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의 밤 당시 독일 바덴의 부엘 마을을 찍은 영상. 친위대원들과 돌격대원들이 보이며, 시나고그(유대교 회당)가 불타고 있다. 영상에는 안 나왔지만 유대인 상점들 또한 이미 공격받아 파괴된 상황이었다. 당시 이 마을에 살던 유대인들은 도합 70명 가량으로, 이들 중 대부분은 후에 바덴의 다른 유대인들과 같이 남프랑스에 설치된 귀르스(Gurs) 강제 수용소[1]로 이송되었다.[2] 그리고 1942년에 나치가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을 절멸시키기로 결정하자, 이들은 5500명에 달하는 귀르스 수용소의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모조리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로 보내져 학살되었다. 위 영상은 마을의 소방수에 의해 촬영되었고, 2000년대 와서 발견되어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으로 보내졌다.
열차로 독일령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비르케나우)에 도착한 유대인들. 한가운데 초점이 맞춰진 집단은 아동, 임산부, 노인, 즉 바로 가스실로 갈 집단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 유대인들도 보이는데, 얼마 안 가 자신들에게 참혹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씁쓸한 장면이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의 화장장[3] 시신을 불태워 처리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 존더코만도[4][5]가 은밀히 촬영하였다. 현재 절멸수용소의 살인 공정 운영 장면[6]이 촬영된 단 4개뿐인 사진 중 하나로써 그 가치가 매우 막대하다.
1941년 7월 말 라트비아의 리에파야 시에서 독일군이 벌인 유대인 집단 학살을 촬영한 영상. 영상 출처는 이스라엘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의 공식 유튜브 채널이다. 당시 리에파야 해변 사구에서는 약 5천에서 7천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친위대 특무대와 보안대 주도 하에 오르포(질서경찰), 국방군(그 중에서도 육군 및 해군) 및 라트비아인 부역자들이 구덩이 속에 유대인들을 한 줄로 세우고 총살한 후 흙으로 덮는 것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영상에서 확인 가능하듯 수많은 국방군, 친위대, 민병대원들과 심지어는 주민들이 이 사건을 목격하고도 막지 않았으며, 오히려 구경하며 학살을 방관하였다.
이 영상은 독일 해군 중사였던 라인하르트 비너(Reinhard Wiener)가 8mm 필름 코닥 카메라를 통해 촬영하였는데, 그가 현장에서 대놓고 기록을 남기는데도 불구하고 제재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보면 당시 반유대주의가 친위대, 국방군 가리지 않고 얼마나 일반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 알 수 있다. 비너는 전후인 1981년에 인터뷰를 통해 이 사건의 상세 정황을 설명하였는데, 그 인터뷰 영상 또한 야드 바셈 박물관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인터뷰 영상 1, 인터뷰 영상 2
전후 미 전쟁부에서 공식적으로 제작한 나치 독일 강제수용소 다큐멘터리. 이미 잘 알려진 부헨발트나 다하우의 모습뿐만이 아닌, 그 외의 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수용소들에서 벌어진 참상이 그대로 녹화되어 있다.
독일령 폴란드에 위치했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노동 및 절멸수용소 영상. 해방 직후 소련군이 촬영하였다. 한데 모인 희생자들의 물품들과 시체 구덩이를 볼 수 있다. 사망자 수는 약 100 ~ 150만 명으로, 단일 시설에서 학살된 희생자 수로는 세계 최고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생존률은 절멸수용소 치고 매우 높은 20%에 달했는데, 그 이유는 아우슈비츠가 절멸 뿐만 아니라 노동수용소 역할도 같이해 노동자 수용 시설 또한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살을 위한 최소한의 시설만 가지고 운영되었던 여타 절멸수용소들은 대부분 99.9% 이상의 사망률을 보였다. 또한 그 거대한 크기 덕에 여타 절멸수용소들과는 달리 나치의 증거 인멸 시도에도 불구하고 다 파괴되지 않고 상당수가 남아 지금까지 끔찍했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연합군 장병들에 의해 촬영된 영상들을 바탕으로 미 육군 통신대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콜디츠의 버려진 기차에 수용된 사람들과 오르드루프(Ohrdruf) 수용소를 시찰하는 아이젠하워 원수 및 연합군 조사단의 모습, 다하우 수용소 및 부헨발트 수용소의 참상 등이 담겼다.
