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만화가 이희재의 단편집이자 수록작 중 하나. 잡지 '만화광장'에 발표했던 리얼리즘 계열의 단편들을 모았다. 1996년에 처음 출간되었다가 한동안 절판, 2001년에 복간되었으며 두 차례 모두 박재동 작가가 서문을 써 주었다.[1] 이희재 작가와 그 작품을 수식하는 '리얼리스트'라는 별명답게 1980년대 중후반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희노애락을 드라마틱하게 다루었다. 작품별로 어딘가 하나씩 나사가 빠져 있거나 사회적인 결함과 아픔을 품고 있지만 미워할 수 없는 인간군상이 세심하게 조명되며, 한없이 비극적으로 끝날 것 같다가도 마지막 순간에는 오뚜기처럼 일어서는 주인공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삶의 용기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첫 출간 이듬해인 1997년 미술전문지 가나아트가 주관한, '만화평론가가 선정한 해방 이후 좋은 우리 만화' 1위에 올랐다.
2. 수록 작품
- 간판스타(1986년 작)
단편집의 제목을 장식하기도 한 작품. 몸이 아픈 아버지를 부양하기 위해 시골 마을로부터 상경한 딸 경숙이가 잠시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온 며칠 간의 귀향기이다. 서울의 신발 수출 공장[2]에서 돈을 많이 벌고 몰라보게 예뻐져서 금의환향한 경숙이를 마을 사람들은 몹시 반기며 효녀로 떠받들고 경숙이의 동생은 누나가 사다 준 새 신발로 으쓱해진다. 그러나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는 마을 오빠 동수만은 경숙이 아버지에게 절대 서울에 다시 못 올라가게 붙잡아 두어야 한다며 만류한다. 물론 경숙이 아버지는 왜 그러냐고 버럭거릴뿐. 동수는 바로 서울에 올라갔다가 그녀가 일하는 것을 본 유일한 마을 사람이다. 고향 친구들이 "팔자폈네... 딸이 번 돈으로 밭까지 샀네..."라고 가볍게 말하는 걸 정색하듯이 "그런 말하지 마라, 정말이지 저건 경숙이의 피땀 흘린 돈으로 번거다." 라고만 할 뿐 구체적 사항은 입을 다물고 있다. 경숙도 동수를 만나자마자 당황해하고 뭔가 낯설어하는 낌새를 보인다. 그리고 고향 친구들이 자기도 서울 가서 그 공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애원할 때 경숙은 난감해하며 거부하면서 복선이 보인다... 제목 '간판스타'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음이 마지막에 드러난다.[3] 전후사정을 파악하고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읽어보면 느낌이 판이하게 다른 작품.
80년대에 황미나가 매주만화에 연재한 단편 중 한 편도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다만 거기선 이 간판스타에 나오는 경숙같은 여주인공 눈으로 보는 세상사 이야기라는 게 다르다.
- 새벽길(1988년 작)
만화가인 화자의 이웃집에 사는 청소부 박만서의 인생역정을 그렸다. 고향에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그는 강직한 성격 탓에 여러 직장에서 억울하게 잘린 데다가 불운한 사고로 자녀들을 연이어 잃고[4] 아내도 충격으로 청각장애인이 되나 남들 같았으면 삶의 의욕이 완전히 꺾여버릴 사건을 몇 번이나 연달아 겪고도 참으로 끈질기게 청소부로서의 자신의 삶을 이어 간다. 작품의 줄거리는 1980년대 말 한창 개발되고 있던 노원구 상계동을 배경으로 화자가 주인공을 관찰하는 시점으로 진행되며, 연이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 피어난다는 이희재 특유의 휴머니즘이 작품 속에 잘 녹아 있다. 중간중간 나오는 주인공의 약간은 해학적인 인생철학도 볼거리. 참고로 극중 벌어진 연탄가스 중독사고로 집안에 남아있던 두 아이들이 죽은 사건은 80년대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다. 박재동 화백 만화에서도 이걸 다룬 바 있는데 1컷짜리 시사만화로 밖에서 잠겨진 문 속에 두 아이는 연탄가스로 죽고 맞벌이나간 부모가 돌아와서 경악할때 개발이니 뭐니 아 대한민국이라며 이런 비참한 일을 덮고 자화자찬하는 전두환 군부를 까던 작품이었다. 마지막에 아내가 임신하면서 희망이 이어져간다는 암시로 끝난다.
