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가디페르 쇼트호세 Gadifer Shorthose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 |
직위 | 보르도 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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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에 귀속된 가스코뉴 공국의 중심지인 보르도의 시장.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에 맞서 항전했지만 블랑크포르 전투의 참패를 초래한 뒤 프랑스군에 항복했다.2. 생애
부모 및 출신 가문, 출생년도와 출생지, 가스코뉴로 오기 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1413년경 클라렌스 공작 랭커스터의 토머스의 원정군에 가담하여 아키텐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1427년 팡티에브르 백작 장 2세의 지시에 따라 어퍼 리무쟁 지역을 황폐화시킨 자유 용병대의 지휘를 맡았다가 장 포통 드 생트라유가 이끄는 프랑스군에 격퇴되었다. 1431년 아키텐의 세네샬 존 래드클리프의 군대에 들어가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왕으로부터 급료를 받지 않고 사비를 들여가며 싸웠다"고 한다. 이에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의 삼촌이자 섭정인 랭커스터의 존은 그에게 연간 연금을 부여하고 베르주라크 및 돔 성의 지휘권을 맡겼다.1433년 2월 20일 보르도 시장에 선임되었다.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이때 기사에 선임된 것으로 보인다. 1440년 1월 22일 2대 엑서터 공작이자 아키텐의 보안관인 존 홀랜드가 물롱과 제니삭의 영주권을 부여했으며, 네리지앙 남작의 직함을 부여했으며, 그의 상속인에게 영지를 양도할 수 있게 했다. 1443년 4월 22일 보르도의 종신 시장이 되었으며, 1444년 비롱 남작 가스통 5세 드 비롱으로부터 비롱 요새를 공략한 뒤 헨리 6세로부터 비롱 요새의 통치권을 수여받았다. 1445년 9월 생트푸아라그랑드와 베르주라크의 도시와 성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았다. 한편, 쇼트호세는 보르도 시장으로서 신학 학사 및 박사 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게 요청했고, 교황의 인가를 받은 뒤 빅또흐 유고 언덕의 꼭대기에 있던 그랑데 카르멜회 수도원을 대학으로 개조했다.
1450년 4월 15일 포미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궤멸시키고 그해 8월 노르망디 재정복을 완수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는 가스코뉴 공략에 착수했다. 클레르몽 백작 장 2세와 장 드 뒤누아는 왕의 명령에 따라 생통주의 코냐크와 생메그랭을 점거했고, 팡티에브르(Penthièvre) 백작이자 리모주 자작인 자크 1세 드 샤반은 베르주라크를 포위해 며칠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이들의 계획은 각자의 진로로 이동하여 가스코뉴의 수도 보르도 인근에 집결한 뒤 보르도를 공략하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가스코뉴 전역의 친잉글랜드 영주들과 잉글랜드군은 보르도에 대거 집결했다. 당대 연대기들은 보르도 시장 쇼트호세가 이끄는 이들 잉글랜드 맨앳암즈, 가스코뉴 기사단, 가스코뉴 민병대의 규모가 7,000~10,000명이었다고 밝혔는데, 과장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가스코뉴 당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최대한 동원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들은 보르도에서 출발해 프랑스군을 상대하러 북상하던 중 블랑크포르 마을 인근에서 오발 영주 아마니외 달브레와 스코틀랜드 용병대장 로빈 페틸로우가 이끄는 프랑스 선봉대 3,000명과 조우했다.
양측은 서로를 마주 본 채 전투 대형을 형성했다. 이때 프랑스군이 병력 열세를 두려워하여 개울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향해 후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쇼트호세는 적을 추격해 섬멸하기로 하고 그들을 추격했다. 보르도에서 장시간 행군하느라 지쳤던 장병들은 가디페르의 독촉을 받으며 적병을 쫓느라 탈진하기 일보 직전까지 몰렸다. 그러다가 그들이 다리에 도착했을 때, 인근 숲에 매복해 있던 프랑스군이 로빈 페틸로우의 지휘를 받으며 적의 후방을 공격했다.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갑작스런 기습에 당황해 다리를 건너 도주하려 했지만, 다리를 미리 건넌 프랑스군이 뒤돌아서서 그들을 다리 인근의 습지대로 몰아넣었다. 그 바람에 퇴로가 끊긴 그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이날 1,500~1,800명의 병사가 전사하고 2,600명이 생포되었고, 나머지는 보르도로 도주했다. 프랑스군의 손실은 미미했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 장 샤르티에는 쇼트호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패전을 초래한 인물은 앞서 언급한 보르도 시장이었다. 그는 전방에 배치한 보병을 모두 버리고 도망쳤다.
희생자들의 시신은 수레에 실려 보르도로 옮겨졌고, 부상병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시내로 들어왔다. 그 광경을 본 시민들은 몹시 통곡했고, 보르도 대주교는 48시간 동안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기도했다. 훗날 보르도 시민들은 수많은 가족과 친지를 잃은 이 날을 '말레 요르나드'(Male Journade: 나쁜 날)라고 지칭했다. 그 후 프랑스군은 가스코뉴 전역을 휩쓸었고, 1451년 6월 30일 보르도를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보르도의 열쇠를 뒤누아에게 전달한 뒤 샤를 7세에게 항복을 순순히 한 공로를 인정받아 선물과 연금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