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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6년 백두산 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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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 천문봉 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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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946년 백두산 분화
946 eruption of Paektu Mountain
파일:946년 백두산 분화 학술지도 안.png
<colbgcolor=#bc002d> 발생 시각 946년 11월(추정)
발생 지역
백두산 천지
종류 화산 폭발지진
화산 분화 규모 VEI 6 또는 7(추정)
분출량 40~98km³
인명피해 불명(기록 없음)
재산피해 화산쇄설류
화산재 강하
다수의 가옥 파손(추정)
영향 947년 이후 국지적인 기후 영향

1. 개요2. 분화 규모3. 기후 영향4. 연대 측정
4.1. 기록4.2. '발해 멸망 원인설'과 반론
5. 여담
5.1. 일본 내 '한민족 교체' 낭설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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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946년 백두산 분화 또는 일명 천년 분화(The Millennium Eruption)는 서기 946년 백두산에서 발생한 대규모 화산 분화로, 백두산이 플리니식 대폭발(Plinian eruption)을 일으킨 마지막 분화이자 최근 5천 년 동안 발생한 지구상의 화산 분화 가운데 네 번째로 강력한 분화이다. 오늘날 천지를 형성하는 거대한 화구 셋 중에서 하나는 이 당시에 형성된 것이다.
파일:1730639061965.jpg

위 사진에서 짙은 보라색 음영으로 칠해진 3곳이 천지의 거대 화구들이다. 이 중 두 곳에서 천문봉 분화와 946년 백두산 대분화가 일어났다. 나머지 화구 하나는 분화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2. 분화 규모

10세기의 백두산 분화가 알려진 것은 일본 북부에서 발견된 상당한 양의 화산재 덕분이었다. 1970년대에 역산한 결과 꽤 큰 폭발이 있었어야 했다는 추측이 나와 세계 화산학계의 이목을 끌었으며, 특히 미국과 일본의 화산학계를 중심으로 꾸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북서풍이 불던 겨울철에 발생한 분화이기 때문에 천년 분화 분출물의 상당량은 동해에 퇴적되었으나 다양한 이슈 때문에[1] 정확한 규모를 계산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여러 추정이 있었는데, 화산재의 양을 넉넉히 잡아 가정하면 화산폭발지수(VEI) 7.4에 해당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해외 화산 학계에서는 이러한 수치가 굉장히 과대평가된 것으로 확인했고, 최근 가장 인정 받는 분출량은 40~98km³으로 이는 VEI 6이다. 물론 VEI 6이라고 해서 절대로 약한 분화가 아니었다. 이는 지난 5,000년 동안 탐보라 화산, 1458년 미스터리 분화, 미노아 분화에 이은 네 번째로 강력한 분화로, 1883년 크라카타우 분화보다도 더 강력하다.

3. 기후 영향

백두산의 946년 대분화는 특이하게 기후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 이유로 '북반구에 위치해 있고 대륙 한복판에서 겨울에 분화하였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의문은 지워지지 않는다.

946년 대분화의 최근 평가된 총 분출량은 40~98km³로 세계 기후에 영향을 주기엔 충분한 양이기 때문이다. 분화 규모가 몇 배 더 작았던 크라카타우의 19세기 분화도 기온을 0.2-0.5도를 끌어내렸다고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백두산의 946년 대분화는 어째서 기후에 영향을 주지 못했을까?

여기서 잠시 다른 화산 기록 하나를 보고 가야 한다.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아이슬란드 엘드자(Eldgjá) 화산이다. 엘드자에서는 939년에서 940년까지(혹은 943년까지)[2] 사이에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대분화가 있었다. 당시 엘드자의 총 분출량은 18km³로 화산 폭발 지수(VEI) 6으로 946년 백두산 대분화보다 분화량은 적다. 하지만 문제는 이 엘드자의 분화가 인류가 목격한 최초의 홍수 현무암이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대부분을 용암의 형태로 분화했다는 점이다.

참고로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화산 중 하나인 하와이의 킬라우에아 화산은 가장 활동성이 높았을 때, 높이 수백 미터에 달하는 용암 분수 시도 때도 없이 분출하였고, 푸우오오 화산과 킬라우에아 칼데라의 할레마우마우 분화구에서 각각 거대한 용암 호수를 유지했다. 그런데도 분출량은 연간 평균 0.2km³에 불과했다.

