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앙반투
Hoàng Văn Thụ
1909년 11월 4일 ~ 1944년 4월 25일
1. 개요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 호찌민의 베트남 귀국을 직접 도왔던 인물로 베트남에서 유명하다.2. 상세
호앙반투는 1909년 11월 4일 중국-베트남 국경지대인 랑선[1]에서 태어났다. 베트남의 소수민족인 따이족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14세에 초등학교만 마치고 읍내로 나왔으며, 베트남어와 한자를 모두 배운 베트남 민족 시인으로도 알려졌다. 1911년 생인 베트남의 명장 보 응우옌 잡 장군과 비슷한 연배다. 그는 랑선읍에서 독립운동 활동가가 된 친구들을 만나 1926년부터 애국적인 청년단체를 결성하였고, 중국 광시성에 가서 공산당 정치훈련을 받고 귀국했다. 하지만 프랑스 식민지 당국의 엄중한 감시 속에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면서 살았었다고 한다.1930년 지인의 소개로 정비공장에서 기계공으로 취직해 일하다가 베트남 공산당(인도차이나 공산당)의 랑썬 담당으로 지명되어 자신의 생계인 공장일을 그만두고 공산당 조직 활동에 전념했다. 1934년 말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 전국대회에 참석했으며[2], 1935년에는 당의 결정에 따라 중국과의 국경지대인 북부 고산지대에서 발행되는 '전투' 잡지의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박손 봉기를 주동했다.
1938년 중반, 베트남 공산당 초대 총서기 레홍퐁이 소집한 당 회의에서 통킹 당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39년에는 북부 당위원회 서기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당국의 감시 때문에 종종 변장하고 다녔다고. 1939년부터 1943년까지 하노이 시당위원회를 재건하고 1940년 11월 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0년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하고 프랑스 당국이 이에 협력함에 따라, 프랑스 당국은 베트남 공산당원 수천 명을 체포했는데, 호앙반투 또한 여러 지방으로 피신해 다녔다. 그 과정에서 베트남 구국군 창설에 가담해 랑선 지역의 구국군을 지휘했다.
당시 윈난성을 비롯한 중국 남부에 있던 호치민은 해외생활 30년 만에 베트남에 귀국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1941년 초 호앙반투는 까오방성 공산당의 책임을 맡으면서 호치민의 귀국과 은신을 도왔다. 호치민은 중국 윈난성에서 광시성을 거쳐 까오방성에 있는 팍보(Pác Bó) 동굴에 은신하여 베트남 독립 동맹 즉 베트민을 창설했다.[3] 호앙반투는 1941년 5월 베트민 창설을 도왔고, 베트민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베트민에 가담한 호앙반투는 하노이에 비밀기관을 설립하고 은신하여 적극적으로 프랑스군을 상대로 선전전을 벌였다. 즉 독립운동 전사들을 모병하는 데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1943년 8월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어, 호아로 형무소[4] 수감됐다. 그 과정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거의 매일 20회 이상의 악랄한 고문을 받았다.
감옥에서 수감자들에게 혁명이론을 가르치던 그는 1944년 1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고, 1944년 4월 25일 새벽 6시에 35세의 나이로 프랑스 당국에 의해 처형됐다. 이후 응우옌 반 쪼이가 그랬듯이 처형 집행 감독관이 '눈가리개가 필요하냐?'고 물었지만 아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죽기 전 그가 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나처럼 나라를 도둑질당한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삶과 죽음을 위한 투쟁에서 나 같은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승리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죽기 전 프랑스 신부가 세례가 필요한지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감사합니다. 저는 죄책감이 없습니다. 애국심을 갖고 나라를 구하는 것이 유죄라면, 지금 당신 나라에서 나치와 싸우고 있는 프랑스인들 모두 유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3. 그 외
그가 태어난 랑선에서는 탄생일에 행사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9년 11월 4일에는 호앙반투의 탄생 110주년 행사와 추모공연이 성대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4. 참고문헌
유일상,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하나로애드컴, 2021
[1] 참고로 1979년 중국-베트남 전쟁 당시 중국군이 여길 점령했던 적이 있다.[2] 베트남 공산당은 1930년에 창당되었으나, 이후 코민테른의 붉은 별로 알려진 찬 푸(Tran Phu)가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포괄한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당명을 개명할 것을 요구함에 따라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당의 명칭이 바꼈다.[3] PBS 베트남 전쟁 시리즈에 따르면 당시 호치민은 팍 보 근처에 있는 산봉우리를 마르크스 산봉우리라 불렀고, 근처 시냇물을 레닌 시냇물이라고 불렀다 한다.[4] 베트남 전쟁 당시 존 매케인이 수감된 곳이기도 하다. 사실 이 감옥은 프랑스 당국이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쉽게 말해 서대문 형무소와 같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