의 대표는 군관 수용소인 66수용소이긴 하지만 사병 수용소와 격리되어 있어 포로 전체의 지도력은 없었다. 게다가 이학구 총좌는 물론 홍철이든 임인엽이든 별절한 투항분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공산측은 소련군 상급중위 출신의 통역 박상현을 전사계급의 포로로 위장하여 잠입시켰다. 그는 사병 수용소인 76수용소에 들어갔지만 그와 함께 소련군 출신 통역이었던 자들은 다들 사단장이었으며 그렇게 따지면 박상현 역시 장성급이었다. 그는 이미 해방동맹 지부가 있고 가장 잘 조직되어 있던 76 수용소에 들어가 정치위원이 되었고 붙어 있던 77·78수용소도 통솔했다. 얼마 안 가 62·66·92·95 등 모든 친공수용소를 장악하였다. 박상현은 64 포로야전병원을 통하여 판문점의 남일 대장에게 수시로 보고하였고 그에게 지령을 받아 반항과 폭동을 선동하였다.

이런 사정을 모르던 미군 관리당국은 66수용소만 철저히 감시하였고 허수아비인 이학구만 증오하였다. 1963년에 출판된 T. R. 페렌바크의 <이런 전쟁>에서는 포로 수용소가 이학구를 뒤에서 조종하는 홍철의 손아귀에 있었다고 홍철 타령만 하는데 실제로는 위와 같이 박상현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밤마다 수용소들은 주도권을 잡기 위한 항쟁을 벌였고 이로 인해 수많은 포로들이 사망하였다. 미군측은 일단 경비병이 말도 안 되게 적었고 그것도 각 부대들이 도무지 감당하지 못하는 속칭 폐급병사들을 좌천시켜 경비대로 보내는 판국이었다. 수용소장들도 하나같이 부족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마저도 한 달마다 교체되었다. 수용소 자체도 지휘라인이 불안정하여 군수사령부에서 담당했다가 보급창에서 담당했다 하는 판국이었다. 얼마나 수용소장들이 안이했던지 수용소마다 인공기가 휘날리며 포로들이 무장하여 군가를 부르며 군사훈련을 하는데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휴전협상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지령을 받고 박상현의 76 수용소에서 1952년 5월 7일[7] 수용소장인 미합중국 육군 준장 프랜시스 도드 장군을 납치하는[8] 초유의 사태가 터졌다.

이에 새로운 수용소장이 17만명으로 미어터지던 거제도의 포로들을 전국의 11개 수용소로 흩어 버리는 작전에 돌입하였고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76 포로 수용소는 탱크로 밀어 버렸다. 이후 포로 이동을 대충 설명하자면 SK와 반공 포로들은 본토로 이송시키고 중공군 포로는 제주도로 보내 거제도는 3만5천명의 친공 포로만 남았다.

휴전협정 기간 중에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이 이루어졌지만 거제 포로수용소는 반공포로 석방이 없었던 게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반공포로를 분리시키면서 친공포로들은 구역만 바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여전히 남아 있었고 새로 생겨나기도 했지만 다른 지역의 수용소에 비해 유엔군의 경계가 삼엄했고 섬이라 탈출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후 휴전이 이루어지면서 이곳에 있던 친공 포로들은 북한으로 송환되었고 남아있던 반공 포로들은 한국으로 귀순했다. #

지금은 대부분 철거됐으나 곳곳에 몇몇 유적들이 남아있다. 거제시에서는 남은 유적 자리에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만들어 운영 중이며 거제시의 관광지 중 하나다. 테마공원+6.25 전쟁 박물관+모노레일 관광을 결합한 공원으로 보인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공간적 배경이며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도 나온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인 박상연DMZ에서도 주인공의 아버지가 이곳에 수감되어 있었다. 2018년 겨울 영화 스윙키즈에서도 배경으로 쓰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그 존재가 알려졌다.

