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900년 1월 26일 |
경기도 남양군 수산면 사강리 (현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 |
사망 | 1974년 7월 7일 (향년 74세) |
경기도 화성군 | |
본관 | 남양 홍씨[1] |
가족 | 형 홍문선 |
직업 | 독립운동가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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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홍문선의 동생이다.2. 생애
홍명선은 1900년 1월 26일 경기도 남양군 수산면 사강동(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26일 송산면 사강리에서 홍면(洪冕)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여 면사무소에서 200여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사강 장날인 28일에도 홍면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였다. 이날 1,000여 명의 독립만세시위군중과 함께 인근의 산에 올라가 만세운동을 지휘했다.이때 일본인 순사부장 노구치 코오조오(野口廣三)가 제지하려 했지만, 군중은 더욱 기세를 올리며 홍면 등 수십명이 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장과 면서기에게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강요했다. 오후 3시경, 노구치 코오조오 순사부장이 홍면 등을 강제로 체포해 주재소로 연행하려 했다.
이에 군중이 반발하자, 노구치 순사부장은 권총으로 홍면을 쐈다. 홍면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군중은 격노해 노구치에게 달려들었다. 노구치가 자전거를 타고 주재소 방향으로 도주하자, 홍명선은 민용운, 안순원, 왕광연, 문상익, 김교창, 홍명선, 홍남후, 김명제(金命濟), 정군필 등 20여 명과 함께 노구치를 추격하여 노상에서 포위한 뒤 돌과 몽둥이로 구타해 살해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수원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4년 7월 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홍명선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토홍계 27세 선(善) 현(顯)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