- 민들레(1987년 작)
주인공 황씨는 6.25 전쟁 당시 북녘에서 내려와서 목수 일을 하는 실향민으로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주정뱅이이자 상종 못할 사람, 몹쓸 아버지라고 욕을 먹는다. 자신은 과거 어떤 부상으로 인해 다리를 저는 데다가 큰아들은 감옥에 들어가 있고 작은아들은 대놓고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라며 슬슬 삐뚤어지는 조짐을 보인다. 이런 이유로 마을 사람들은 보통 황씨를 백안시하고 있지만, 해장국집 파주댁을 비롯하여 소수의 사람들은 황씨의 심신이 망가질 수밖에 없는 사정을 알고 동정하기도 하며 작은아들의 담임교사 역시 황씨의 내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작은아들이 무단결석해도 가볍게 타이를 뿐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황씨는 어느 날 목줄도 없이 마을을 활보하는 황소만한 맹견이 목재 틈새의 민들레를 파헤치던 것을 목격했는데 그 민들레는 며칠 뒤에도 여전히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다시 싹을 틔운다. 황씨는 그 민들레를 옮겨다가 집 앞마당에 심고 작은아들에게 그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한다.
이 작품은 다소 직설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알기 쉬운 비유를 사용하여 황씨나 민들레와 같은 민초(民草)들이 겨울이나 맹견 같은 독재정권 하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고 살아남고 결국에는 '봄'이 올 것임을 강하게 호소한다.[5]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황씨가 아들에게 하는 말, 그리고 맨 마지막 두 페이지에 걸친 대단원도 이 단편의 주제를 명시하는 장치.
잡지 게재 당시 표지로 판화 그림이 수록되었는데, 이 그림이 단편집 '간판스타'의 표지를 장식했다.
- 김종팔 씨 가정 소사(1989년 작)
제목 그대로 김종팔 씨의 아내와 세 딸 간에 펼쳐지는 가정사를 다룬다. 그의 아내는 당시까지 사회에 잔존해 있던 구세대적 남아선호사상의 피해자로 딸을 내리 셋이나 낳는 바람에 시어머니에게 단단히 찍히고, 가해자가 된 피해자 격으로 막내딸을 평소에 몹시 구박한다. 막내딸 역시 자신을 두고 "남자애로 태어났어야 했다"고 타박을 주는 어머니에 대한 반항인지 선머슴처럼 머리를 짧게 깎고 남자아이들과 자주 어울려 다녀 더욱 어머니에게 밉상이 박혀 있지만, 유한 성격의 아버지 김종팔 씨는 자신의 가족들을 모두 똑같이 사랑한다. 세 딸 중 그래도 공부를 잘 하는 둘째가 대학입시철을 맞게 되면서 김종팔 씨 가정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 성질 수난(1986년 작)
세상 만사에 불만투성이인프로불편러영진은 어찌나 사사건건 시비와 충돌이 많은지 화가 난 애인으로부터 "언제고 그 성질 때문에 사고 한 번 낼 것"이라는 소리까지 듣는 남자다. 하지만 그도 덮어놓고 아무한테나 닥치는 대로 분노를 터뜨리는 건 아니고, 작중에서 그려지는 영진의 분노는 후반으로 갈수록 분노조절장애라기보다는 자신 주변에서 발생하는 부조리와 불의를 눈감고 지나치지 못하는 반골 기질, 송곳 같은 성격으로 묘사된다. 결정적인 증거로 영진의 분노는 자기보다 센 사람들에게도 결코 조절되지 않으며(...) 분노조절장애를 휘두르는 민폐투성이 강자에게 덤벼들곤 한다. 작중에서 평범한 일반인의 반응을 상징하는 애인이 영진의 성질 수난을 지적하는 진짜 이유는, 까칠한 성격 그 자체도 물론 문제이지만 그 후폭풍이 만만치 않기 때문.
영진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정을 갖게 되고 잃을 것이 많아지면서 점차 성질을 죽이고 사회에 동화되는 법을 배우긴 하나 누군가 꼭 그의 반골 기질을 건드리기 때문에 얼마 못 가 전부 도루묵이 되고 만다(...). 다만 그는 내면의 성질만 까칠할 뿐 무력은 그저 양민 수준이기 때문에 성질을 죽이지 못하고 폭력 사태가 벌어지면 상대방에게 형편없이 깨지며 일련의 사태가 자신의 잘못임이 밝혀지기라도 하면 무안한 얼굴을 감싸쥐기 바쁘다. 소시민으로서 겁없이 불의에 덤볐을 때 얻는 명예와 피해를 모두 보여주기에 더욱 독자들에게 친근감을 주는 캐릭터.다른 만화였으면 주인공 히어로였을 텐데 리얼리즘 만화에 태어난 죄(...)
짐짓 무거울 수 있는 주제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다소 가벼운 코믹 분위기를 잃지 않는다. 그야말로 송곳(웹툰)의 순한맛(?) 버전. 하지만 사회에서 흔히들 「무서운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며 외면하는 수많은 일들을 지나치지 않는 용기,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들을 잃는다 해도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용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한다.