북한의 대표적인 영화인 6.25 전쟁 전후 공산주의의 북한 중심으로 전개된 남파공작원 중심의 영화 '이름없는 영웅들' 제 14부 '죽음의 섬'에서 거제도 포로수용소 반공포로 석방 사건을 다룬다.

웹툰 사변괴담의 3번째 이야기 '몽금포'[배경], 영화 스윙키즈가 거제수용소를 배경으로 한다.

3. 생활

흥남 철수작전으로 거제에 정착한 피란민의 인터뷰에 따르면 피란민들은 포로들이 공공활동을 위해 포로수용소 외부로 나올 때 포로들이 배급받은 물품이나 피복을 가지고 물물교환을 하고 장사를 하였다고 한다. #

4. 외부 링크

5.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

한국전쟁 중 UN군에 포로가 되었던 공산군을 수용하던 장소이다.

1950년 11월부터 고현·상동·용산·양정·수월·해명·저산지구 등 360만평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여, 인민군 15만, 중공군 포로 2만, 여자포로와 의용군 3천명 등 최대 17만 3천명을 수용하였다.

이 곳에서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간의 유혈사태가 자주 발생하였으며, 1952년 5월 7일에는 수용소 소장인 돗드 준장이 납치되는 불미스런 사건까지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후 폐쇄되었고, 친공포로들은 판문점을 통하여 북으로 보내졌다. 현재는 수용소의 잔존건물 일부만이 곳곳에 남아 당시의 상황을 말해준다.

한국전쟁의 참상을 말해주는 민족역사교육의 장소로, 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6. 관련 문서


[1] 파란색과 빨간색은 각각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가 장악한 캠프이며 회색은 경비 임무를 맡은 부대의 시설들이다.[2]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으로 이렇게 표기된다.[3] Prisoner Of War. 전쟁포로라는 뜻의 영어 단어다.[4] 당시 (통영군)거제군 일운면 고현리, 수월리, 양정리[5] 한국군이 가장 밀렸던 낙동강 전선 때도 거제는 본격적인 위협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이북, 중부지방, 호남 등 전국 피난민들도 부산, 김해와 함께 거제로 많이 피난을 왔다. 흥남 철수작전으로 탈출한 북한 피란민 10만 명과 그 외 지역에서 탈출한 북한 피란민 5만명을 수용한 곳도 거제도였다.[6] 춘천 전투의 패배로 인해 13사단 참모장으로 좌천되었는데 낙동강 전투중 상관인 사단장 최용진 소장과의 불화가 커서 그의 팔을 권총으로 쏘고 도주하여 미군에 항복했다. 한국으로 귀순하려고 했으나 미군이 그에게서 정보만 받고는 포로수용소로 보내버려 사실상 버림받았고, 한국 정부도 그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과 한국에 대한 불만이 커져 친공 포로들의 수장이 되어 폭동을 주도했다. 특히 수용소의 친공 포로들 중에서 가장 계급이 높았고 고위 지휘관인 터라 지도력과 인품이 있어(수용소의 포로들은 이학구가 공산주의자인것을 제외하면 인품이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수장이 되기 쉬웠다. 포로들의 폭동을 4번이나 주도하여 일으켰다가 미군에게 제압당하여 감시당하다가 휴전이 되고 나서 북한군에 포로가 된 미군의 장군 윌리엄 딘 소장과의 포로교환을 통해 북한으로 돌아갔지만 상관을 쏘고 도주하여 항복한 것 때문에 북한에서 멸시와 푸대접만 받았고 결국 1963년에 권총으로 자살했다.[7] 특히 포로들은 미군 몰래 사제 무기까지 대량으로 만들었을 정도로 치밀했다.[8] 도드 준장은 6월 10일에 콜슨 준장이 이학구와 친공 포로들의 요구를 듣어주는 조건으로 석방되었으나 이로 인해 도드와 콜슨은 징계를 받아 대령으로 강등된다.[배경] 수용소 내 반공과 친공의 대립을 배경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