현재의 독일튀링겐 주 바이마르에 위치한 부헨발트 수용소 및 니더작센 주의 베르겐-벨젠 수용소 영상. 부헨발트는 노동 수용소로, 약 5만 6천명이 학살되었으며 사망률은 약 25% 였다. 베르겐 벨젠은 피해자들을 절멸 및 노동수용소로 운송하는 도중에 잠시 모아 놓던 집결수용소로, 12만명이 거쳐갔으며 그중 약 5만 명이 사망하였다. 사망률은 약 44%였다. 베르겐 벨젠은 시설이 특히 불결하여 절멸수용소가 아님에도 매우 높은 사망률을 보였는데, 다름아닌 안네 프랑크가 이곳에서 티푸스로 사망했다. 위 영상은 해방 직후 영국군과 미군이 촬영하였다. 강제 노동과 영양실조, 병으로 죽어간 수많은 희생자들의 말라 비틀어진 시체 무더기 및 화장장의 타다 남은 시신 등이 보인다. 홀로코스트의 끔찍함을 다룬 영상 매체 중 가장 대표적인 영상으로 자주 인용된다.
베르겐-벨젠 수용소 조사 영상. 연합군 조사단이 지역 주민들과 간수들을 징발해 수용소 내에 방치되었던 수천 구의 희생자 시신들을 수습하여 일단 가매장하고, 수감자 및 간수들을 조사 및 인터뷰하는 내용이 담겼다. 해방 직후 영국군이 촬영하였다.
독일령 폴란드에 위치했던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구조 및 학살 과정 설명 영상. 트레블링카는 라인하르트 작전 절멸수용소로, 제소자 수용 없이 수용소 도착 즉시 학살했다. 이곳에서 약 75만~90만명이 학살되었으며, 사망률은 자그마치 99.993%에 달했다. 생존자는 트레블링카 봉기를 일으켜 탈출했던 67명의 존더코만도들뿐이었다. 이렇게 끔찍하게 많은 숫자를 학살했음에도 운영된 기간은 고작 13개월이었다. 1943년에 증거 인멸을 위해 시설 전체가 완벽히 파괴되어 남아있는 기록은 사진 몇 장 뿐으로, 그것도 학살 현장을 담은 사진은 하나도 없다. 같은 이유로, 아우슈비츠나 마이다네크와는 달리 해방 이후를 찍은 영상조차 없다. 이는 다른 절멸수용소들인 베우제츠, 소비보르, 헤움노 및 강제 노동 수용소였던 말리-트로츠테네츠 등도 마찬가지다.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 영상. 이곳은 독일령 폴란드의 루블린 시에 위치했던 포로수용소 겸 절멸수용소로, 아우슈비츠와 함께 그나마 형태를 보존한 절멸수용소이기도 하다. 희생자 약 9만 ~ 15만. 이 영상은 전후에 공산 폴란드에서 기록영상들을 바탕으로 제작하였다.
독일바이에른에 위치한 다하우 강제수용소 영상 1. 해방 직후 미군에서 촬영하였다. 다하우는 나치 독일 최초의 강제수용소로, 노동수용소에 해당한다. 19만명이 거쳐갔으며 그 중 3만 2천명이 사망하여 사망률은 약 16%였다. 다하우의 해방 직후, 그 참상에 분노한 미군의 일부 병사들에 의해 항복한 SS병사 약 50명이 역으로 학살되었다. 학살에 참여한 병사들은 형식적인 재판 후에 풀려났고, 아무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다하우 강제수용소 영상 2. 해방 직후 미군에 의해 촬영되었다. 컬러 복원 영상을 바탕으로 제작됨.
독일바이에른에 위치했던 플로센베르크 수용소 영상. 노동수용소로, 희생자 약 3만이다. 사망률은 약 30%. 위 영상은 해방 직후 미군이 촬영한 영상을 재구성하였다.
