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독립운동의 일부 | |
봉기 중 인민해방군에 의해 체포된 차롱 다상 다둘과 여러 티베트 승려들 | |
날짜 | |
1959년 3월 10일 ~ 1959년 10월 23일 | |
장소 | |
티베트 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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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9년 티베트 봉기는 티베트인들이 중국의 지배에 반대하며 일으킨 반중, 반공주의 성향의 대규모 봉기이다.[1] 이 봉기는 특히 라싸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2. 배경과 원인
1950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티베트를 침략하여 1951년 5월, '17개 조항 협정'을 체결하고 티베트를 중국의 일부로 통합하였다. 1951년 티베트를 ‘해방’시킨 중국은 티베트의 정치와 문화를 존중해 사회주의식 개혁 대신 자치를 약속했다. 그러나 캄과 암도 같은 지방에서는 폭력을 동반한 사회주의 토지 개혁과 사원 탄압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승려와 사원을 생활의 중심으로 여기고 살아온 주민들의 불만은 높아져 갔다.3. 진행
1959년 3월 1일, 중국 정부는 두 명의 군 장교를 조캉 사원으로 보내 달라이 라마가 준비 중인 '형이상학 석사 시험'의 날짜를 확인하고, 그가 라싸의 중국 본부에서 열리는 연극 공연과 차에 참석할 날짜를 확정하도록 압박했다. 5일, 달라이 라마는 형이상학 석사 시험을 통과하고, '게셰'(불교학 박사)라는 직위를 얻었다. 이틀 후 중국 군 장교의 통역자가 라싸의 최고 책임자인 보살에게 전화를 걸어 달라이 라마가 언제 공연에 참석할지 묻고, 3월 10일로 날짜가 설정되었다.공연을 보러가기 전날, 중국 당국은 달라이 라마의 보디가드에게 그가 철저히 비밀리에 공연을 보러 가기를 원한다고 알렸다. 그들은 달라이 라마가 보디가드 없이 참석할 것을 요청했다. 이를 들은 일부 티베트 정부 관계자들은 이를 대중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공연 관람이 달라이 라마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이라는 소문이 라싸에 퍼졌고 10일이 되자 거의 10년간 중국 군의 억압을 받은 티베트인들이 수천 명이 되어 봉기했다. 그들은 티베트 수도 라싸의 거리에 모여 달라이 라마 14세를 보호하기 위해 포탈라 궁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달라이 라마 14세이 암살될 위험이 있다고 우려한 그들은 이를 막기 위한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곧 폭력적인 진압으로 이어졌고, 라싸와 티베트 전역에서 수만 명의 생명이 희생되었다. 오전 늦게 30,000명이 모였고, 달라이 라마가 공연에 참석하면 납치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졌다. 12일에는 수천 명의 티베트 여성들이 거리와 포탈라 궁전 앞에 모여 티베트 독립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인도 영사관에 도움을 요청했다.
다음날 라싸에서 수천 명이 모여 '인민의 회의'를 결성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1949년 중국 군대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17개 조항 협정을 거부했다. 이 협정은 중국 중앙정부의 지도 아래 지역 자치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수천 명의 여성들이 다시 포탈라 궁전 앞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구르텡 쿤상에 의해 이끌어졌으며, 그녀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5일, 두 발의 중국 포탄이 포탈라 궁전을 향해 발사되어 명중하자. 달라이 라마의 라싸 탈출 준비가 시작되었다. 달라이 라마의 궁전이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 중국군의 중포들이 라싸와 노르불링카 근처로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중국군의 병력이 중국에서 비행기로 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졌다. 달라이 라마의 가족, 특히 그의 어머니는 몰래 탈출했고, 달라이 라마는 군인 복장을 하고 얼굴에 스카프를 두른 채 노르불링카를 떠났다. 18일에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탈출에 성공했지만, 중국 인민해방군은 여전히 노르불링카를 포격하며 그가 여전히 그곳에 있을 것이라 믿었다. 시위대가 기관총을 손에 넣고, 라싸에서 전투가 일어났다. 달라이 라마의 탈출 소식이 급속히 퍼지며 많은 사람들이 그가 궁전을 떠났다고 믿기 시작했다.
인민해방군은 라싸를 재정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포탈라 궁전 앞에 모인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포격이 가해졌다. 사진 속에서 달라이 라마와 그의 탈출 대원이 21일 자사골라 고개를 넘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라싸에서는 중국 군이 노르불링카의 문을 폭파하고 진입했으며, 조캉 사원도 포격을 받았다. 몇 차례의 전투 끝에 23일, 중국군은 조캉 사원을 포위하고, 그곳에 침입하여 건물 위에 중국 국기를 게양했다.
26일,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가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임을 공식 선언했다. 중국의 총리 저우언라이가 티베트 정부의 '해산'을 선언하는 국가위원회 명령을 제출했다. 31일에 달라이 라마는 인도 국경을 넘어, 인도 군의 호위를 받으며 봄디라 마을로 이동했다. 그는 인도에 도착 후 타왕 수도원에서 휴식을 취했다고 보고되었다.
1959년 4월 1일, 중국은 달라이 라마를 추적하고 있다고 보도되었으며, 공수부대와 비행기, 5만 명의 병력이 티베트 산악 지역을 수색하고 있었다. 3일, 인도 총리 자와할랄 네루는 인도가 달라이 라마에게 망명 권리를 부여했다고 발표했다. 달라이 라마는 인도 아삼의 테즈푸르에 도달해 기자회견을 열고 17개 조항 협정을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20일, 달라이 라마는 무소리로 도착해 빌라 하우스에 머물렀으며, 그의 탈출 이야기는 타임지의 커버스토리를 장식하게 된다.
4. 결과
1959년 3월 28일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는 티베트 완전정복에 나섰고, 티베트는 살육의 현장이 되었다. 사망자 수는 8만7000명에 달했다. 계엄령이 선포됐고 중국 공산당의 철권통치가 시작됐다. 티베트에서 번성했던 라마교는 큰 타격을 입었고 수천개의 사원이 파괴되어 수십개밖에 남지 않았다.#이듬해까지 8만여명이 달라이 라마를 쫓아 히말라야를 넘었다. 인도 다람살라에 있는 티베트 망명 정부는 전 세계에 흩어진 티베트 디아스포라의 숫자를 12만~15만명으로 보고 있다.#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한 후에도 매년 3월 10일마다 티베트인들은 분신자살로 뜻을 관철시키고 있다. 2008년 3월 14일에는 라싸에서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해 220여명의 사상자가 났고 티베트 봉기 50주년인 2009년에는 시위를 우려해 무장경찰 뿐만 아니라 저격수까지 배치하는등 난리도 아니다.#
[1] Norbu D. The 1959 Tibetan Rebellion: An Interpretation. The China Quarterly. 1979;77:74-93. doi:10.1017/S0305741000038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