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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7 18:30:10

호접지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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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오랑캐 호[1] 나비 접 갈 지 꿈 몽

1. 개요2. 출처3. 서양철학에서의 유사한 논의4. 미디어 믹스에서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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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자』 내편 중 두 번째 장 '제물론(齊物論)'에서 나오는 고사성어. 한자 그대로의 뜻은 '나비의 꿈'.

2. 출처

昔者莊周夢為蝴蝶,栩栩然蝴蝶也,自喻適志與!不知周也。
俄然覺,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為蝴蝶與,蝴蝶之夢為周與?周與蝴蝶,則必有分矣。此之謂物化。
예전에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나비가 진실로 기뻐 제 뜻에 맞았더라! (그래서 자신이) 장자임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갑작스레 깨고 보니, 곧 놀랍게도 장자였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가? 장자와 나비 사이에는, 틀림없이 구분이 있는 것인데.
이를 일컬어 '물物이 되었다'고 한다.
흔히 인생의 덧없음을 뜻하는 말로 일장춘몽이나 남가일몽과 비슷하게 사용하지만, 출처에 나오는 이야기의 뜻 자체가 상당히 모호하여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고사성어이다.

이야기의 내용에 충실하자면, 장자(장주)는 나비의 꿈을 꾸었을 때 덧없거나 허망하다는 감정보다는 놀랍고도 신기하다는 감정을 갖게 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꿈을 꾼 것을 넘어서서 마치 스스로가 '나비가 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자연 사물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아 세상에 대한 시야를 넓혀라는 이야기로 읽혀지기도 한다. 이런 해석에서는 내가 언제든지 자연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고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인간에게 요구된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눈에 보이기에 장자와 나비 사이에는 구분이 있다. 그러나 만물의 변화(物化)의 원리, 즉 자연의 커다란 도(道) 속에서 그것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느 한 관점을 갖고 고착될 나(我)는 존재하지 않으며, 만물에는 구분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의 나비 꿈'은 역으로 '나비의 장자 꿈'과 차이가 없다. 더 나아가 내가 원래 장자라는 사람인지 나비인지는 중요하지도 않다.[2] 도는 그저 끊임없이 역동하는 탓에, 그런 인위적인 구분은 오로지 인간의 관점일 따름이다. 제물론의 다른 부분들을 봐도 장자는 역동하는 도를 인간의 지(知)로 정의내릴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3. 서양철학에서의 유사한 논의

다만, 이 사유가 특별히 동양적인 것인가? 혹은 동양이 선점한 주제인가? 라고 묻는다면, 사실 별로 그렇지도 않은 것이 서양에서도 이와 같은 생각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계속 되어온 것이다. 신화적 사유에서 자주 보이는 형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생각은 근대에도 보인다.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확신도 이른바 '꿈의 가설'을 통과한 이후에 나오는 진리다.

물론 근대 이후에 이러한 사유는 점점 서양철학사에서 사라지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현대로 들어가면서 다시 프리드리히 니체가 관점주의적 태도를 취하면서 장자와 유사한 생각들을 펼쳐나간다. 그리고 니체의 영향을 받은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서는 이런 사유들이 오히려 철학계 내에서 흔히 보여지는 보편적인 생각들이 되어 버렸다. 질 들뢰즈가 '동물 되기'라는 철학적 사유를 진행한 것이 대표적인 예.

동양에서도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불교가 바로 이 분야 관련연구의 정점을 찍는 사상이기 때문에, 상당히 오랫동안 고찰되어 온 주제인 걸 알 수 있다.[3] 초기 경전과 불교 설화들을 살펴보면 인간이 되었다가 동물이 되었다가 자유자재로 변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장자사상은 현재까지도 불교사상과 매우 많이 얽히며, 관련 비교학 지식과 학계연구가 상당량 축적되어 있다.

애당초 이 사상은 공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쉽게 고민에 빠질 만한 주제이기 때문에 반대로 관련 논의가 없었던 곳을 찾기가 더 힘들 지경이다. 우리가 체험하는 현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논하는 주제는 동서를 막론하고 인류의 보편적인 사고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두고 서양과 동양으로 구분해서 한쪽을 우월, 혹은 열등한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장자의 생각에도 맞지 않거니와 매우 잘못된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서로가 자각한 현실이 사실은 꿈속에서 자각한 자아였을지 당사자는 구분하거나 알 수 없다는 이러한 철학과 사고실험의 발상은, 코즈믹 호러장르의 가공의 신화에 등장하는 아자토스의 개념이나, 개인의 꿈에서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생각의 주체가 바뀌긴 했지만 시뮬레이션 우주 가설과도 어느정도 맥락이 일치한다.

4. 미디어 믹스에서

5. 여담


[1] 호접(胡蝶)은 호랑나비라는 뜻으로, 오랑캐와는 관련이 없다. 한편 밑에 원문에서 보이듯이 '蝴'를 쓰기도 한다.[2] 더 정확히 말하면 원래 내가 장자인지 나비인지라는 고정된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3] 불교는 네팔과 인도 지역에서 출발한 사상인만큼 서양과 동양의 이분잣대로 구분짓기가 모호한 부분이 있지만 그 전파경로가 분명 동방으로 치우쳐 있기에 보통 동양사상으로 분류되는 것이 현실이다.[4] 가사: 하늘아 하늘아 서러워마라 하늘아 하늘아 눈물진다 하늘아 하늘아 실같은 인연 눈물은 거둬라 / 바람에 꽃잎이 지고 달빛에 새벽이 온다 어느 생에 어느 하늘에 이 맘을 둘까 외로이 홀로 머물다 흘러 흩어질 한숨아 / 꿈이어라 허망한 꿈이어라 울어본들 무엇 하나 비에 젖어 한 세상 떠다니다 잊은 듯 살아갈까 / 하늘아 하늘아 서러워마라 하늘아 하늘아 눈물진다 하늘아 하늘아 실같은 인연 눈물은 거둬라 / 떨어진 꽃잎 바람에 날면 뒤를 따라갈까 어느 하늘 아래서 내가 쉴까 어디로 난 가야하나 온 몸으로 막아도 흩어지는 바람에 날 재운다 / 꿈이어라 허망한 꿈이어라 울어본들 무엇 하나 부서질줄 알면서 날아가는 하늘에 날 띄운다 /하늘아 하늘아 서러워마라 하늘아 하늘아 눈물진다 하늘아 하늘아 실같은 인연 눈물은 거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