더불어 18km³의 용암을 남한 전역에 고르게 둔다면 18cm 높이로 쌓일 수 있다. 이 말인즉슨, 엘드자 분화 당시 아이슬란드에서는 용암 호수 정도가 아닌 용암의 바다라 불려도 될 광경이 펼쳐졌을 것이다. 용암이 수년에 걸쳐 지하에서 끝없이 솟구쳐 오르고 설상가상으로 용암과 빙하가 접촉하여 곳곳에서 플라니안 분화까지 일어났다. 이로 인해 아이슬란드는 물론 유럽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
우리는 태양을 보았는데, 태양은 빛도 열도 힘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하늘을 보았고 그 색깔이 마치 점성이 있는 것처럼 변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태양이 마치 절반처럼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 엘드자의 분화 이 후, 날레스 카시나테스의 기록, 이탈리아- 출처 : https://pmc.ncbi.nlm.nih.gov/articles/PMC6560931/

여기서 잠시, 1783년 일어났던 라키 화산의 분화의 기록을 보자. 라키 화산의 겅우 화산 폭발 지수(VEI) 4-5로 평가 받고 있는데 엘드자보다는 매우 적은 분출량이지만, 유럽을 대혼란으로 이끌었다. 기록에 따르면 아이슬란드에서 용암이 1km 넘게 솟구쳤으며 최대 1.4km까지 솟구쳤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서울 한복판에서 용암이 분화했다고 치면 북한산의 거의 갑절이나 되는 높이로 용암이 뿜어져 나온 것이다. 또한 라키 분화는 장기간 기후에 큰 영향을 끼쳤고 6년 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는 도화선 역할이 되었다.

엘드자 분화도 수년에 걸친 분화 끝에 무려 지구의 온도를 2도 끌어내렸다고 평가받는다. 갑자기 지구에 소빙하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온도 하락으로부터 기후가 원래대로 회복되기까지 라키 화산처럼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라키 화산보다 더 거대한 규모로 분화한 엘드자 화산은 946년 백두산의 분화 당시까지 전 지구적으로 기후에 심대한 영향을 주고 있었을 것이다.

즉, 946년 분화는 그 위력에 걸맞게 충분히 지구의 온도를 끌어내렸으나 이미 엘드자로 인하여 지구의 온도가 크게 하강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영향의 상당부분이 가려졌다고 추측한다.

4. 연대 측정

유사 이래 가장 강력한 분출인 이 분출은 과거 연대 측정 값이 약 1,000년 내외로 산출되었기에 '천년 분화'라고도 불리며, 지속적인 고-분해능 동위원소 측정 및 고생물학계의 탐사로 그 범위가 점차 좁혀져 현재는 946년에 분화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영국스위스, 중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미국 등 국제 공동 연구팀이 2017년 백두산 천지에서 북서쪽으로 24km 떨어진 중국 지역에서 뜨거운 용암에 뒤덮여 죽은 낙엽송의 화석을 발견해 방사선 탄소 동위 원소 측정을 했다. 이후 172번째 나이테가 우주로부터의 감마선 폭발(#)로 인한 피폭이 있었던 775년쯤 만들어졌음을 산출한 연구팀은 그 나이테를 기준으로 이 나무에 나이테 몇 줄이 추가로 더 만들어졌는지를 확인했다. 그 결과 이 낙엽송은 946년 10월에서 12월 사이[3] 화산 쇄설물에 덮여 죽은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화산 폭발 시기를 이번처럼 오차 범위 3개월 이내로 정확하게 추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또 연구팀은 실제로 백두산 화산 폭발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그린란드의 빙하코어(ice core)에서 화산 분출물인 황이 유난히 많이 들어 있다는 것을 찾아냈다. 비록 지구 기온 변화에 큰 영향을 주진 않았지만 당시 백두산 화산에서 방출된 황이 전 세계로 퍼졌다는 증거였다. #

