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2-07 14:08:38

1818년 영국 총선


영국의 주요 선거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FFF>종류지난 선거다음 선거
영국 총선59회
2024년 7월 4일
60회
2029년 8월 이전
{{{#!folding [ 역대 선거 펼치기 · 접기 ]
영국 지방선거2024년
2024년 5월 2일
2025년
2025년 5월
{{{#!folding [ 역대 선거 펼치기 · 접기 ]
}}}}}}}}}||
1818년 영국 총선
1818 United Kingdom general election
{{{#!wiki style="margin: -0px -11.7px -5px"
{{{#!wiki style="margin-top: -6px; margin-bottom: -8px"
4회 총선 5회 총선 6회 총선
}}}}}} ||
선거 결과
파일:1818년 영국 총선 결과.png
<rowcolor=#006e46> 정당 총합 비율
280석 50.18%
175석 31.36%


[[무소속(정치)|
무소속
]]
98석 17.56%
자유당
4석 0.72%
1석 0.18%
1. 개요2. 정치적 상황3. 결과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1818년 영국에서 치러진 선거이다.

2. 정치적 상황

1812년 이래 총리로 재임 중이던 리버풀 백작은 1815년 나폴레옹이 권좌로 복귀하자 평화를 주장하는 폭스파의 반대를 물리치고 대 나폴레옹 강경책을 추진했다. 리버풀은 이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대프랑스 강경책을 내심 추종하던 그렌빌파와 가까워졌다.

워털루 전투의 결과 나폴레옹의 야망을 최종적으로 좌절시키면서 전쟁에 승리했으나, 오랜 전쟁의 여파로 영국의 경제 상황은 개판이나 다름 없었다. 경제적 파탄을 피하기 위해 리버풀은 곡물법을 도입해 농촌 경제 구원을 시도했으나, 정치적으로 많은 반대와 논란을 불렀고,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노동자들은 러다이트 운동이 일으키는 등 위기는 지속되었다.

1814년 이후 피트파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캐슬레이 자작을 정부에 들이며 피트파와 화해한 리버풀은 1817년 조지 그렌빌이 정계에서 은퇴하자 남은 그렌빌파를 사실상 흡수했다. 반대로, 그간 토리당의 일원이었던 윌리엄 캐번디시벤팅크의 포틀랜드파는 반대로 점점 휘그당에 가까워졌다.

이렇게 대내외적으로 위기가 계속되자 리버풀은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 총선을 치르게 되었다.

3. 결과

대내외적인 논란에도 불구하고, 토리당은 승리할 수 있었는데 이는 휘그당이 곡물법, 대외 노선, 대내 정책 간의 의견 차이로 인해 극도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렌빌파가 사실상 해소되면서 폭스파의 그레이 백작은 명목상 휘그당의 유일한 지도자가 되었으나, 그의 지도력은 완전하지 않았고 휘그당은 수많은 분파로 분열되었다. 여기에 노동자 권리 보장과 보통선거 시행을 주장하며 인기를 얻은 급진파의 대두로 인해 휘그당은 토리당보다도 더한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선거에서 승리하자 자신감을 얻은 리버풀은 사회적 불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연이어 억압적인 조치들을 시행했다. 이에 분노한 민중들이 사회 개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으나 군대가 출동해 잔혹하게 시위를 진압하면서 피털루 학살이라는 참사가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러나 이런 위기들에도 불구하고 리버풀은 기득권층만에게 투표권을 허락한 제도 덕분에 1827년 뇌졸증으로 쓰러질때까지 총리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4.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