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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4-15 22:11:45

1990-91 농구대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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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90 농구대잔치
우승팀: 기아산업
MVP: 한기범
1990-91 농구대잔치
우승팀: 기아자동차
MVP: 정덕화
1991-92 농구대잔치
우승팀: 기아자동차
MVP: 허재
1. 개요2. 참가팀3. 운영방식4. 대회 결과
4.1. 1차 대회4.2. 2차 대회4.3. 3차 대회4.4. 3-4위전4.5. 챔피언결정전4.6. 대회 결산

1. 개요

1990년 12월 1일부터 1991년 3월 7일까지 펼쳐진 대한민국 농구대회 중 최 정상 레벨의 대회. 남자 18개팀, 여자 14개팀이 참가하였다. 이 문서에서는 남자부 대회에 대해서만 소개한다.
차수 우승팀 준우승팀 MVP 신인상
1차대회 기아자동차 현대전자 허재(기아) 문경은(연세대)
2차대회 현대전자 기아자동차 이원우(현대)
3차대회 기아자동차 현대전자 허재(기아)
챔피언결정전 기아자동차 현대전자 정덕화(기아)

2. 참가팀


대학농구연맹의 요구에 따라 대학팀 전체(12팀)가 참가하기로 하였으나, 성균관대학교만 자체 불참하였다.

3. 운영방식

무슨 대회가 토너먼트 했다, 풀리그 했다 이랬다 저랬다 한다.

4. 대회 결과

4.1. 1차 대회

1990년 12월 1일 개막하여 1991년 1월 2일까지 총 18팀 (실업 7팀, 대학 11개팀)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1) 조별 예선
순위 A조 B조 C조 D조 비고
1위 삼성전자 4 - 0 기업은행 4 - 0 상무 3 - 0 기아자동차 3 - 0 8강 진출
2위 한국은행 3 - 1 중앙대 3 - 1 현대전자 2 - 1 산업은행 2 - 1 8강 진출
3위 연세대 2 - 2 단국대 2 - 2 고려대 1 - 2 경희대 1 - 2 2차대회 진출
4위 건국대 1 - 3 한양대 1 - 3 명지대 0 - 3 동국대 0 - 3 탈락
5위 국민대 0 - 4 홍익대 0 - 4 탈락

2) 8강 토너먼트
8강전 4강전 결승전
삼성전자 (A조 1위): W
중앙대 (B조 2위): L
삼성전자: L
기아자동차: W
기아자동차: W
상무: L
기아자동차 (D조 1위): W
현대전자 (C조 2위): L
기업은행 (B조 1위): L
한국은행 (A조 2위): W
한국은행: L
상무: W
상무 (C조 1위): W
산업은행 (D조 2위): W

4.2. 2차 대회

1991년 1월 5일부터 1991년 2월 5일까지 진행되었다.

1) 조별 리그
순위 A조 B조 비고
1위 삼성전자 4-1 기아자동차 5-0 4강 진출
2위 연세대 4-1 현대전자 4-1 4강 진출
3위 상무※ 4-1 기업은행 3-2
4위 고려대※ 1-4 한국은행 2-3
5위 산업은행※ 1-4 중앙대 1-4
6위 경희대※ 1-4 단국대 0-5
※ 승패가 동률일 경우 골득실로 순위를 결정했다.

2) 결승리그
순위 4강리그 비고
1위 현대전자 2-1 골득실로 순위 결정
2위 기아자동차 2-1
3위 연세대 2-1
4위 삼성전자 0-3

4.3. 3차 대회

1991년 2월8일부터 1991년 2월 24일까지 진행되었다.

1) 조별 리그
순위 A조 B조 비고
1위 상무 2-1 삼성전자 2-1※ 4강 진출
2위 기아자동차 2-1 현대전자 2-1※ 4강 진출
3위 연세대※ 1-2 한국은행 2-1※
4위 산업은행※ 1-2 기업은행 0-3
※ 골득실차로 조별 순위 확정

2) 4강 토너먼트
4강전 결승전
상무: 패
현대전자: 승
현대전자: 패
삼성전자: 패
기아자동차: 승

4.4. 3-4위전

삼성전자 89:60 상무

4.5. 챔피언결정전

1차전 (1991.03.01) 기아자동차 70:63 현대전자
2차전 (1991.03.03) 기아자동차 101:90 현대전자
3차전 (1991.03.07) 기아자동차 76:69 현대전자

4.6. 대회 결산


[1] 서울 삼성 썬더스의 가드 이동엽의 아버지이자 前 용인 삼성생명 블루밍스 감독.[2] 1차대회 도중 입은 부상으로 의병전역.[3] 최부영 前 경희대 감독의 동생으로 180의 단신 득점기계였다.[4] 고교 졸업예정자 조기등록 규정에 따라 2차대회부터 출전.[5] 고교 졸업예정자 조기등록 규정에 따라 2차대회부터 출전.[6] 오성식은 대회기간 대부분 부상이었다.[7]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 수석코치[8] 단 결승 풀리그시 조별리그에서 붙은 팀의 전적은 조별리그 전적을 그대로 안고 갔다. 따라서 4강 풀리그에서는 팀당 2경기씩만 했다.[9] 그러나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금메달 이후 남자 농구의 우승은 20년 뒤인 2002 부산 아시안 게임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 당시는 세계선수권, 아시아선수권, 세계청소년대회, 유니버시아드까지 병역특례가 적용되었으나 이후 범위가 점점 축소되어 현행 규정(올림픽 동메달 이상, 아시안 게임 금메달)로 고정되었다.[10] 강동희는 보충역 판정을 받아 6개월만 복무했다. 이 당시 상무는 보충역 자원도 입대가 가능했으나 방위병이 폐지되고 공익근무요원으로 대체되면서 상무는 현역 자원만 받게 되었고 이후에는 신장과 체중 때문에 보충역 판정을 받은 선수도 지원이 가능하도록 바뀌었다.[11] 88-89 시즌 이후 3회 연속 우승이다. 참고로 허재가 88년도에 기아에 입단했다;;;[12] 원래는 허재가 MVP를 받는 것으로 확실시 되었으나 챔프전에서 폭행을 당한 일로 억울하게 징계를 받게 되어 제외되었다.[13] 허재는 챔프전에서 폭행을 당한 일로 억울하게 징계를 받게 되어 제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