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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22:08:57

홍남후

성명 홍남후(洪南厚)
본관 남양 홍씨[1]
생몰 1871년 4월 17일 ~ 1924년 10월 11일
출생지 경기도 남양도호부 수산면 삼존동
(현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삼존리)
사망지 경기도 수원군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홍면은 1871년 4월 17일 경기도 남양도호부 수산면 삼존동(현 화성시 송산면 삼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26일 오후 5시경 왕광연, 문상익, 홍명선, 김교창 등이 주동한 송산면에서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해 송산면사무소에 모인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내걸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3월 28일 오후에 송산면 뒷산에 모인 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대대적으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에 일본인 순사부장 노구치 코오조오(野口廣三)가 제지하려 했지만, 군중은 더욱 기세를 올리며 홍면 등 수십명이 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장과 면서기에게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강요했다.

오후 3시경, 노구치 코오조오 순사부장이 홍면 등을 강제로 체포해 주재소로 연행하려 했다. 이에 군중이 반발하자, 노구치 순사부장은 권총으로 홍면을 쐈다. 홍면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군중은 격노해 노구치에게 달려들었다. 노구치가 자전거를 타고 주재소 방향으로 도주하자, 홍남후는 민용운, 안순원, 왕광연, 문상익, 김교창, 홍명선, 홍명선, 김명제(金命濟), 정군필 등 20여 명과 함께 노구치를 추격하여 노상에서 포위한 뒤 돌과 몽둥이로 구타해 살해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20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소요, 살인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러다 1924년 10월 초 병고로 가출옥했으나 10월 1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홍남후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토홍계 24세 후(厚)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