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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미국 주지사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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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미국 주지사 선거
1998 United States gubernatorial e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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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대상 미국 주지사 50석 중 36석
선거 결과
정당 및

의석
17석 -0석 31석 ▼1석 1석 ▲1석

1. 개요2. 관심 선거
2.1. 미네소타: 놈 콜먼(공) vs 스킵 험프리(민) vs 제시 벤추라(개)2.2. 캘리포니아: 댄 런그렌(공) vs 그레이 데이비스(민)2.3. 사우스캐롤라이나: 데이비드 비즐리(공) vs 짐 호지스(민)2.4. 아이오와: 짐 로스 라이트풋(공) vs 톰 빌색(민)2.5. 플로리다: 버디 맥케이(민) vs 젭 부시(공)2.6. 뉴욕: 조지 퍼타키(공) vs 피터 발로네 시니어(민) vs 톰 골리사노(무)2.7. 텍사스: 조지 W. 부시(공) vs 개리 마우로(민)2.8. 미시간: 존 앵글러(공) vs 제프리 파이거(민)
3. 선거 결과4. 총평

1. 개요

1998년 11월 3일에 열린 미국의 주지사 선거. 1998년 미국 중간선거의 일부로 1998년 미국 하원의원 선거, 1998년 미국 상원의원 선거와 함께 실시한다.

2. 관심 선거

2.1. 미네소타: 놈 콜먼(공) vs 스킵 험프리(민) vs 제시 벤추라(개)[당선]

현직 아르네 칼슨 주지사가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공석이 된 주지사직을 놓고 본선에서는 세 명의 후보가 맞붙었다. 전통적인 민주-공화간 양당 대결이 아니라 3자 대결이 된 이유는 개혁당제시 벤추라 덕분인데 브루클린파크 시장을 지낸 전직 프로레슬러 출신으로, 정치 경력은 짧았지만 대중적 인지도와 기존 정치에 대한 반감을 결집시키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캠페인을 펼쳤다. 그는 약 30만 달러의 저예산으로 독특한 광고, 인터넷 활용, 전통 미디어 노출, 지역 순회 유세 등을 통해 지지를 넓혀갔다. 선거 구호 역시 이런 경향을 반영하듯 “Don’t vote for politics as usual(판에 박힌 정치엔 투표하지 마세요)”였다.

민주당은 주법무장관이자 전직 부통령 휴버트 험프리의 아들인 스킵 험프리를 후보로 지명했다. 험프리는 당내 경선에서 마이크 프리먼, 마크 데이턴, 테드 먼데일 등 정치 명문가 출신 인사들과 경쟁했으며, 본선에서는 주류 정치와 정책 안정성을 강조했다. 캠페인 후반에는 스타 트리뷴 등 주류 언론의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기성 정치인 이미지가 강해지면서 젊은층 및 무당층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공화당은 놈 콜먼 세인트폴 시장을 후보로 내세웠다. 원래 민주당원이었던 콜먼은 1996년 공화당으로 전향해 1997년 세인트폴 시장에 재선된 뒤 주지사에 도전했다. 세금 감면, 학교 선택권 확대, 낙태 및 동성결혼 반대 등 보수적 의제를 핵심 공약으로 제시했다. 당내 다른 예비후보들보다 중도 노선에 가까워, 본선에서 보다 넓은 유권자층을 목표로 했다.

벤추라는 개혁당 내에서 단독 후보로 출마하였지만 본격적인 선거 운동 기간이 시작되기 전까진 여론조사에서는 콜먼과 험프리에게 밀리는 3위권 후보였다. 그러나 10월 말 3자 토론회 등 TV 노출 이후 지지율이 급등했고, 특히 젊은 남성 유권자층과 정치 혐오층에서 강한 반향을 일으켰다. 투표일 직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콜먼과 험프리가 경합하는 가운데 벤추라가 20% 초반의 지지를 받으며 3위에 그칠 것으로 나타났지만, 실제 투표 결과는 크게 달랐다.

최종 개표 결과, 제시 벤추라가 36.99%를 얻어 여론조사를 뒤엎고 승리했고, 콜먼은 34.29%, 험프리는 28.09%에 그쳤다. 미네소타 주 전체에서 벤추라는 87개 카운티 중 절반 가까이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특히 교외 및 외곽 지역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다. 콜먼은 보수적인 중남부 지역에서, 험프리는 전통적 민주당 지지 기반인 북부 광산 지역과 일부 도시권에서만 강세를 보였다.

