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一言主神《일본서기》: 一事主神
일본 나라현 고세시(御所市)와 오사카부 미나미카와치군(南河内郡)의 경계에 있는 카츠라기산(葛城山)[1]의 신령으로, 길흉화복을 단 한 마디 신탁으로 내려주기 때문에 히토코토(一言)신이라 부른다. 일본의 언령(言靈) 신앙을 신격화한 신령이다.
2. 신화
《고사기》(712년 완성)에 이런 일화가 있다. 유랴쿠 천황(雄略天皇)이 어느 날 신하들을 데리고 카츠라기산에 올라갔는데, 이때 일행은 푸른 물을 들이고 붉은 줄을 단 옷을 입었다. 그런데 일행 맞은편에서 천황 일행과 똑같이 옷을 차려입은 또다른 무리가 오는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자세히 살펴보니 복장만이 아니라 서로의 얼굴마저 똑같았다. 유랴쿠는 수행인들을 돌아보며 "지금 이 나라에 임금이 나 말고 없을진대 누가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지나가는가!" 하였는데, 상대쪽에서도 유랴쿠가 한 말과 똑같은 대사를 외쳤다.유랴쿠가 분노하여 활을 겨누도록 명령하자 상대 일행도 똑같이 활을 겨누었다. 서로 활을 겨누고 대치하는 와중에 유랴쿠는 서로 이름을 밝히고 싸우기로 하자고 말을 꺼내었다. 그러자 상대편에서는 "좋다. 내가 먼저 질문을 받았으니 답하도록 하마. 나는 나쁜 일에도 한 마디, 좋은 일에도 한 마디, 한 마디만 말하는 신인 카츠라기의 히토코토누시노오카미이니라." 하였다. 이 대답을 듣고 유랴쿠는 "몰라뵈어 송구합니다. 오카미(대신, 大神)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 하고는 속죄의 의미로 가지고 있던 칼과 화살, 옷 등을 히토코토누시에게 바쳤다. 그러자 히토코토누시는 기뻐하면서 예물을 받고 유랴쿠 일행을 산 밑까지 배웅해주었다.
하지만 후대의 기록으로 가면 히토코토누시의 위상은 점점 낮아졌다. 《고사기》에서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일본서기》(720년 완성)만 가도 히토코토누시와 유랴쿠의 일화는 《고사기》와 많이 다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유랴쿠 천황이 재위 4년(460) 카츠라기산에 사냥을 하러 갔다가 사람으로 화현해 나타난 히토코토누시와 만났는데 모습이 유랴쿠와 많이 닮았었다. 유랴쿠는 벌써 상대가 신령인 줄 알았지만 짐짓 "공(公)은 어디 사는 자인가?" 하고 물었다. 히토코토누시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령이다. 임금이 먼저 이름을 밝혀라. 그런 다음에 말하겠다." 하였다. 그래서 유랴쿠가 "짐(朕)은 와카타케루노미코토(幼武尊)니라." 하고 자기 이름을 밝히자, 상대는 갑자기 공손해져서 "소생(僕)은 히노코토누시 신입니다." 하고 답하였다. 그리고 둘은 서로 같이 사냥을 하였는데, 유랴쿠가 돌아가려고 하자 히토코토누시는 카츠라기산을 벗어난 지역까지 따라와서 배웅하였다. 이 소문이 퍼지자 백성들은 유랴쿠가 덕 있는 천황이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고사기》의 일화에서는 유랴쿠가 히토코토누시가 신령임을 알고는 지극히 공손하게 대하였지만, 《일본서기》의 일화에서는 오히려 히토코토누시가 유랴쿠에게 알아서 굽힌다. 유랴쿠가 스스로를 짐(朕)이라고 하는데 히노코토누시는 자신을 소생(僕)이라고 겸손하게 낮추어 말하고 함께 사냥하며 모신다. 명백히 유랴쿠를 신령보다 더 높인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이 유랴쿠를 덕 있는 천황이라고 칭송했다는 구절로 마무리지어 더욱 금칠을 하였다.
심지어 《속일본기》(797년 완성)는 히토코토누시가 무례를 범했다는 이유로 유랴쿠가 신령을 토사(土佐), 오늘날 고치현 지방으로 유배를 보내버렸다고 기술했다.
