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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5-10 20:53:26

헨리 보퍼트(제3대 서머셋 공작)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3대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
Henry Beaufort, 3rd Duke of Somerset
성명 헨리 보퍼트
Henry Beaufort
출생 1436년 1월 26일
잉글랜드 왕국 서머셋
사망 1464년 5월 15일 (향년 28세)
잉글랜드 왕국 헥섬
배우자 조앤 힐(정부)
자녀 찰스(사생아)
아버지 제2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
어머니 엘리노어 뷰챔프
형제 에드먼드, , 엘리노어, 조앤, 앤, 마거릿, 엘리자베스, 메리
직위 서머셋 공작, 도싯 후작, 서머셋 백작

1. 개요2. 생애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3대 서머셋 공작. 장미 전쟁 시기 랭커스터 왕조의 지지자로서 요크파와 대결했지만 헥섬 전투에서 패배하고 생포된 뒤 곧바로 처형당했다.

2. 생애

1436년 1월 26일 제2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와 제13대 워릭 백작 리처드 뷰챔프의 딸인 엘레노어 뷰챔프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헨리 7세의 어머니인 마거릿 보퍼트의 사촌이자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조카였으며, 제2대 버킹엄 공작 헨리 스태퍼드의 삼촌이었다. 1455년 아버지와 함께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 참전했다가 중상을 입은 채 가까스로 탈출했고, 아버지는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를 따르는 병사들에게 사살되었다. 그 후 서머셋 공작, 도싯 후작, 서머셋 백작 등 여러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헨리는 아버지와 심각하게 갈등한 끝에 주살한 요크 공작 리처드에게 강한 적의를 품었고, 자신처럼 요크 공작을 적대하는 인사들을 끌어모아 랭커스터파를 결성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여러 대귀족이 내전을 피하기 위해 중재에 나섰고, 국왕 헨리 6세 역시 내전을 피하기 위해 양자를 설득했다. 1456년 10월 코번트리 의회에 출석한 그는 여러 인사들에게 요크 공작과 화해하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퉁명스럽게 답했고,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과 말다툼을 벌였다. 여기에 그의 부하들도 요크파 장병들과 마찰을 벌였다.

1457년,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가 헨리와 스콭르랜드 국왕 제임스 2세의 누이인 조앤 사이의 결혼을 제안했지만. 스코틀랜드 측이 오직 잉글랜드 왕족만이 조앤의 배필이 될 수 있다며 거절하면서 무산되었다. 그 해 10월 14일, 헨리는 와이트 섬의 부관이자 카리스브룩 성의 감시관이 되었다. 1458년 초 다시 한 번 런던 의회에 출석해 왕실로부터 요크파 인사들과 화해할 것을 종용받았고, 요크 공작 리처드가 그의 아버지를 죽인 것에 대한 보상으로 과부가 된 서머셋 공작부인과 그녀의 자녀들에게 연간 5,000 마크 상당의 연금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1458년 3월 24일, 그는 국왕, 왕비 및 주요 귀족과 서로 팔짱을 낀 채 런던 거리를 행진하는, 일명 '화해의 행진'을 수행했다.

그러나 마르그리트 왕비와 요크 공작 간의 분쟁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양자 간의 화해는 오래가지 않았다. 1458년 10월, 마르그리트 왕비는 헨리를 요크 공작의 심복인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 대신 칼레의 지휘관으로 선임하라고 제안했다. 그 후 1459년 랭커스터파와 요크파 간의 전쟁이 발발했고, 헨리는 10월 9일 마르그리트 왕비의 주장을 받아들인 헨리 6세에 의해 칼레 지휘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영국 해협을 건너 칼레에 접근했지만 워릭 백작의 삼촌인 포콘버그 남작 윌리엄 네빌이 지휘하는 칼레 수비대에게 입성을 거부당했고, 칼레 외곽 요새인 기엔 성을 접수했다. 이후 칼레를 2차례 공격해봤지만 모두 격퇴되었다.

1460년 1월 6일, 워릭 백작의 지시를 받은 존 다인햄 경이 샌드위치에 정박해 있던 왕의 함대를 급습해 막대한 군수품과 대포 및 함선들을 탈취했다.(샌드위치 해전(1460년)) 이리하여 영국 해협의 패권이 요크파 해군에게 넘어갔고, 헨리는 본국으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결국 4월 23일 칼레 인근의 뇌레이 다리 전투에서 워릭 백작에게 패배했고, 잔여 병력을 수습해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가 없는 동안 요크군은 노샘프턴 전투에서 랭커스터파를 격파하고 헨리 6세를 생포했다. 하지만 그는 잉글랜드 북부로 이동해1460년 12월 폰트프랙트에서 랭커스터군에 가담했고, 12월 21일 워크솝에서 요크군 선봉대를 격파해 일부를 생포했다.