4.1. 기록

是歲天鼓鳴赦.(시세천고명사)
이 해(946년) 천고(天鼓)가 울리므로 사면령을 내렸다.
고려사정종 원년 지식백과

연구팀은 또 한국 역사서인 《고려사》에서 946년 바로 그 해에 수도 개경의 하늘에서 커다란 천둥소리[천고명(天鼓鳴)]가 들렸다는 기록이 있음을 찾아냈다. 연구팀은 이것이 백두산 화산 폭발 소리라고 추정했다. 개경과 백두산은 약 470km 떨어졌는데 대략 서울에서 제주 거리 정도이다. 탐보라 화산 폭발 당시 이 거리보다 더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도 화산 구름으로 뒤덮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백두산 화산 폭발이 충분히 개경까지도 영향을 주었으리란 주장이다.
十月七日夜白灰散如雪。(시월칠일야백회산여운)
10월 7일(양력 11월 3일) 밤 하얀 재가 눈처럼 흩어져 내렸다.
《고후쿠지연대기》(興福寺年代記, 흥복사연대기) 텐교(天慶) 9년(946) 기록 中

연구팀은 일본 나라 지역의 사찰인 고후쿠지(興福寺)의 기록에서도 증거를 찾아냈다. 고후쿠지의 기록에는 946년 11월 3일 '하얀 재가 눈처럼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이 바로 백두산의 분화로 화산재가 떨어진 것을 기록한 것으로 연구팀은 추정했다. 연구팀이 백두산 화산 폭발을 946년 가을에서 겨울 사이로 추정한 것이 기존의 역사 기록과도 일치한다는 것이다. 해당 기사 백두산 분출물이 일본 나라 현까지 도착하는 데는 16시간이면 충분하므로, 정확한 화산 폭발 시간은 946년 11월 2일 저녁 무렵일 확률이 높다.
正月十四日庚子,此日空中有声,如雷。(정월십사일경자, 차일공중유성 여뢰)
정월 14일 경자, 이 날 하늘에 소리가 울렸는데, 마치 우레와 같았다.
《일본기략》(日本紀略) 中

947년 2월 7일에도 일본의 수도인 교토에 하늘이 요동치는 소리가 울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일본 내의 자연현상인지 백두산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다. 플리니식 분화 소음이 교토에까지 들릴 정도였다면 필시 한반도에서도 들렸을 테지만 교차 기록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일본 내 다른 현상이라고 추정한다. 만에 하나 백두산에서 난 소리라면 앞서 11월 시작한 분화가 이때까지도 계속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4.2. '발해 멸망 원인설'과 반론

천년 분화가 사람들의 관심을 끈 데에는 단순히 규모가 크다는 것 뿐 아니라, 시기가 맞물려 발해 멸망과 관련 있다는 주장도 한몫 했다. 정밀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인 1992년, 일본의 화산학자였던 마치다 히로시는 백두산이 폭발해 발해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설을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발해는 926년에 이미 멸망했다. 당시 기록들을 살펴 보면 발해는 멸망하기 전에 이미 한반도 북부에 대한 통치권을 잃어 말갈인들이 독자적으로 국명을 자칭하고, 신라와 화친한 기록들이 존재한다. 즉 이때부터 나라 상황이 좋지 않았으며, 결국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의 기습적인 침공으로 멸망했다. 발해/역사 참고.

그러나 《요사》나 동시대 역사서에 백두산에 대한 언급이 없어 분화와 멸망 사이의 인과관계는 인정받지 못했다. 오히려 바람의 방향에 따라 중국 쪽에는 거의 영향이 없었을 수도 있음이 밝혀졌다. # 특히 2010년대의 정밀 조사로 분화가 일어난 시기가 발해의 멸망보다 뒤의 일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러한 가설은 더욱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발해는 926년 거란의 맹공으로 멸망했으므로 946년은 발해가 멸망한 지 이미 20년이나 지난 시기라 백두산 폭발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파일:발해 멸망 백두산.png
기록상 확인되는 발해의 멸망년도는 926년으로, 946년보다 20년이나 이르다.

