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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황제 · 청 후궁 | }}}}}}}}} |
<colbgcolor=#fecd21><colcolor=#00386a> 청 건륭제의 원후 효현순황후 | 孝賢純皇后 | |||
출생 | 1712년 3월 28일 | ||
사망 | 1748년 4월 8일 (향년 36세) | ||
청 북경 자금성 서육궁 장춘궁 (現 베이징시 둥청구 징산첸제4호) | |||
능묘 | 유릉(裕陵) | ||
재위기간 | 청 적복진 | ||
1727년 9월 3일 ~ 1735년 10월 18일 | |||
청 황후 | |||
1735년 10월 18일 ~ 1748년 4월 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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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부친 부찰 이영보 | ||
배우자 | 고종 건륭제 | ||
자녀 | 황장녀, 황2자, 황3녀, 황7자 | ||
관저 | 장춘궁(長春宮) | ||
민족 | 만주족 양황기 | ||
봉작 | 적복진(嫡福晉) | ||
시호 | 효현성정돈목인혜휘공강순보천창성순황후 (孝賢誠正敦穆仁惠徽恭康順輔天昌聖純皇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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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 외 초상화 1 2
만주 양황기인, 찰합이 총관(차하르 총독) 이영보의 딸로 건륭제의 첫 황후이다. 살아생전 건륭제의 총애를 받은데다 수많은 백성들에게서 그녀의 행적이 큰 귀감이 되어 많은 존경을 받았으므로, 청나라 역사상 가장 사랑받은 황후였다고 할 수 있다.
2. 생애
고관집안 출신[1]으로 좋은 정통 교육을 받았고, 예법에 능통했으며, 문화도 잘 알았고, 우아하고 단아함을 갖춘 명문가 규수였다.16세에 나간 수녀선발에서 옹정제와 희귀비 뉴호록씨가 한눈에 부찰씨의 자질을 알아보고 홍력의 적복진으로 삼았다. 옹정 5년 7월 18일 자금성 서2소(건륭제 때 중화궁으로 바뀜)에서 성대한 혼례식을 올렸다. 옹정 7년 옹정제가 원명원에 있는 장춘선관을 부부에게 선물로 주었다. 옹정 13년(1735년) 황후로 봉한다는 조서가 내려졌다. 건륭제가 즉위한 후 효현순황후는 자금성에서는 장춘궁에서 머물렀으며 원명원에서는 장춘선관에 머물렀다.
성품이 너그럽고 미인이었으며 후궁들을 질투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대단히 검소하여 보석을 하지 않고 물총새의 깃털(점취장식)이 아닌 꽃으로 치장했고, 특히 밀짚과 비단으로 만든 조화를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그녀의 성격과 외모 덕에 건륭제는 아내를 매우 사랑했다.
그녀가 건륭제에게 직접 만들어 선물한 부싯돌 주머니 역시 값비싼 재료를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 아니라 소박하게 수놓아 만든 것이었다고. 참고로 이 주머니는 그녀가 건륭제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 되어 건륭제는 이 주머니를 각별히 아껴 특별히 보관했고 평생 간직한다. 이 주머니는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으며 현재는 대만고궁박물원에 보관되어 있다.
