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洪仲丘(홍중구, Hóng Zhòngqiū)대만 육군 소속 병사로 계급은 상등병이었다.[1]병역 이행을 목적으로 군에 입대했다.[2] 2013년에 휴대폰을 영내에 무단반입한 규정 위반 안건으로 인해 군기교육대에서 교육을 받다가 전역을 단 이틀 앞두고 의문사하였다. 같은 징병제 국가인 대한민국에서는 동정심만 보였지만 중국, 일본,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는 위키백과에 문서가 서술될 정도로 크게 알려졌다. 사건에 관해서만 서술되었지만 유명 장교도 아니고 전쟁에서 공적을 이룬 것도 아닌 그저 남과 다를 바 없는 사병이 위키백과에 단독 문서가 존재하는 것도 모자라 빽빽하게 서술된 유일한 사례다. 대만 육군 제542기갑여단 소속이였고 의문사한 곳은 제269기계화보병여단이라고 영어 위키백과에 서술되어 있다.
2. 홍중추는 누구인가?
1989년 9월 8일 타이중에서 태어났고 가족으로는 부모와 누나가 있었다. 국립성공대학에서 운송학과 경영과학으로 석사학위를 딴 뒤 병역을 지고자 군대에 입대했다. 당시 대만군의 상병은 직업군인이었기 때문에 원래라면 입대 후 이등병이 되어 실무에서 복무를 하다가 일병으로 제대해야 했지만 그는 '대전정도의무예비역군사관고시(大專程度義務役預備軍士官考試)'라는 일종의 고학력자 특별임관 제도[3]를 통해 곧바로 상병으로 임관하여 분대장 직책을 받아 의무복무를 시작했다.3. 의문사
대만군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의무복무 기간에 상관 없이 2개월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마치면 이등병, 이등병에서 6개월 지나면 일등병, 일등병에서 1년이 지나면 상등병이 되는 병진급규정을 고수하고 있어 당시 대부분의 평범한 병역이행자들인 '의무역'들은 이등병으로 입대하여 일등병으로 제대하고 직업군인으로 입대하거나 전환한 '자원역'들은 의무역들과 함께 이등병, 일등병을 거친 다음 상등병이 되어 연장복무에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는 입대 과정 자체가 특별과정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의외로 군생활 자체는 평범하고 무난했다고 한다.[4]그러다가 말년에 규정에 어긋나는 카메라 폰을 무단으로 부대에 반입한 것이 들통나면서 간부회의에 불리려갔다. 당시 그의 중대장의 증언에 따르면 원래는 규정대로 엄격히 처리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가 의무복무를 이행하기 위해 입대하였다 한들 일반적인 징집병과는 다른 특수 신분의 상병이었기 때문에 더욱 엄격히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고 판단한 듯 싶다. 그럼에도 그가 병역을 이행 중인 친형제들에게 떳떳하고 싶어했고 훗날 공무원 시험을 치를 때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다며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간부회의에서는 잠깐 군기교육대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짓자는 결론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군기교육대에서 군기교육을 받으며 독방에 구금생활을 하던 그는 갑자기 탈수, 고열에 시달리는 등의 이상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군기교육 담당자들은 심한 갈증을 호소하는 그에게 독방 내에서 오직 물 한 컵만 허락하는 등 지극히 소극적인 조치를 취했고 결국 신체적 한계에 이른 그는 7월 4일 독방에서 향년 23세로 사망하고 말았다.
정작 군기교육대로 보내지기 전의 그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멀쩡했다. 그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군기교육대에서 군기교육을 빙자한 가혹행위가 벌어진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 충분했다. 결국 이 사건이 군대 밖으로 일파만파 퍼지며 군기교육대에서의 학대 행위 여부를 가려야한다는 여론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와 군기교육 담당 부사관들간의 관계가 껄끄러워 보였다는 동기의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대만 국방부는 해당 안건에 대해 그의 평소 행실에 문제가 있었다는 등 개인적 결함이 원인인 것 마냥 언론플레이를 시도하며 사건을 대충 수습하려고 했다. 대만 국방부의 행태는 대만 국민들이 의문사에 대한 의구심을 넘어 분노까지 이끌어냈고 결국 전국적인 항의와 추모 열기에 맞닥뜨리고 말았다.