이 미네소타 주지사 선거는 개혁당이 주요 정당 수준의 지지율을 기록한 유일한 사례이며, 미네소타에서 제3당 후보가 주지사에 당선된 유일한 기록이기도 하다. 벤추라의 득표율은 1890년 이래 미네소타 주지사 선거에서 가장 낮은 승리 득표율이었다. 이후 벤추라는 주지사직을 수행하면서 세금 구조 개편, 교육예산 편성, 경전철 개발 등의 정책을 추진했지만 정계에 오래 남지는 않았고, 2002년 재선에는 도전하지 않았다.

2.2. 캘리포니아: 댄 런그렌(공) vs 그레이 데이비스(민)[당선]

현직 공화당 주지사 피트 윌슨 주지사가 임기제한 규정으로 인해 출마할 수 없었다. 윌슨은 재임 기간 중 보수적 성향의 이민 정책과 재정 긴축 정책으로 중장기적 논란을 야기했고, 캘리포니아 헌법상 임기 제한으로 인해 출마하지 못했다. 특히 1994년의 제안 187(Proposition 187)을 통한 반이민 선동은 라틴계 및 아시아계 유권자층의 대거 이탈을 촉진했으며, 이는 민주당의 지지 기반 강화로 이어졌다.

민주당 내 경선은 치열했지만, 그레이 데이비스 부지사가 정계 신인인 항공업계 경영자 알 체키와 제인 하먼 하원의원을 누르고 공천을 따냈다. 당시 데이비스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Experience money can't buy)”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막대한 자산을 캠페인에 투입한 체키의 이미지와 차별화했고, 교육을 핵심 의제로 삼았다. 경선 막판까지도 여론조사 3위에 머무르며 낙선하는듯 했으나, 일관된 메시지와 조직력, 타 후보 간 네거티브 난타전 속에서 신뢰도 높은 중도 이미지로 부상하며 극적으로 본선행을 확정지었다.

공화당 후보 댄 런그렌은 당시 연방 하원의원 출신의 주법무장관으로, 강력한 법과 질서, 반낙태, 금욕적 성교육, 총기 권리 옹호 등 전통적 보수 아젠다를 전면에 내세웠다. 본인을 로널드 레이건의 정치적 후계자로 포지셔닝하려 했지만, 캘리포니아의 변화된 유권자 구조 속에서는 점점 시대착오적 이미지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선거 막판에는 민주당과 진보계 언론에서는 런그렌을 지금 캘리포니아에 너무 구태적인 인물로 낙인찍으며 적극적인 부정 프레임을 씌웠다.

선거 막바지에는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 앨 고어 부통령, 힐러리 클린턴 영부인, 밥 케리 상원의원 등 당내 주요인사들이 집결해 데이비스 지원 유세에 나섰고, 런그렌은 과거 깨끗한 식수법안(Safe Drinking Water Bill) 반대 전력, 반낙태, 그리고 교육 정책에 대한 지나치게 보수적 입장을 두고 집중적으로 비판받았다. 데이비스는 토론회에서도 상대의 보수 노선을 부각시키며 비교적 온건하고 실용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선거 결과, 그레이 데이비스는 57.97%를 득표해, 38.38%에 그친 런그렌을 무려 19.6%p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데이비스는 58개 카운티 중 30곳에서 승리하며, 대도시권은 물론이고 일부 공화당 강세 지역까지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선거는 캘리포니아에서 레이건 시대 이후 그간 공화당이 우세했더 리버사이드, 샌버나디노, 샌디에이고, 킹스, 모노, 트리니티 같은 카운티를 뒤집은 첫 사례이기도 하다.

이 결과는 캘리포니아 정치에서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낳았다. ‘오픈 프라이머리 제도’를 통해 주 전체 유권자가 정당을 불문하고 후보를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로 정당개방형 오픈 프라이머리 제도가 안착하는데 크게 기여했고 선거 이후 데이비스는 선거구 재조정 시기(2000년 인구조사 이후)의 획정 권한을 확보하게 되며, 이는 민주당의 장기 전략에 큰 자산이 되었다.

다만 데이비스 주지사는 에너지 위기와 공공 서비스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면서, 2003년에는 주지사 리콜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됐고 이 뒷자리로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부상하게 됐다.