야세노바츠 강제 노동 수용소 및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홀로코스트 참여 관련 다큐멘터리. 기록영상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였다. 야세노바츠는 강제 노동 수용소로, 독일의 괴뢰였던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우스타샤가 운영했다. 독일의 수용소들 못지않게 잔혹하게 운영되었는데, 가스 밴을 통한 살해 방법 외에도 수많은 살해 방법이 동원되었다. 산 채로 불에 태워버리거나 수확용 단도로 목을 그어대기도 했으며, 기중기를 통해 교수형시키고 그 시체를 사바 강에 던져버리는 방법의 학살 또한 자행되었다. 때문에 이곳은 발칸의 아우슈비츠로 불리며 악명을 떨쳤다. 총 희생자는 약 10만에서 70만 사이로, 희생자 중 유대인(약 5만)보다 세르비아인과 보스니아인의 비중이 매우 높았던 것(50만)이 특징이다. 희생자 수에 대해 운영주체였던 크로아티아와 피해자인 유대인 및 여타 남슬라브인들간의 주장 차이가 극심하다.[7] 이 문제는 결국 해결되지 않고 유고슬라비아의 내부 갈등 요소로 남아 전후 50년 뒤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벌어지는 한 원인이 된다.
유대인인 솔로몬 파이거손(Solomon Feigerson)이 리예파야 학살 당시를 증언한 인터뷰 영상. 그에 따르면 그가 11살이었던 1941년, 리예파야의 유대인들은 독일군의 진주 이래로 가택 연금 상태였다가 라트비아인 부역자들의 손에 이끌려 수용소로 보내졌고, 이들은 매질을 받으며 운동장에 집결된 후 차례로 집단 처형을 받을 예정이었다. 여기서 유대인들의 운명은 둘로 나뉘었는데, 슈트롤(Schtroll) 대령이란 국방군 장교가 수용소를 찾아와 코르크 공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을 뽑아갈 때 따라간 사람들은 살았으나, 그렇지 않은 이들은 위 비너가 촬영한 영상에서처럼 독일군의 손에 모조리 학살되었다. 파이거손과 그의 형제 및 어머니는 코르크 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이 없었음에도 슈트롤 대령을 따라갔지만, 다행히도 슈트롤 대령이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지만) 자신을 따라온 유대인들 중 코르크 공장 노동자가 아닌 이들을 다시 선별해서 학살 현장에 돌려보내지 않고 모두가 그의 코르크 공장에서 일하게 해 주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8] 반면 같은 아파트에 살던 파이거손의 친척들은 수용소에 남았고, 다음날 모두 살해되었다.
1941년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직후 르비우 근처의 츨로키프(Zolochiv)에서 벌어진 유대인 색출. 영상 속에서 주민들과 친위대원, 국방군 병사들이 웃으면서 구경하는 가운데 이웃들이었던 우크라이나계 민병대원들에게 일방적으로 폭행당하는 유대인 남성은 영상이 촬영된 다음 날 나치당 친위특무대에 의해 총살되었다. 위 영상이 찍힌 당시 르비우 일대에서는 친위대, 우크라이나인, 국방군이 5일간 약 3000명의 유대인을 살해하였다. 굵직한 학살은 주로 독일군 남부집단군 사령부의 묵인 하에 국방군 병사들과 친위대원들이 수행했지만 위와 같이 우크라이나인들이 협력한 경우도 많았는데, 폴란드인에 대한 민족감정과 나치 독일의 프로파간다가 결합한 결과였다. 당시 독일은 소련 정부의 탄압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이 주로 희생되었으며, 폴란드계 유대인들이 이에 부역했다며 우크라이나인들을 선동하였다. 그 결과 분노한 일부 우크라이나인들이 자체적으로 또는 독일군에 협력하여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것이다.[9] 그리고 소련과 독일 이전에 우크라이나 서부를 지배했던 폴란드에 대해서도 민족 감정이 폭발하여, 폴란드인들 또한 스테판 반데라가 이끄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무더기로 살해당했다. 이 사태는 불과 두 달 후 우크라이나에서 반데라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못마땅해한 독일이 우크라이나인들 또한 마구 박해하기 시작하면서 훨씬 더 복잡한 양상으로 치닫는다.[10] 당시 서부 우크라이나의 끔찍한 실상은 폴란드 영화증오(원제: 볼히니아)에서 아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전후에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크라쿠프 게토 생존자들의 '기억의 행진.' 한때 최대 7만 명에 달했던 크라쿠프의 유대인들은 전쟁 기간 동안 추방당하거나 베우제츠와 아우슈비츠 등지에서 살해되어, 1000명 정도만이 살아남았다. 위 영상은 2019년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독일 공영방송 타게스샤우가 촬영하였다.