1460년 12월 30일, 헨리는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여러 귀족과 함께 웨이크필드에 고립된 요크군을 압도하고 요크 공작, 솔즈베리 백작, 요크 공작의 차남인 러틀랜드 백작 에드먼드 등을 주살했다. 그 후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와 함께 남하하여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워릭 백작이 이끄는 요크군을 또 다시 격파했다. 그러나 진군 과정에서 스코틀랜드인들과 함께 수많은 마을을 초토화하는 랭커스터군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을 품은 런던 시민들이 성문을 개방하길 거부한 데다, 요크 공작의 장남인 더비 백작 에드워드모티머스 크로스 전투에서 오언 튜더와 재스퍼 튜가 이끄는 웨일스의 랭커스터군을 격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헨리는 마르그리트 왕비와 논의한 끝에 런던으로 가는 대신 잉글랜드 북부로 이동하기로 했다.

1461년 3월 29일, 헨리는 에드워드 4세를 중심으로 뭉친 요크군을 상대로 토우턴 전투를 치렀다. 그 결과 랭커스터군은 궤멸되었고, 헨리는 가까스로 전장을 탈출하여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다. 1462년 7월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에게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샤를 7세는 그가 도착하기 전에 죽었지만, 뒤이어 프랑스 왕위에 오른 루이 11세는 그를 투르에서 접견한 뒤 1462년 3월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한 후 돌려보냈다. 그러나 루이 11세는 약속과는 달리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1461년 11월 4일, 런던 의회는 헨리의 영지를 몰수하고,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와 다른 요크 인사들에게 하사하기로 결의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헨리는 마르그리트가 프랑스로 간 사이 스코틀랜드에 남아있는 랭커스터군을 이끌었고, 1462년 가을에는 뱀버러 성을 지켰다. 하지만 스코틀랜드가 큰 도움을 주지 않자, 그는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12월 24일 뱀버러 성주 랄프 퍼시와 함께 에드워드 4세에게 성을 넘기고 귀순했다. 에드워드 4세는 랭커스터 파의 거물이었던 그의 귀순에 크게 기뻐해 런던으로 데려오게 한 뒤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다. 헨리는 1463년 3월 10일 사면받았고, 4월 29일에 열린 의회의 결정에 따라 작위와 명예를 회복했다.

그러나 헨리는 얼마 후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체포되어 북웨일스의 홀트 성에 감금되었다가 1464년 초 그곳을 탈출한 뒤 스코틀랜드에 있던 마르그리트 왕비와 합세헀다. 그 후 스코틀랜드와 요크 왕조간의 평화 협상이 이뤄지는 걸 막기 위해 스코틀랜드 사절단을 맞이하려는 몬터규 후작 존 네빌을 습격하려 했다. 정찰병이나 내부 고발자의 경고를 받은 몬터규 후작은 매복 공격을 회피하고 북쪽으로 계속 이동해 뉴캐슬로 향했다. 이후 북쪽으로 계속 진군해 알른윅으로 이동한 후, 울러를 향해 북서쪽으로 진군했다. 이윽고 4월 25일 노섬벌렌드의 울러에서 남동쪽으로 7마일 떨어진 글랜턴 마을 북쪽의 헤즐리 무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은 패전을 면치 못했다.

그는 알른윅으로 퇴각해 그곳에서 병력을 재편성한 뒤 타인 강 계곡으로 진군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왕국의 평화 협상을 훼방 놓으려 했다. 이 소식을 접한 몬터규 후작은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타인 강 남쪽 기슭을 따라 북진했다. 1464년 5월 14일, 양군은 헥섬 외곽에서 격돌했다. 그 결과 랭커스터군은 또다시 패배했고, 헨리는 몇몇 추종자들과 함께 도주하려 했다가 낙마한 뒤 중상을 입은 채 어느 오두막에 숨어들었다가 발각되어 헥삼으로 끌려간 뒤 그곳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몬터규 후작은 전투 다음날인 5월 15일 감옥에 갇혀 있던 헨리를 끌어낸 후 처형했다. 그의 유해는 헥섬 수도원에 안장되었으며, 이후 소집된 의회는 그를 복권한 조치를 전면 무요화하고 영지를 몰수했다.

그는 생전에 정부인 조앤 힐과의 사이에서 사생아로 찰스 서머셋을 두었다. 찰스 서머셋은 1492년 제3대 허버트 여남작 엘리자베스 허버트와 결혼한 뒤 아내의 권리에 따라 허버트 남작 칭호를 받았고, 1514년 헨리 8세에 의해 우스터 백작으로 선임되었으며, 궁내장관으로 선임되어 궁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찰스의 후손은 1682년 보퍼트 공작위를 받았고, 현 보퍼트 공작인 제12대 공작 헨리 서머싯(1952 ~ ) 또한 찰스의 후손이다. 그가 적자녀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랭커스터 파벌은 그의 형제인 에드먼드 보퍼트를 제4대 서머셋 공작으로 떠받들었다. 1485년, 헨리 7세는 잉글랜드 국왕에 등극한 뒤 런던에서 개최한 첫번째 의회에서 그가 헨리 6세에게 충성스럽게 봉사한 점을 인정하여 요크 왕조가 그에게 부과한 모든 몰수 조치를 취소하고 명예를 회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