대만 국민들이 추모를 위해 청천백일만지홍기를 거리에서 휘날리며 오프라인에서 그를 추모했고(사진) 촛불집회를 방불케 하는 집회까지 있었다.(사진)
심지어 인구 2천 3백만의 대만에서 무려 25만명이나 참여한 대규모 집회도 열렸다!영상
물론 이 사건은 대만에서 심각한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고 재선 이후 지지율 하락으로 고민하던 마잉주 총통과 국민당 정부를 더욱 당혹케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장례식에 마잉주 총통이 참석하고 그의 부모를 직접 만나 면전에서 정중하게 사과했을 정도였다. # 마잉주 총통이 적극 추진하여 2014년으로 예정된 대만군 모병제 전면 실시도 유보되었다.[5]
중국에서도 그의 사망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오히려 '대만군은 잔인한 군대다.', '중국국민당이 훙중추를 죽였다.'며 대만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등 반응이 갈렸다. 링크 (중국어)
1년 뒤 대한민국 국군에서도 말년이 아닌 병사가 아군에게 살해당한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6]과 전역을 앞둔 장병과 관련된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훙중추 사건과 차이점이 있다면 국방부의 온갖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추모 열기나 집회는 없었다는 것이다.[7] 그렇지만 여론이 매우 안 좋았다는 건 똑같다.
4. 사건 이후
누나 훙츠융(洪慈庸)은 동생의 사망을 두고 마잉주 총통의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는데 201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시대역량 소속으로 타이중시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당 내 갈등으로 탈당했고 2020년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훙츠융의 남편이자 훙중추의 매형인 줘관팅(卓冠廷)은 2022년 지방선거에서 민주진보당 소속으로 신베이시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었다.사건이 터진지 11년 뒤인 2024년 대한민국에서 제12보병사단 훈련병 사망 사건이 벌어지자 25만명이 집회에 참석한 이 사건이 인터넷 등지에서 회자되기도 했다.
[1] 훙중추 상병이 아니라 '훙중추 하사 의문사 사건' 등으로 설명된 문서도 있는데 사후에 1계급 추서되었기 때문이다. 대만군에는 병장 계급이 없기 때문에 상등병 다음 계급이 하사다.[2] 당시 대만의 의무복무 기간은 12개월이었다.[3] 한국식으로 비유하자면 대략 석사 단기 부사관 제도 같은 느낌이다.[4] 대만 국방부는 훙중추가 복무 초기에 체력 검정평가를 위조하여 휴가를 더 얻어내려고 한 전력이 있다며 훙중추가 부정복무를 시도한 정황을 강조했지만 교차검증 없이 국방부가 일방적으로 고한 것이라 국민적으로 신뢰를 받지 못했다. 백번 양보하더라도 군기교육대 내 '학대행위' 실존 여부와 그로 인한 사망 사실확인 여부가 더 중요하다. 결정적으로 애초에 군기교육대에 보내진 이유도 해당 문제와는 무관한 사유였다.[5] 대만의 모병제 전환은 정당에 관계 없이 군의 필요성 어필에 의해 진행되던 사안이었지만 훙중추의 사망으로 '지금도 이럴진대, 과연 국민의 관심과 감시를 덜 받게 될 대만군이 스스로 자정작용을 할 수 있겠느냐'는 반문에 맞닥뜨리게 되었다.[6] 대만에서 윤 일병 사망 사건을 한국판 훙중추(韓版洪仲丘) 사건으로 부른다.[7] 대한민국에서는 이 사건 이후에 항상 군 사건사고를 일어나면 집회가 없다는 것에 부끄럽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