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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00:43:53

히로이 이사미



廣井 勇
1862년 10월 24일 ~ 1928년 10월 1일 (향년 65세)

1. 개요2. 생애 및 업적3. 여담

1. 개요

일본토목공학자. 일본 항만공학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오타루항 방파제를 설계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2. 생애 및 업적

히로이 이사미는 고치현 출신으로 16세 때 전액 장학금을 지급한다는 삿포로농학교(현재의 홋카이도대학)에 진학했다.[1] 당시 삿포로농학교에는 전년도에 귀국한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대신 그의 제자인 윌리엄 휠러가 부임해 있었다. 윌리엄 휠러는 당시 20대 중반의 토목기술자였지만, 불과 3년의 임기 동안, 지금도 남아 있는 삿포로 시계탑(구 삿포로 농학교 연무장)과 목철 혼합 트러스 구조의 도요하시 다리를 설계 하는 등 활약하고 있었으며 국경을 넘어 당시 삿포로에 공헌하는 그 모습은 히로이 이사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 한 세실 피바디에게서는 토목공학, 수학, 측량기술, 물리학 등을 배웠다.

재학중이던 1877년 6월 그를 포함한 동기생 6명은 하코다테에 있던 감리교 계통의 선교사 메리만 해리스에게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히로이 이사미는 그들중에서 가장 열성적인 신자였다.

1881년 7월에 삿포로농학교 졸업후, 개척사에서 근무하면서 홋카이도 최초의 철도인 관영 호로나이 철도(官営幌内鉄道)의 오타루-호로나니 구간의 소규모 철도 교량을 설계했다. 1882년에는 도쿄의 공부성에 근무했다가 1883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 설계 사무소에서 근무하면서 여러 교량 설계에 참여했다. 이후 독일 유학 등을 거쳐 1889년 삿포로농학교 공학과 교수로 취임한다. 1889년에 아키타항 개항 공사에 참여해서 13년후 재개장한 아키타항은 '히로이 부두'라는 이름을 붙여 그의 공로를 인정했다.

1890년에는 하코다테 방파제 공사에 참여했고 1893년에 오타루항 건설 사업의 사무소장으로 취임하였다. 당시 오타루는 겨울의 계절풍에 의한 심한 파도에 휩쓸리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히로이 이사미는 방파제에 화산재를 혼입하여 강도를 더한 콘크리트를 개발하여, 그 콘크리트 블록을 71도 34분의 경사도로 나란히 쌓는 사괴공법이라는 독특한 공법을 채용하여 1908년 1300M에 이르는 일본 최초의 콘크리트 장대 방파제를 완성시켰다.

또한 1899년에는 도쿄제국대학(현재의 도쿄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히로이 이사미는 말년에 삿포로의 도요히라 다리를 설계했다. 도요히라 다리는 그의 스승이었던 휠러가 목재와 철재 혼합형식의 트러스 교량을 설계 건설했지만 홍수로 무너져 버리고 그후 히로이 이사미의 제자였던 오카자키 분키치가 설계했던 최초의 철교도 역시 홍수에 무너져 버린 상태였다. 히로이 이사미가 다시 설계하여 1924년 철제 아치교로 완성 시켰다. 이 철교는 20년 이상 긴 세월을 견뎌내면서 아사히카와의 아사히다리와 구시로의 누사마이다리와 함께 홋카이도 3대 다리라고 불렸다. 이 다리는 1964년에 해체 되었다.

이후 1928년 히로이 이사미는 협심증으로 갑자기 사망하게 되는데 1929년에 오타루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항구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고 이 동상은 우여곡절 끝에 1999년 오타루 운하 공원으로 이전 되었다. 출처

파일:otaru_bohatei01.jpg
그가 설계한 오타루항 방파제

3. 여담


[1] 당시 그는 삿포로 농학교 2기생으로 동기들로는 우치무라 간조, 니토베 이나조, 미야베 킨고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