3. 죽음
2황자 영련이 죽은 후, 어렵게 임신하여 7황자 영종을 낳았다. 그러나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종이 천연두로 사망하여 효현순황후가 크게 상심하게 된다. 연이어 자식들이 사망하자 효현순황후는 신경쇠약에 걸리게 되었다. 궁궐 내 점술가들마저 "황후가 황궁 안에서 은둔한다면 앞으로 또 불길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에 건륭제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로하고 그녀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함께 떠나는 산동성 여행을 기획하고 동순을 떠났다.황후도 산동성을 여행하면서 몸이 좋아지기는 했으나 3월 8일 제남에서 감기에 걸렸는데 덕주에서 배를 탄 뒤로 상태가 악화되었다.[2] 결국 건륭 13년(1748) 3월 11일 자정에 푸차씨가 사망했다. 건륭제는 밤새 푸차씨의 영전을 떠나지 않았고, 이튿날에 국모가 죽었음을 어명으로 알렸다. 3월 25일 경산 관덕전으로 시신이 안치되었으며, 건륭이 친히 "효현(孝賢)"이라는 시호를 내렸다.[3]
사랑하는 아내가 죽자 건륭제는 크게 슬퍼하였고 나중에는 그야말로 이성을 잃어 지금 당장 황후 일행이 탔던 배를 통째로 자금성에 옮겨놓으라고 명령하는가 하면,[4] 그녀에게 조의를 제대로 표하지 않은 대신들을 강등하거나, 파면했다. 그중에는 참감후(사형 집행 유예)에 처해진 사람까지 있었다. 건륭제의 황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황장자 영황(永璜)과 황3자 영장(永璋)은 그녀에 대해 애석함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건륭제로부터 "최악의 범죄자" 라고 일갈을 들었고, 처벌을 받았으며 황태자 후보에서도 제외되었다.[5] 건륭제는 거의 1년 가까이 효현순황후의 장례 문제로 장정옥 등의 대신들과 내각 관리를 처벌했고 1주년 제사를 지낼 때쯤이 되어서야 진정한다.
그녀의 죽음을 기점으로 건륭제는 성격까지 바뀌어
건륭제는 죽을 때까지 효현순황후를 절절하게 그리워했고, 그녀의 무덤에 자주 찾아갔으며 그녀가 살았던 전각도 생전 그대로 보존하도록 하고 매년 제사를 지내게 했는데 건륭 60년에 황제가 퇴위하고서야 비로소 다른 비빈들이 전각을 쓸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사찰에서 효현순황후를 위한 제사를 지내면서 더러운 제물을 내놓은 사건이 생기자 담당자가 2계급 강등당하고 채찍형을 받았던 적이 있는데 그 담당자가 바로 건륭제의 총비인 영황귀비 위가씨의 아버지였다.
참고로, 건륭제가 그녀를 위해 쓴 시는 100편이 넘었다. 그중에는 '그대 없이 홀로 장수한들 아무 즐거움이 없을 것이라' 라고 말한 시도 있었는데, 그 시를 읊고 바로 이듬해 1월 건륭제 역시 세상을 떠났다.
4. 자녀들
- 황장녀: 이름불명, 1728년 10월 ~ 1729년 - 요절
효현순황후 소생의 첫 아이로 옹정 6년에 태어났다. 효현순황후가 건륭제에게 시집왔을 때는 이미 철민황귀비 부찰씨를 첩실[7]로 맞아들인 상황이었다. 그녀도 효현순황후와 비슷한 시기에 임신했는데, 철민황귀비는 황장자인 영황을 낳았고 효현순황후는 딸을 낳았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효현순황후가 낳은 딸은 사망했다.
- 황2자: 애신각라 영련(永璉), 1730년 6월 26일 ~ 1738년 - 요절
옹정 8년에 낳은 첫 적자이다. 옹정제가 기뻐하면서 탄생을 축하해주었고 직접 이름을 지어주었다. 련(璉)은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는 그릇이고 잇는다는 뜻을 담고 있어 계승자로 암시하는 것이었다. 건륭제는 즉위하고[8] 바로 태자밀건법에 따라 밀지에 써서 태자로 지목해두었지만 영련은 건륭 3년에 요절한다. 건륭제는 몹시 슬퍼하면서 직접 쓴 밀지를 꺼내 대신들에게 보여주고 "영련은 적자이고 총명하고 기개가 남달랐었다. 부황께서 이름을 지으시며 장차 종사를 계승할 뜻을 담으셨었다. 등극 후 밀지를 써서 건청궁 편액에 숨겨두었다." 고 말한다. 정식으로 책봉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황태자였으니 황태자의 예로 장례지내라고 명하고 단혜황태자(端慧皇太子)로 추봉했다.
- 황3녀: 고륜화경공주(固伦和敬公主), 1731년 6월 28일[9] ~ 1792년 8월 15일
옹정 9년에 태어났다. 건륭 12년 3월에 과이심친왕 보르지기트 색포등파이주이[10]와 혼인하였다. 당시 유일한 적녀였고 건륭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기 때문에 혼사에 대단히 신경을 써줬다. 혼수품도 기존의 적통공주보다 훨씬 많이 받아갔고, 최초로 몽골이 아닌 북경에서 남편을 데리고 살았다. 건륭제가 딸을 멀리 시집보내는 것도 꺼렸고 당시 청나라의 군사력이 굉장히 강대했기 때문에, 과이심 친왕과 혼인했더라도 북경에 거주할 수 있었던 것. 과이심 친왕 사이에 딸들과 아들 하나[11]를 두었다. 현대에도 화경공주가 살던 공주부가 남아있다고 한다.