- 운수 좋은 날(1986년 작)
어느 택시기사가 다양한 손님들을 태우면서 겪는 기묘한 하루를 그렸다.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주인공이 택시기사라는 점은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로부터 일종의 모티브를 가져와 현대적으로 적용한 듯하다. 택시 운전수인 주인공은 그날의 마수걸이, 즉 첫 손님으로 기묘한 분위기의 아가씨를 태워다 주고서는 사납금을 채우고 훨씬 남을 정도로 그날의 호황을 누린다.[6] 밤이 되고 그는 꼰대 기질 충만한 기성세대, 반항기 넘치는 운동권 대학생, 그리고 두 사람과는 달리 정치 같은 어려운 얘기는 모르고 하루하루성실하게유흥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는 캬바레 손님을 한 자리에 태우게 되는데 그때부터 네 사람 사이의 운수가 조금씩 비틀어질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앞서 실린 단편 '민들레'처럼 이 작품도 택시를 하나의 사회로 비유하여 가치관의 충돌과 화해를 그리고 있다.
- 승부(1986년 작)
본 단편집의 마지막 수록작. 허영달이라는대놓고 언어유희날건달 백수는 (80년대에는 1억 이상 값어치를 가질 더더욱 거액이었을) 천만 원이 걸린 신문사 소설 공모전에 응모하기 위해 밤낮 고민만 하며 시간을 까먹고 있다가 그의 집에 날마다 신문을 배달하는 소년을 만나고 그를 소재로 쓰기로 결심한다. 일찍이 영달은 '무쇠톱'이라는 건장한 선배를 학창 시절에 자기도 모르게 때려눕혀 승부에서 이긴 경험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는데 신문배달 소년의 별명 역시 우연히도 '무쇠톱'이었던 것이다.[7] 가까스로 소재거리를 찾은 영달은 각박한 사회에서 고군분투하는 우직한 주인공 '무쇠톱'을 소재로 김중배라는 가명으로 공모전에 응모하여 보잘것 없는 자신의 날건달 인생에서 다시 한 번 일생일대의 승부를 건다. 그러나....정작 공모전에 당선되어 천만원 상금을 받은 게 다름아닌 신문배달소년 무쇠톱이었고 무쇠톱이 쓴 소설조차 바로 허영달을 모델로 그려낸 소설이었던 사실이다. 영달이 쓴 공모작은 악평만 받았고, 당선작에 견주며 온갖 모욕을 당했기에 허영달은 화내면서 잠도 안자고 새벽까지 그 신문배달소년 무쇠톱을 기다리지만, 그만뒀기에 만날 수도 없었다. 신문에 대문짝만한게 무쇠톱 사진이 실렸고, 백수건달 허영달을 소재로 한 소설에 대한 온갖 찬사에 대한 기사가 도배되었으며 반대로 구석에 기죽은 채로 있는 허영달 모습과 대비를 이루며 끝난다.
[1] 박재동 작가의 시사만화 단편집 '목 긴 사나이' 역시 같은 출판사에서 복간되었다.[2] 마을 사람들이 들은 풍문에 의하면 미국 업체에서 운영한다고 한다. 6.25 난리통에 다리를 다치게 된 경숙이 아버지는 당시 미국의 참전 덕분에 자기가 죽지 않고 살아났다고 여기고 있고, 지금 시점에서는 수출역군 딸이 미국의 돈을 벌어 자신의 다리 치료비를 대고 있고 밭까지 꽤 많이 샀기에 경제적인 도움이 되었다는 이유로 미국을 자주 찬양한다. 하지만 드러난 진실을 알게 된다면....[3] 경숙은 사실 술집에서 일하며 돈을 벌고 있었다.[4] 첫째 딸은 차에 치여죽고 두 아이는 연탄가스 사고로 사망. 세 사건에 대하여 보상금은 커녕 두 아이 장례비만 집주인이 내준 게 고작이었고 기레기기자들은 인터뷰라며 마치 막장부모인양 유도질문하며 자극적으로 매달리는 등 아내에게 충격을 연이어 줬다. 남편도 아내 탓이 아님을 알지만 그도 술에 취해서 화풀이할 대상이 없어 아내를 탓하는데 아내가 풀썩 쓰러진다. 기겁한 그가 병원에 데려가니 청각을 잃고 만 것.[5] 물론 이때의 '봄'이란 계절적 배경뿐만 아니라 해빙, 서울의 봄과 같은 정치적인 비유이기도 하다.[6] 작중 묘사에 따르면 당시 택시기사들 사이에서는 하루 첫 손님으로 여자를 태우면 그날은 장사가 안 된다는 미신이 있었고, 게다가 그 여자 승객의 행동거지도 건방지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주인공은 그 여자 승객을 내심 꺼렸었다. 산업화 시대 탄광촌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여자가 출근길의 남자 앞을 지나치면 불의의 사고에 휘말릴 수 있다는 등, 금녀(禁女) 터부는 여러 가지 직종에서 발견된다.[7] 어쩌다 보니 요행으로 승리한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영달은 "아무리 겉보기에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승부의 결과는 끝까지 가 봐야 아는 것"이라는 신조를 갖게 된다. 작품 맨 처음에 소개되는 이 일화는 그의 백수 라이프에서 근거 없는 자신감과 허세력의 원천이 되기도 하고,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결말부의 복선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