2.3. 사우스캐롤라이나: 데이비드 비즐리(공) vs 짐 호지스(민)[당선]

민주당 후보 짐 호지스는 주하원의원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중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치인으로, 경선 없이 곧바로 후보로 지명되었다. 캠페인 초반에는 낮은 인지도를 극복해야 했지만, 일찌감치 교육 문제를 핵심 쟁점으로 삼고 전략을 집중했다. 당시 주 전역의 낮은 SAT 점수와 학업 성취도를 현직 주지사의 책임으로 돌리며, 무상 유아 교육 확대와 복권 수익을 기반으로 한 대학교 장학금 제공을 약속했다. '교육복권' 정책은 특히 저소득층 유권자들과 자녀 교육비 문제에 민감한 중산층 유권자, 특히 사커맘 계층의 주목을 받았다.

공화당의 현직 데이비드 비즐리 주지사는 당내에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선에서 72.2%의 득표로 쉽게 후보로 재지명되었지만[4], 전반적으로 방어적인 입장에서 선거를 치렀다. 교육복권 도입에 반대하며, 호지스 캠프가 도박 산업—특히 비디오 포커 산업—으로부터 막대한 후원을 받고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실제로 호지스 캠프 선거 자금의 약 70%가 비디오 포커 업계로부터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동시에 비즐리는 과거 남부연합기 문제에 대한 입장 번복(Flip-Flop)으로 인해 보수 유권자들의 신뢰를 일부 잃었고, 이 사안은 선거 내내 민감하게 작용했다.

호지스 측은 남부연합기 논쟁을 피하는 전략을 취하면서도, ‘팔메토 리그’와 같은 제3단체를 통해 비즐리의 일관성 문제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공세를 이어갔다. 또한 호지스 캠프의 선거 전략가 케빈 게딩스는 “버바(Bubba)”라는 캐릭터를 활용한 정치 광고를 기획했다. 조지아주 편의점 점원으로 설정된 버바라는 캐릭터가 조지아 복권 수익으로 교육 인프라가 개선된 사실을 언급하면서, “우린 복권으로 학교도 고치고 장학금도 줘요. 그런데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데이비드 비즐리는 그걸 반대한다죠? 그럼 뭐, 여기 조지아에선 데이비드 비즐리를 사랑할 수밖에요.”[5]라는 대사로 마무리되는 30초 분량의 풍자성 광고였다. 이 광고가 선풍적인 반응을 얻으며 선거전에서 유권자의 관심을 크게 끌었다.

결국 11월 3일 본선거에서 민주당 짐 호지스가 53.2%를 득표해, 45.2%를 얻은 비즐리를 8%p포인트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특히 호지스는 전통적으로 공화당이 강세였던 일부 시골 카운티뿐만 아니라, 저지대 해안 지역(로우컨트리)에서도 예상보다 높은 지지를 확보하면서 승리를 확정지었다. 비즐리는 1876년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현직 주지사가 재선에 실패한 첫 사례가 됐다. 전체 투표율은 약 53%로, 신규 유권자 등록은 많았으나 실제 투표율은 이전 선거에 비해 낮아졌으며 민주당이 2025년 기준으로 마지막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를 배출한 선거다.

2.4. 아이오와: 짐 로스 라이트풋(공) vs 톰 빌색(민)[당선]

공화당 현역 주지사였던 테리 브랜스태드가 4선 임기를 끝으로 불출마를 선언했고, 공화당 후보로는 짐 로스 라이트풋 전 하원의원이 나섰다. 그는 강력한 보수주의자이며, 높은 인지도를 자랑했기에 많은 언론은 그를 유력한 승자로 예측했다. 실제로 선거 초반 여론조사에서 라이트풋은 빌색을 20%p 이상 앞서기도 했다.

반면 민주당의 톰 빌색 주상원의원은 전국적 인지도가 낮았으며, 캠페인 자금도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totally new governor(완전히 새로운 주지사)”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교육개혁과 농촌 지역 의료 접근성 확대 등을 중심으로 실용적 개혁 노선을 강조했다. 라이트풋이 총기 규제 반대, 낙태 제한 지지 등 강경한 보수색을 드러낸 반면, 빌색은 중도적이고 협력 지향적 이미지를 부각하며 도시와 교외 유권자층을 파고들었다.

선거 후반부로 갈수록 빌색의 메시지는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디모인이 위치한 폴크 카운티, 대학도시 아이오와시티가 있는 존슨 카운티 등 민주당 강세 지역은 물론이고 중서부 일부 스윙 카운티에서도 빌색이 라이트풋을 앞서며 격차를 줄여갔다. 특히 공화당 내부에서도 라이트풋의 지나치게 경직된 보수 이미지에 대한 피로감이 있었고, 현직 테리 브랜스태드의 실용적 보수주의 스타일과 대비되었다는 평가도 나왔다.

