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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5 22:55:19

응우옌반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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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Nguyen_Van_Troi_Photo.jpg
응우옌 반 쪼이
Nguyễn Văn Trỗi
1940년 2월 1일 ~ 1964년 10월 15일
1. 개요2. 상세3. 기타4. 참고 문헌

1. 개요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 현 베트남에서 받는 대우가 현 한국에서 받는 안중근이나 윤봉길 정도 된다.

2. 상세

1940년 2월 1일 꽝남(Quang Nam)성 디엔 반(Điện Ban)현에서 태어났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베트남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지만, 제네바 협약에 따라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베트남이 분단된 이후 수많은 북베트남 사람들이 월남하는 사태가 발생했다.[1] 그때 응우옌반쪼이도 부모를 따라 사이공으로 이주했고, 그는 전구제조 공장에서 전기공으로 근무했다.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부정부패와 가족정치 그리고 불교도 탄압으로 인하여 민심을 제대로 못잡았고, 1960년 남베트남에서는 자생적으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이른바 베트콩이 창설되어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서 싸우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월남한 응우옌반쪼이는 전구제조 공장에서 전기공으로 근무하다가 무장 혁명운동에 가담했다.

1964년 초 남부 롱안(Long An)성 게릴라 기지에서 정치 학습과 게릴라 전술을 배웠다. 결혼한 지 1주일도 안 된 응우옌반쪼이는 1964년 5월 로버트 맥나마라 미국방부장관이 베트남을 방문하자 떤선녓 국제공항에서 사이공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는 '꽁리(Cong Ly)' 다리에 폭발물을 설치했다가 그만 들켜버려 체포되었다. 남베트남 경찰에게 체포된 응우옌반쪼이는 체포된 후 6개월이라는 기간동안 남베트남 경찰의 온갖 잔인한 고문과 구타 그리고 회유를 받았으나, 죽음을 각오하고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다. 군사재판에서 그는 공개 총살형을 선고 받았고, 1964년 10월 15일 결국 처형되었다.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총살형이 집행되기 이전 응우옌반쪼이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여러분들은 저널리스트로서 당연히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있는 것은, 그리고 비행기와 폭탄으로 우리나라의 인민을 대량으로 살육하고 있는 것은 미국입니다. 그리고 우리 조국을 정복하는데 필요한 모든 계획을 세웠던 자는 바로 저 로버트 맥나마라입니다. 내가 반대했던 것은 바로 미국입니다. 이 땅에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죄를 범한 맥나마라를 나는 처단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 마지막 소원이 있다. 내 조국의 하늘을 보고 싶다. 눈가리개를 벗겨 달라...."
"내 이 말을 꼭 기억해 달라.
타도 미제국주의!
베트남 만세!
호찌민 만세!"
출처: 왜 호찌민인가? p33~34

3. 기타

영웅 응우옌반쪼이는 조국과 인민을 위해 미제국주의에 맞서 항거하여 최후의 숨을 거둘 때까지 용감하게 투쟁했다. 영웅 응우옌반쪼이의 의연한 기개는 조국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 특히 베트남의 젊은 세대가 본받아야 할 빛나는 혁명의 모범이다.
응우옌반쪼이에 대한 호찌민의 평가
위의 인용문 처럼, 응우옌반쪼이는 베트남에서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로 존경받고 있다. 통일한 베트남 정부는 그의 혁명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그가 맥나마라를 죽이고자 거사를 단행했던 꽁리 거리를 응우옌반쪼이거리로 명명했다. 1980년대 운동권들 사이에서 그의 전기가 읽혔다고 한다.

응우옌반쪼이의 존재는 당시 사회주의 형제 국가로 인식되던 북한에도 영향을 줬다. 실제로 북한에서는 응우옌반쪼이의 이름을 언급하며, 생산력을 증대하고 미국에 맞서기 위해 남베트남의 베트콩 투쟁을 돕자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베트남에서 만든 응우옌반쪼이 영화도 있다.#

반면 쪼이가 암살 타겟으로 삼았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1990년대 자신의 회고록에서 쪼이에 대해 베트콩이라고만 언급했다.
관련 회담은 미군 본부에서 개최되었는데, 첫 회담에서는 수도 사이공 시내 파스퇴르 거리에 있는 식민지 시절 개조된 호텔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도시에서 서쪽외곽에 자리 잡은 탄손누트 공군 기지에서 개최됐다. 회담이 열린 장소들은 베트콩들에게 잘 알려진 곳들이었으며, 그런 만큼 베트콩들은 자주 회의를 무산시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1964년 5월에 베트콩들이 내가 사이공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도로 다리 밑에 폭발물을 설치하여 나를 암살하려 한 적이 있었다. 남베트남 경찰은 이들이 설치한 폭발물을 발견했고 내가 탑승한 차가 다리를 통과하기 전에 해체시켰다.
Robert McNamara, In Retrospect: The Tragedy and Lessons of Vietnam, Vintage, 1996, p.43~44.

1972년 북베트남을 방문했던 미국의 여배우 제인 폰다는 이후 자신이 나은 아이의 이름을 트로이 가리티(Troy Garity)라고 지었는데, 놀랍게도 트로이라는 이름은 응우옌반쪼이의 '쪼이(Trỗi)'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4. 참고 문헌


[1] 1950년대 북베트남에서 실행했던 토지개혁과 공산정권의 박해를 피해 월남했던 주민이 80만 명 정도고, 그 중 가톨릭 교도가 60만명이었다. 이들은 응오딘지엠의 핵심 지지계층이 된다. 반대로 지엠 정권 아래 점차 조여오던 전직 베트민 참전 용사들에 대한 박해, 백색 테러 때문에 월북한 남베트남인들도 10~15만 가량이 있었는데, 이들 또한 60년대 들어 반사이공, 반미 무장 투쟁이 본격화 되면서 대거 재월남하여 베트콩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