- 황7자: 애신각라 영종(永琮), 1746년 5월 27일[12] ~ 1747년 1월 29일 - 요절
효현순황후 소생의 황1녀와 황2자 영련이 모두 요절하고 고륜화경공주만이 살아있던 상황에서 15년만에 임신한 아이였다.
효현순황후가 임신하자 건륭제는 중원절에 원명원으로 이동하는 것마저 걱정할 정도로 황후의 건강을 염려하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굉장히 중시했다. 건륭 11년, 건륭제는 자금성에서 각종 제사를 열었으며 친왕, 대신들을 불러 연회를 열었다. 몇 개월이 지나고 오랜 가뭄 끝에 초파일에 태어나 건륭제의 총애를 받았다. 이때 상서로움을 타고났다는듯이 가뭄을 해소하는 단비가 내렸다. 7황자의 이름은 "琮(종)"으로 종사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하지만 천연두로 요절하고 건륭제는 이례적으로 죽은 황자에게 도민(悼敏)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일반 황자와는 다르게 장례도 굉장히 성대하게 치러주었고, 단혜황태자의 능에 합장되었다.[13] 가경 4년, 가경제는 요절한 이복형을 철친왕(哲親王)에 추봉했다.
건륭제와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낳았는데 고륜화경공주를 제외하고 모두 요절했다. 적장자인 영련과 적차자인 영종은 모두 건륭제가 차기 황태자로 생각하였다. 그만큼 효현순황후가 대단히 총애받았다는 뜻.
5. 창작물에서
[1] 만주팔대가인 양람기 부찰씨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명문가였고 건륭연간에 만주팔대가 못지 않은 명문가가 되었다. 양백기 몽고 도통을 지낸 마사객(馬斯喀), 옹정제가 즉위 후 임명한 4명의 총리사무대신 중 하나였던 마제(馬齊)는 바로 그녀의 백부이다. 그녀의 동생 부항(傅恒)은 건륭제의 오른팔로서 후일 군기대신에까지 올랐다. 이 부항의 아내가 건륭제와 불륜 관계에 있었다는 야사가 있긴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야사일 뿐이다.[2] 뱃놀이를 하던 중에 물에 빠졌다거나 건륭이 바람나서 물에 빠졌다는 등의 이야기는 모두 야사이다.[3] 일반적으로 황후의 시호는 내각에서 몇 개를 짓고 황제가 그 중에서 정한다. 하지만 이 경우엔 황제가 직접 정한 것이다. <청사고>에선 혜현황귀비가 훙서했을 때 황후가 훗날 효현이라는 시호를 쓸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에 건륭제가 그 뜻을 따랐다고 한다.[4]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관리들과 기술자들이 고민 끝에 방법을 고안하여 결국 성공했다고 한다.[5] 과거 숭덕제 또한 유일하게 사랑하고 총애했던 후궁 민혜공화원비가 세상을 떠난 이후 비슷한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6] 사실 역사를 살펴보면 그나마 괜찮았던 성격이 조강지처를 잃고 폭군으로 변하는 사례가 왕왕 있긴 하다. 대표적인 것이 명 태조 주원장.[7] 옛 고대 사회에서는 남자가 정실을 맞이하기 전, 첩실을 정식으로 먼저 맞이해야했다.[8] 당시 건륭제의 나이가 26세였다.[9] 음력 1731년 5월 24일[10] 科爾沁毅親王 博爾濟吉特 色布騰巴爾珠爾[11] 보국공 악륵철특목이액이극파배(鄂勒哲特穆爾額爾克巴拜). 건륭제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다. 어머니인 화경공주가 죽은 다음해에 죽었다고 한다.[12] 4월 초8일로 부처님오신날이다[13] 건륭제의 요절한 자식들은 모두 단혜황태자와 합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