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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2-11 00:56:15

강태하(1884)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84년 9월 13일
충청도 공주목 신하면 당곡리
(현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덕곡리)
사망 1953년 5월 5일 (향년 68세)
충청북도 진천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711호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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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84년 9월 13일 충청도 공주목 신하면 당곡리(현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덕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4일 오후 4시경 충청남도 공주군 신상면 유구리 시장에서 황병주가 유구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자 이에 참가하여 5백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항일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공주에서는 3월 12일 공주면의 장날에 만세시위를 벌이려다가 일제의 탄압에 의해 저지당한데 이어, 신상면 유구 장날인 3월 14일에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천도교 신도 황병주가 먼저 독립만세를 선창함에 따라서 5백여 명의 군중이 호응하였는데, 이 때 강태하도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시위대를 진압하려는 일본 경찰에 의해 황병주가 체포되자, 강태하를 비롯한 시위군중은 황병주를 구출하기 위해 주재소를 습격하여 유리창을 깨뜨리고 투석하면서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6월 16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이에 공소하였으나, 7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고, 상고하였지만 10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상고마저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53년 5월 5일 별세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