원래 히토코토누시는 카츠라기산 일대에 사는 호족 카츠라기 씨(葛城氏) 집안이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신령이었다. 카츠라기 가문은 카츠라기산 일대를 일족의 터전으로 잡고 힘을 키워 고훈 시대에 유력하고 번창한 호족이 되었다. 그들은 자기 가문이 타케우치노 스쿠네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큰 권세를 누렸다. 하지만 5세기 중엽쯤, 오토모 씨(大伴氏)와 모노노베 씨(物部氏)가 치고 올라오자 세력이 크게 꺾였다가 5세기 말에 완전히 몰락하여 멸망했는데, 그 무렵이 바로 유랴쿠 천황 재위시기쯤이다.
그러므로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유랴쿠가 히토코토누시를 대하는 방식은 카츠라기 집안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정치적 입장이 강하게 녹아든다. 카츠라기 집안을 존중한다면 히토코토누시도 크게 존중할 수밖에 없고, 카츠라기 집안을 꺾어내고자 한다면 히토코토누시도 무시하고 폄하할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고사기를 집필한 무렵에는 이미 카츠라기 집안이 완전히 멸망해서 무시해도 되는 상대가 되었는데도 오히려 생각 이상으로 히토코토누시를 대접하여 높은 신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고사기의 묘사는 다른 방식으로 유랴쿠를 높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히토코토누시는 카츠라기 집안의 제사를 받는 신령이다. 따라서 히토코노누시 입장에서는 자신을 제사 지내는 카츠라기 집안을 멸망시킨 유랴쿠를 미워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고시기의 일화는 유랴쿠가 이렇게 분노했을 신령마저도 말로 설득하고 예의 바르게 속죄의 제물을 바침으로써 오히려 기뻐하시게 하고 떠나는 길에는 배웅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속일본기》는 유랴쿠가 히토코토누시를 토사(고치현)로 유배 보냈다고 했는데, 옛 토사 지역에 히토코토누시 신앙이 전파되었던 일을 반영한 듯하다. 오늘날 고치현 고치시에는 토사 신사(土佐神社)라는 크고 유서 깊은 신사가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유랴쿠가 히토코토누시를 토사로 유배 보내자 토사 신사에서 신령을 모셔 받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신사 측은 유랴쿠가 히토코토누시와 만났다는 재위 4년(460)을 신사가 창건된 해로 삼는다. 실제 창건은 훨씬 후대인데, 나중에 《일본서기》 이야기를 인용하여 신사의 창건년을 끌어올린 듯하다. 아무튼 토사 신사는 지금도 아지스키타카히코네(阿遅鉏高日子根) 신과 함께 히토코토누시를 주된 제신(祭神)으로 모신다.
《일본영이기(日本霊異記)》(822년)에서는 슈겐도의 창시자 엔노 오즈누(634?-701?)가 히토코토누시를 술법으로 옭아매어 부렸다고 더욱 굴욕적으로 묘사하였다. 엔노 오즈누가 자신을 부림을 굴욕으로 여겨 히토코토누시는 원한을 품었고, 결국 엔노 오즈누가 모반을 꾸민다고 조정에 밀고해버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엔노 오즈누는 699년 이즈섬(伊豆嶋)[2]으로 유배를 떠났지만, 낮에만 섬에 머물고 밤에는 신통력으로 후지산까지 날아가서 수도를 계속했다고 한다. 《일본영이기》에 따르면 영이기를 집필하는 시점까지도 히토코토누시는 엔노 오즈누가 걸어둔 술법을 풀지 못했다고 하니...
오늘날에도 카츠라기산 남동쪽, 나라현 고세시 옛 카츠라기 씨의 땅에는 히토코토누시와 유랴쿠 천황을 모시는 카츠라기히토코토누시 신사(葛城一言主神社)가 있다. 신사에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옛날 히토코토누시가 나타난 땅에 신사 건물을 세웠다고 한다. 이 신사는 히토코토누시 신앙의 총본산쯤으로 대우받아 오랫동안 영험한 신사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메이지 이후 1946년까지 근대사격제도 안에서는 고작해야 마을을 대표하는 촌사(村社)였다가 승격하여 현을 대표하는 현사(県社)가 되었을 뿐이다. 영험하다고 대우받았던 역사에 비하면 근대사격제도 안에서 대우가 꽤나 박하였다.
[1] 고대에는 현대의 콘고산(金剛山)과 야마토카츠라기산(大和葛城山)을 아울러 '카츠라기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두 산은 남북으로 연달아 있다. 오늘날에는 그냥 '카츠라기산'이라고 하면 야마토카츠라기산을 약칭하여 부른 것이다. 높이는 콘고산이 해발 1125 m, 야마토카츠라기산이 해발 959 m.[2] 오늘날 도쿄도 오시마정(大島町) 이즈대도(伊豆大島)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