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NBC 교향악단
1. 개요
NBC Symphony Orchestra미국에 1937년부터 1954년까지 존재했던 관현악단. 명칭대로 NBC 소속이었다.
2. 연혁
2.1. 창단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에는 방송국 소속의 관현악단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기껏해야 재즈나 블루스, 기타 대중적인 음악을 연주하는 전속 밴드나 살롱 악단 정도가 고작이었는데, 반대로 유럽, 특히 독일 쪽에서는 거의 모든 방송국이 자체적으로 관현악단을 거느리고 방송 연주회나 녹음 등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었다.이러한 유럽 쪽의 활동을 보고 당시 RCA 사장이자 NBC 방송국의 창립자였던 데이비드 사노프가 뉴욕에 NBC 소속의 정규 편성 악단을 만들어 산하 방송국들에 동시에 송출되는 라디오 방송용 연주회를 갖고, 연주회 전후에 같은 레퍼토리로 스튜디오 녹음을 만들어 RCA 빅터 음반사에 음반을 취입한다는 발상으로 1937년에 창단했다.
창단자부터가 엄청난 부호이자 미국에서 끗빨 날리던 사업가였던 만큼, 미국 뿐 아니라 해외 각지에서 유능한 연주자들에게 쇼미더머니를 시전해 스카웃해오는 공격적인 인력 충원으로 화제가 되었다. 갓 창단된 악단의 합주력 강화를 위해 상당히 엄격하기는 했지만 조련 능력은 톱이었던 지휘자 아르투르 로진스키가 초빙되었고, 1937년 11월에 NBC 방송국의 본거지였던 라디오 시티에 자리잡은 8H 스튜디오에서 열린 첫 방송 연주회에서는 프랑스 출신의 피에르 몽퇴가 지휘를 맡았다.
2.2.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의 전성기
같은 해 크리스마스에는 이탈리아 출신의 대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처음으로 지휘대에 섰는데, 이후 토스카니니는 1941~42년 동안 NBC와 계약 협상의 결렬로 사임했던 때를 제외하면 이 악단과 대부분의 연주회를 개최했다. 토스카니니가 없었을 때는 동료였던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악단을 이끌었고, 1942년에 복귀한 뒤에도 1944년까지 공동으로 수석 지휘를 맡았다.라디오 방송과 음반 시장을 동시에 공략한다는 사노프의 아이디어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1940년에는 창단 이래 처음으로 라틴아메리카 순회 공연을 가졌다. 1년 뒤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수많은 전쟁 지지 집회나 전비 마련을 위한 자선 연주회에도 단골로 출연하게 되었고, 종전 후인 1948~52년 동안에는 텔레비전 콘서트도 개최했다. 1950년에는 미국 전역을 순회 공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1952년 이후로 여타 미국 방송국들과 마찬가지로 NBC의 음악 프로그램에서 클래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감소하고 있었고, 방송국의 악단에 대한 지원금도 줄어들어 GM 등 외부 스폰서의 지원을 받아 연주회를 개최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1954년 4월 4일에 카네기홀에서 열린 바그너 음악회 도중 토스카니니가 일시적인 기억 장애로 지휘를 잠시 멈추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악단 뿐 아니라 토스카니니 자신도 상당히 충격을 받았는지 이 공연 이후 일체의 연주회를 지휘하지 않았고 6월 초에 베르디 오페라의 보충 녹음을 한 뒤 은퇴하고 말았다.[1]
2.3. 심포니 오브 디 에어(Symphony of the Air)
토스카니니가 은퇴하자 NBC도 악단을 해체했는데, 대부분의 잔존 단원들은 NBC의 해체 방침에 반발해 자주적으로 새로운 악단인 심포니 오브 디 에어(Symphony of the Air)를 만들었다. 1954년 10월 27일에 카네기 홀에서 연 데뷔 공연에서는 토스카니니를 추모하기 위해 지휘자 없이 악장만의 수신호로 모든 프로그램을 연주했다는 감동적인 일화를 남겼으며, 1955년 중반에 있던 아시아 투어 중에는 당시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에서도 공연을 하면서 해방 이후 최초의 해외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이라는 뜻깊은 기록도 세웠다.1955년 5월 25일, 심포니 오브 디 에어의 서울 공연을 관람하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상)와 13,000명의 한국인들(하)[2] |
이 악단은 NBC 교향악단 시절에도 잠시 수석 지휘자를 맡았던 스토코프스키를 비롯해 레너드 번스타인 등 막 떠오르던 신진 지휘자들과 공연하면서 나름대로 유명세를 이어갔고, RCA에 녹음을 할 때는 'RCA 빅터 교향악단(RCA Victor Symphony Orchestra)' 이라는 이름으로 연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9년 가까이 버틴 이 악단도 결국 재정난 때문에 1963년에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3. 주요 활동과 음반
활동 초기에는 8H 스튜디오에서 공연과 녹음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 스튜디오는 애당초 공연용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서 잔향이 부족한 매우 건조한 음향으로 악명이 높았다. 결국 RCA 측의 요구로 대부분의 음반은 카네기홀에서 녹음되었고, 방송 연주회도 마찬가지 장소에서 진행되기도 했다. 1950년에 스튜디오가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 전용으로 개수되자 후반기 활동은 대부분 카네기홀에서 진행되었다.토스카니니 외에 당시 나치의 탄압이나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에리히 클라이버나 브루노 발터, 샤를 뮌슈, 에리히 라인스도르프, 프리츠 라이너, 조지 셀 같은 유럽 출신 지휘자들도 객원으로 지휘했고, 토스카니니의 만년에는 그가 후계자로 점찍은 이탈리아 지휘자인 귀도 칸텔리도 이 악단과 여러 차례 공연을 가졌다. 이외에 불과 여덟 살에 지휘 활동을 시작해 신동으로 불렸던 로린 마젤도 11살 때 이 악단과 연주회를 가진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다만 악단의 탄생과 발전에 기여했던 사노프의 아이디어나 토스카니니의 카리스마 모두 전후 클래식 음악계의 쇠퇴/변혁과 함께 빛이 바랜 감이 없지 않았고, 특히 토스카니니의 이름값에 크게 의지했던 악단의 특성상 그의 은퇴와 함께 사라질 운명이었다고 평하는 이들이 많다. 해체 후 명맥을 이어간 심포니 오브 디 에어도 초기에는 해체 위기를 극복한 단원들의 용기나 응집력 덕에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결국 구심점을 찾지 못해 9년 만에 주저앉고 말았다.
방송 출연과 음반 녹음을 병행한 덕에 엄청난 양의 녹음들이 제작되었고, 방송 연주회의 대부분도 아세테이트 디스크에 녹음되어 RCA에 제작한 스튜디오 녹음들과 별도로 훗날 음반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교향곡이나 협주곡 등 관현악 작품들 외에 오페라 등도 방송 연주회와 녹음으로 여러 종류 남겨져 있고, 1930~40년대 미국에서 활동한 대부분의 유명 독주자와 독창자들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이들 녹음 대부분은 토스카니니가 지휘해 제작되었고, 거장 지휘자의 말년 음악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라 세기가 바뀐 뒤에도 계속 여러 차례 마스터링을 거쳐 발매되고 있다.
[1] 게다가 저 공연의 실황은 방송으로 녹음되었기 때문에 유튜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페라 '탄호이저' 의 바카날 연주 도중 갑자기 흐트러지는 관현악 연주를 통해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2] 1955년 8월에 창간되어 1959년 상반기에 종간된 월간지 '음악'에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