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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3 12:25:35

황석현(1886)

파일:황석현.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은필(殷弼) / 지추(之秋)
본관 장수 황씨[1]
출생 1886년 3월 1일
충청도 남포현 웅천면 화망리
(현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 화망마을)
사망 1945년 5월 9일[2]
충청남도 대전부 중촌정 대전형무소
(현 대전광역시 중구 중촌동)
묘소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구룡1리 화망마을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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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1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황석현은 1886년 3월 1일 충청도 남포현 웅천면 화망리(현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 화망마을)에서 아버지 황온(黃穩, 1860. 1. 2 ~ 1938. 4. 13)와 어머니 청주 양씨(淸州 楊氏, 1856. 6. 1 ~ 1936. 10. 24) 양한기(楊漢基)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딸만 둘 있던 7촌 재종숙(再從叔) 황진(黃稹, 1861 ~ ?. 12. 16)에 입양되었으며, 광산 김씨(1882. 9. 17 ~ 1965. 6. 12) 김광로(金光魯)의 딸과 혼인한 뒤 1924년 분가하여 충청남도 보령군(현 보령시) 주산면 화평2리 화산마을로 이주하면서 본적을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 남포청년회 평의원, 남포소작회(藍浦小作會) 상무위원, 보령군 화평리 진흥회(振興會) 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청년계몽활동, 소작관계개선 등 여러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1920년대 말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뜨게 되어 일본을 자주 오가다가 얼마 뒤 만주로 건너가 중화민국 길림성 주하현(珠河縣) 제4구 오길밀진(烏吉密鎭) 남구(南溝)[3]에 정착했다.

정착 후 그는 당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滿洲省委員會) 주하현 하동남향(河東南鄕)[4] 지부 책임자 한봉윤(韓鳳允)의 권유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만주성위원회 주하현 하동남향 지부에서 주로 문서 책임을 맡아 선전문 및 기밀 문서의 수발, 연락을 담당했다.

그러나 1934년 4월 말 하얼빈 주재 일본 영사관 경찰에 의해 동지 전동철(田東哲)과 함께 검거되었고,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3년간 재류금지처분을 받았으며, 그해 5월 14일 신의주경찰서에 이송되어 그곳에서의 취조를 받은 뒤 당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결국 같은 해 6월 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보령군 주산면 동오리로 이주하여 살면서 사회주의 운동 및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따금 만주를 오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4년 말 만주에서 재차 체포되어 국내로 이송되었고, 1945년 2월 14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소위 불경 및 조선임시보안령 위반 등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 판결에 대해 공소를 거쳐 고등법원 형사부에 상고까지 했지만, 결국 같은 해 4월 9일 상고가 기각되면서 원심 판결이 적용되어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옥고의 여독 및 영양실조 등으로 고통받다가 같은 해 5월 9일 오전 8시 20분 옥중에서 순국했다. 향년 60세. 사후 그의 유해는 유족의 동의 없이 일제에 의해 멋대로 화장되었고, 부인 광산 김씨에 의해 보령경찰서에서 수습되어 고향 마을의 조부 황효원(黃孝源, 1821 ~ ?. 3. 19)[5] 묘소 아래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9년 8월 15일 황석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기타


[1] 호안공파(胡安公派)-창평현령공계(昌平縣令公系)-군수공파(郡守公派) 20세 현(顯) 항렬. 족보명은 황용현(黃用顯).[2] 음력 3월 28일.[3]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상즈시(尙志市) 우지미향(烏吉密鄕) 난거우둔(南溝屯).[4]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상즈시(尙志市) 허둥조선족향(河東朝鮮族鄕).[5] 초명 황봉(黃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