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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희랑 希朗 | |
| 희랑대사좌상 | |
| 출생 | 889년 (진성여왕 3년) |
| 통일신라 강주 거창군 성기역리 (現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성기리) | |
| 사망 | 966년 (광종 17년) |
| 종교 | 불교 |
| 법명 | 희랑(希朗) |
| 성씨 | 주(朱) / 유(兪) |
1. 개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말기 활동한 화엄종 승려이자 고려 초 왕건의 복전(福田)으로 알려진 인물로, 관혜의 남악파(南岳派)와 함께 화엄의 두 일파를 이루는 법문인 북악파(北岳派)의 창시자이다. 북악 화엄학 계열의 대표 승려로 평가된다.2. 생애
신라 말기 강주 거창군에서 태어나 15세에 가야산 해인사로 출가해 평생을 불법 연구와 교화에 힘썼으며, 신라 말 화엄종 교학이 분화하던 시기 북악 계열을 대표하는 고승으로 이름을 알렸다.『균여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해인사에는 그와 더불어 관혜라는 또 다른 화엄종 대가가 있었는데, 관혜가 견훤의 복전이 된 데 반해 희랑은 왕건의 귀의를 받아 각각 남악파와 북악파라는 학맥을 형성하였다. 이는 단순한 종단 분화라기보다 후삼국 시기 정치 세력과 결합한 교단 구도의 일면으로 정치적 후원 관계였음을 보여준다.왕건은 그의 덕망을 높이 평가해 토지 500결을 하사했다고 전하며, 이러한 후원은 통일 이후에도 그의 법맥이 유지되는 기반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문장가 최치원이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에 해당하는 천령군 태수(天嶺郡太守)로 있으면서 해인사에 있던 희랑을 찾아가 시 6수를 지어 주었는데, 이 작품들은 문집 『고운집』에 실려 있으며 시 속에서 희랑을 부처와 보살에 비유해 극찬하는 내용으로도 알려져있다. 이후에도 희랑은 해인사에 머물며 후학을 양성하고 교화를 펼치다가 966년 입적한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