다만 대분화 이전에 일어난 소규모 분화가 발해의 쇠퇴에 영향을 주었거나, 멸망 이후 발해부흥운동의 전개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은 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이윤수 박사는
"백두산 대분출은 946년에 일어났지만, 그 전에 소규모 분출이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도 백두산은 1,000년 단위 대분출 주기와 100년 단위 소규모 분출 주기가 함께 도래했기 때문에, 정확한 시기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그로 인해 발해가 멸망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 제기했다.

5. 여담

5.1. 일본 내 '한민족 교체' 낭설

2010년대 일본 인터넷상의 혐한 네티즌들은 자국 일본과 연결고리가 있는 한반도의 고대사와 현대의 한국을 단절시키고자 혐한 증오발언의 일종으로 '천년 분화 당시 고대 한민족이 화산재로 멸망했고, 오늘날 한반도에 있는 민족은 대분화 이후 북방에서 내려온 유목민족의 후손'이라는 근거가 없는 설을 무차별적으로 퍼뜨리기도 했다. 정확한 백두산 분화 연대가 측정되지 않았던 2010년대 초반 당시까지 '백두산의 분화가 발해의 멸망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던 소수 학계의 정보 하나만을 가지고 자의적으로 허무맹랑한 역사를 창조한 것이었다.
파일:백두산 분화 관련 역사왜곡.jpg

이들의 주장은 '일본 도래인과 관계가 있다고 추정되는 고대 한국인과 현재 한국인은 유전적, 문화적으로 관련이 없고, 백두산 분화로 고대 한국인 대부분이 (한반도 남부의 인종까지 모두) 멸종한 뒤, 만주 이북에서 거주하던 말갈족이나 에벤키족이 한반도로 남하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 열도에 문물을 전래했던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현대의 한민족과 단절시키고, 현대 한민족을 근본 없는 오랑캐의 후손 취급함으로써 '한국인들은 백제 후손이 아니니까 우리가 문물을 전래받은 것은 너희 한국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려는 역사 왜곡의 일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이후 정밀하게 측정된 분화 시기(946년)가 발해 멸망보다 나중의 일이라는 점과도 빗나갈 뿐만 아니라 백두산의 화산재가 동해 지역에 집중되었다고 설명하는 1980년대 이후의 기본적인 관련 논문조차 살펴보지 않은 음모론이다. 오늘날의 지질학적 조사에 따르면 분화 당시에 가장 심각한 영향을 받은 지역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 동북부~홋카이도 일대였다. 특히 한반도 남부는 기록상으로도 지질학적으로도 이 분화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없다.

또한 이들의 주장에는 한국사의 기초적인 지식조차 결여되었다. 천년 분화 시기는 엄연히 문명이 있었던 역사시대로서 한반도 남부에 고려라는 국가가 멀쩡히 존재하욨더, 946년은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시도했던 고려 정종이 왕위에 오른 해였고, 후삼국시대에서 왕건의 고려 왕조 개창과 신라의 항복, 발해 유민의 포용으로 이어지는 당시 한국사의 연속성은 《고려사》를 포함한 국내외 다수의 기록에서 멀쩡하게 확인된다. 따라서 이러한 낭설은 일본 내에서도 기본적인 역사적 지식이 없는 일부 부류가 허황되이 하는 주장일 뿐, 일본 학계에서도 전혀 논하지 않는다.

위와 같은 혐한 음모론에서 북방 유목민이 자주 인용되는 것은 '현대의 일본인이 백인과 닮은 아이누조몬인의 피를 물려받았고, 인종적으로 열등한 몽골리안 계통의 민족은 한반도에서 넘어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유서 깊은 탈아입구우생학 시대의 사상과 연관이 있다. 이 역시 학계에서는 오래 전에 사장되었고 인종주의 극우 단체들만이 고집하는 그들만의 낭설이다. 얄궂게도 현대의 유전적 계통 조사에서 현대 일본인과 가장 가까운 인종은 현대 한국인이고, 《일본서기》를 비롯한 옛 일본 역사서에도 한반도인들이 일본 열도에 많이 정착했다는 사실이 대놓고 기록되었다.

6. 관련 문서




[1] 대표적으로 정치적 문제, 즉 북한 문제.[2] 941년까지 화산활동을 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3] (Oppenheimer et al.,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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