개표 결과, 톰 빌색은 52.3%를 득표하며 46.5%에 그친 라이트풋을 꺾고 아이오와 주지사로 당선됐다. 이 승리는 단순한 당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빌색은 이후 재선에 성공하며 2007년까지 주지사로 재임했고, 오바마 및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두 차례 농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 승리를 기점으로 민주당은 아이오와의 주지사, 상원, 연방하원 선거에서 그간의 열세를 극복하고 경쟁력을 회복해 나갔다.

2.5. 플로리다: 버디 맥케이(민) vs 젭 부시(공)[당선]

2.6. 뉴욕: 조지 퍼타키(공)[당선] vs 피터 발로네 시니어(민) vs 톰 골리사노(무)

2.7. 텍사스: 조지 W. 부시(공)[당선] vs 개리 마우로(민)

공화당 조지 W. 부시 주지사는 1994년 선거에서 민주당의 앤 리처즈 주지사를 꺾으며 정치에 입문했고, 1995년부터 주지사로 재임하면서 낮은 세율 유지, 교육 정책 개혁, 기업 친화적 환경 조성 등을 통해 넓은 유권자층의 신뢰를 얻었다. 취임 당시 지지율은 1995년 초 30% 후반대로 낮았지만, 1997년에는 70%를 넘었고, 선거 직전에는 무려 76%까지 상승했다. 이를 바탕으로 선거운동을 하면서도 무리하게 공격적인 전략을 취하지 않았으며, 전반적으로 현 상태 유지와 믿을 수 있는 리더십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집중했다.

민주당 후보인 개리 마우로는 4선 토지위원회 위원장으로, 미국 연방정부의 협력을 강조하고 교육, 환경, 보건복지에서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했지만, 초반부터 여론조사에서 큰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마우로는 특히 부시가 1995년 거부한 환자보호법(Patient Protection Act) 문제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며, HMO와 보험업계에 대한 부시의 우호적 태도를 비판했다. 그러나 당시 유권자들은 이 이슈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부시는 오히려 “공공 재정의 책임성과 교육 성과 중심 접근”을 강조하며 대응했다.

10월 16일 엘파소에서 열린 유일한 TV 토론에서 마우로는 교사 급여, 핵폐기물 매립지(Sierra Blanca) 문제 등에서 공격을 시도했지만, 부시는 마우로의 공약을 “과도한 지출을 부를 비현실적인 계획”으로 몰아가며 효과적으로 방어했다. 토론 이후에도 지지율의 큰 변화는 없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부시가 흑인 유권자의 27%, 히스패닉 유권자의 49%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공화당 후보로서는 유색인종을 상대로 받은 이례적인 지지율로, 텍사스에서의 다인종 지지 기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부시 진영도 이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는데 히스패닉 유권자에게 접근하기 위해 스페인어 광고도 적극 활용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개표 결과, 부시가 68.2%를 얻어, 31.2%를 얻은 마우로를 약 37%p 포인트 차이로 꺾었다. 254개 카운티 중 무려 239개에서 승리하는 압도적인 결과였는데, 1964년 이후 텍사스 주지사 선거에서 양당 후보간 가장 큰 격차였으며, 공화당이 처음으로 텍사스 주지사직을 연속해서 수성한 사례이기도 했다. 또한 민주당 강세 지역이던 엘파소, 히달고, 윌라시, 트래비스 카운티에서도 부시가 승리했고, 특히 진보 성향이 강한 트래비스 카운티에서 60% 이상의 득표를 기록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결과였다.

선거 이후 부시는 1999년 1월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고, 5개월 후인 1999년 6월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이후 2000년 대선에서 승리한 후 2000년 12월 텍사스 주지사직을 사임하고, 릭 페리 부지사가 그 자리를 승계했다. 결국 이 선거가 부시의 대권 가도에 있어 가장 강력한 정치적 자산으로 작용한 것으로 평가된다.

2.8. 미시간: 존 앵글러(공)[당선] vs 제프리 파이거(민)

3. 선거 결과

4. 총평


[당선] [당선] [당선] [4] 사실 현직 주지사가 경선 도전을 받는 자체가 흔하진 않은 케이스다.[5] 조지아주 대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교육경쟁력을 망치고 있으니 상대적으로 조지아주 입장에선 좋다라는 의미다.[당선] [당선] [당선] [당선]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