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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07 18:19:03

호조 우지쓰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0px-Ujituna_Hojo.jpg

北条氏綱 (ほうじょう うじつな) 북조씨강[1]
(1487 ~ 1541.08.18)
장수로부터 사무라이에 이르기까지, 의(義)를 중요하게 여기라. 의를 지키지 않으면 설령 한두 지방을 빼앗았다 한들 후세에 치욕을 남기게 될 것이다. 천운이 다하여 멸망하게 된다 할지언정, 의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후세에 손가락질을 당할 치욕은 없을 것이다. (중략)... 옛 이야기를 들어봐도 의를 지킨 멸망과 의를 버린 영화는 천지 차이이다. (중략)... 무도한 행동을 하여 이익을 얻은 자는 천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2]
사무라이들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형편에 어려운 점이 있도록 해서는 안 되니, 세상에 버려도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기량, 골격, 변설, 재능이 모두 도통하여 훌륭한 사무라이로 보이나 생각 외로 무용이 부족한 자도 있고, 또 모든 일에 서투르며 사람들이 모두 멍청이라고 하는 자인데 무도에 있어서는 막강한 용맹을 뽐내는 자도 반드시 있다. 불완전해 보이는 자도 쓰기에 따라서는 귀중한 인재가 되는 일이 잦으니, 버릴 자는 실로 한명도 없다. 그 자의 뛰어난 점을 찾아내어 쓰고 뛰어나지 못한 점을 쓰지 않아 어떤 자도 유용하게 부리는 이를 두고 뛰어난 대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 호조 소운의 아들.

원래 성씨는 이세씨였고 아버지 호조 소운은 스스로를 호조씨라 한 적이 없었으나, 우지쓰나 대부터 스스로를 호조씨라 칭하면서 아버지를 호조 소운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가마쿠라 막부호조씨와는 친척이라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먼 관계인데도 호조씨를 자칭한 특이케이스.[3]

아버지 호조 소운(이세 쇼즈이) 때부터 이미 관동관령인 우에스기씨에게 타지역 출신의 반역자로 취급을 당하고 있었는데, 관동의 지배를 확고히 하고 명분을 만들기 위해 호조 우지쓰나가 임의대로 옛 관동출신 명문가인 호조씨를 자임했다는 것이 기존의 다수설이었지만, 최근에는 애초에 호조 소운은 막부 관료 출신이여서 막부의 명을 받고 관동으로 왔으며 이마가와씨 아래에서 활동하였기에,[4] 반역자라 볼 수 없으며, 호조 우지쓰나의 모계도 중앙의 호조씨 혈통이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중앙으로부터 호조씨 인가를 정식으로 받았을 가능성이 또 다른 유력설로서 제기되고 있다.

어쨌든 전국시대의 호조씨는 이 호조 우지쓰나로부터 출발했으며 가마쿠라 막부의 호조씨와 구별하기 위해 후호조씨라 불리기도 한다.

2. 생애

1518년 아버지가 은거하면서 당주가 된다. 거성을 이즈 나라야마성에서 사가미 오다와라 성으로 옮겼으며 성씨도 이세에서 호조로 바꿨다. 1524년 오기가야쓰 우에스기가의 당주 우에스기 도모오키(上杉朝興)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의 당주 우에스기 노리후사(上杉憲房)을 방문하기 위해 가와고에성에 간 틈을 타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신인 오타 스케타카(太田資高)를 배반케 만들어 에도 성을 빼앗았다.

또한 스루가의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의 아래에서[5] 다케다 노부토라와 싸우기 시작했다. 먼저 이와쓰키 오타씨를 공격해 이와쓰키성을 함락시켰으나 도모오키의 구원요청을 받은 가이 슈고인 다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에게 이와츠키성을 빼앗겼다.

1530년 오자와가하라에서 우에스기 도모오키군에 대승을 거두었으며 도모오키가 죽고 그의 아들 도모사다(上杉朝定)가 뒤를 잇자 침공을 개시해 가와고에성을 빼앗았다. 고가쿠보 아시카가 하루우지(足利晴氏)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간토간레이직을 원했다는 추측이 있다.

이마가와씨의 내분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편을 들어 그를 당주로 옹립했다. 그러나 1537년,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다케다가와 동맹을 맺고 세 가문의 접경지역인 후지카와 지역을 점령하려 하자, 이에 반발하여 카토우의 난을 일으켜 이마가와씨를 공격, 1545년까지 이마가와씨를 상대로 오랫동안 전쟁을 벌여야 했다.

1538년 오유미 구보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明)와 사토미 요시타카(里見義堯)의 연합군을 상대로 제1차 고노다이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둔다. 이때 요시아키가 전사해 오유미 구보는 멸망한다. 이후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상대로도 승리를 거듭, 우지쓰나는 세력을 무사시, 시모우사까지 확장시켰다. 1541년 병으로 사망, 향년 55세. 아들 호조 우지야스가 뒤를 이었다.

3. 대중매체

파일:北条氏綱1.jpg 파일:北条氏綱.pn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파일:우지츠나야망.png
노부나가의 야망 대지
신장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못지않은 엄청난 능력치를 자랑하지만[6] 존재감은 심하게 없다. 아예 검색해도 이미지조차 겨우 20장 정도다. 띄엄띄엄 출전하다[7] 13 천도에 이르러서는 클리어 특전무장으로 출전한다. 이후 PK 신장의 탄생 시나리오에서는 정식무장이 등록되어, 호조가 다이묘로 등장. 참고로 천도에서 정치력이 110으로 1위다. 2위는 107인 아들 우지야스, 3위는 103인 아버지 소운이다.

노부나가의 야망 13에서는 92/72/84/110의 스탯이다. 병과적성은 아시가루가 A외에는 거의 B, C로 도배되었다. 특기는 철벽지비. 별개지만 오리지널에서 특전무장으로 등록이 되어서 PK에서는 군웅집결에 오다와라 성에서 탐색를 해야 얻을수가 있다.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에서는 총합 361로 아들보단 낮지만 충분히 괴물이다. 이전 시리즈들과 달리 정치가 아닌 통솔이 가장 높다.

센고쿠(만화)에선 센고쿠 곤베에에 등장. 아버지 호죠 소운이 은거하자 당주가 되었으며 호죠씨를 칭한다. 이후 호죠가를 발전시키고 아들인 호죠 우지야스에게 당주직을 넘기고 은거한다.
[1] 아들의 한자음과 같다.[2]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의 손자인 호조 우지마사는 영토를 넓히는 것에 집착해 사나다 가문과의 누마타 분쟁에서도 히데요시가 후호조씨에 유리한 판결의 중재를 내렸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영토를 모조리 빼앗으려 했고 결국 분노한 히데요시에 의해 정벌당해 가문이 몰락했다.[3] 둘이 공통조상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무려 헤이안 시대로 거슬러올라가야 나온다.[4] 물론 이즈 지역을 점령한 것은 독자행동이라는 설도 있다.[5] 기존에는 동맹을 맺었다는 설이 대세였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때까지도 이마가와 씨의 가신에 가까웠다는 것이 정설이다. 단, 세력 면에서는 이마가와 씨와 이미 맞먹는 수준이었다.[6] 호조 소운, 호조 우지쓰나, 호조 우지야스는 천도 무장능력치 총합 20위 안에 모두 들어간다.[7] 혁신에서는 호조 우지야스의 '아버지' 데이터를 채워주기 위한 용도로 무장 데이터는 있으나 얼굴 CG도 없고 등장시킬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