[1] 원래 프랑스 정부가 스페인 내전에서 패배하여 국외탈출한 스페인 공화파 인사들을 억류하기 위해 세운 수용소다. 1940년 본격적으로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독일 등의 적대국 외국인들을 수용하였다. 나치의 점령 이후에는 비시 프랑스의 관할이 되어 유대인, 동성애자 등 나치가 적으로 지정한 이들을 가두는 강제 수용소가 되었다.[2] 참고로 이 이동은 2차 대전 당시 중서유럽에서의 유대인 이송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루어진 거의 유일한 경우다. 보통 유대인들은 서쪽에서 동쪽, 또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송되어 부헨발트와 같은 독일 영내의 노동 수용소들, 또는 거의 무정부 상태여서 증거 인멸이 쉬웠던 폴란드에 세워진 절멸수용소들로 보내졌기 때문이다.[3] 솔직히 말하면 화장장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유는 그냥 땅을 파서 시신들을 넣은 다음 한꺼번에 소각하는 것이기 때문. 그냥 간부들이 대충 화장장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화장장이라고 불리는 것이다.[4] Sonderkommando. 직역하면 특수직무반(Special commamdo)이라는 뜻이다. 수감자들 중 선발되어 수용소 내의 각종 더러운 일들을 도맡아 처리했다. '쓸모있을 듯한 놈'으로 보여서 선발된 것이니 곧바로 가스실로 보내지지 않는다는 이점은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그들 또한 수감자였던 만큼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도 간수들의 채찍질과 같은 엄청난 학대를 견뎌야만 했다. 그러다 결국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면 그날로 처분되었다.[5] 촬영자의 신원은 그리스계 유대인이라는 정보만 있었는데, 그리스 육군 장교 출신으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체포된 알베르토스 에레라(Αλβέρτος Ερρέρα)로 추정되고 있다.[6] 존재 자체가 철저히 부정되었던 '절멸수용소(Todeslager, Vernichtungslager)'들로 한정한다. 이외 노동수용소나 친위특무대 및 국방군의 집단 학살 행위는 그들 스스로 또는 목격자들이 남긴 수많은 사진자료가 남아있다.[7] 이 때문에 야세노바츠를 절멸수용소로 볼 것인지에 관하여 의견이 갈린다. 일단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절멸수용소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6곳이고 야세노바츠는 포함되지 않는다.[8] 다만 파이거손의 어머니와 동생은 1942년의 학살은 피하지 못했다. 파이거손 본인은 도망쳤지만 곧 잡혀 카이저발트(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 리투아니아 소재.) 강제수용소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리나 골드블라트(Lina Goldblatt)란 여자와 그녀의 딸과 함께 지냈다. 1944년 8월 슈트트호프 수용소로 이감되었다가 1945년 4월 500명의 수감자들과 함께 발트 해로 나가는 배에 태워졌는데, 이는 발트 해에 이들을 수장시키기 위한 나치 독일의 계획이었다. 배는 표류하다 노이슈타트로 진입했고 이때 독일인들의 총격으로 죽을 뻔했으나 때마침 도착한 영국군에 구조되었다. 전후에 그는 라트비아로 돌아가 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이스라엘로 이주하였다.[9] 독일군 진주 전 소련 NKVD의 집단처형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이 학살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유대인들이 이에 부역했다는 것은 거짓.[10] 구 소련 지역에 독일 민족의 생활권(Lebensraum. 레벤스라움)을 건설하고 '열등한' 슬라브인들을 제거하고자 했던 독일에게 우크라이나인은 협력자가 아닌 절멸되어야 할 잠재적인 방해요소였기 때문이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인정받은 것은 레벤스라움의 권역에서 멀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크라이나는 독일군과 소련군, 반데라주의자들이 삼파전을 벌이는 와중에 유대인을 포함한 소련 민간인들이 무의미하게 희생되는 지옥으로 변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