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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15:18:15

한예건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한예건
韓禮建[1]으로 잘못 기재되었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화여(和汝)
본관 청주 한씨[2]
출생 1878년 9월 20일
평안도 강서현[3]
(現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
사망 미상
사망지 미상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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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한심석서울대학교 총장은 5촌 당질(堂姪)이다.[4]

2. 생애

1878년 9월 20일 평안도 강서현(現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에서 아버지 한용설(韓用卨, 1843. 11. 1 ~ 1917. 2. 11)과 어머니 파평 윤씨(? ~ 1903. 12. 14)[5] 사이에서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강서군 수산면 가현리 3-3번지로 이주했다.

1916년 12월 23일부터 용강군 봉산면 묘산리 묘산동 미 감리교회당에 봉직했고, 1918년 7월 15일 강서면 덕흥리 661번지로 이주했다. 1918년 7월 20일 김홍식(金弘植)으로부터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서하리 미 감리교회당, 강서면 암저리 미 감리교회당, 쌍룡면 다족리 포동 미 감리교당, 수산면 가현리 미 감리교회당의 담임 목사직을 인계받았다.

1919년 3월 3일 오전 10시 강서군 강서면 장터에서 기독교회측 최승택(崔昇澤) 등과 천도교회측 교구장 이진식(李鎭植)의 주도하에 일어난 독립만세시위에 4,0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참여했다. 이후 만세시위는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부대를 지원받아 대기 중이던 강서면 읍내 헌병분견소 소속 헌병대의 실탄사격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고, 한예건은 이진식·박상현(朴尙鉉) 등 2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한예건이 시무하던 예배당은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에 파괴되었고, 성경은 훼손되었으며, 시위에 참여한 학교의 유리창과 교구 또한 훼손되었다.

이후 8개월간 미결감에 구류되었다가, 평양지방법원의 1심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했으나 1919년 7월 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다. 이에 상고했으나, 1919년 8월 30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이른바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1920년 8월 28일 만기출옥했으나, 옥중에서 얻은 병으로 출옥 직후 평양부 기홀병원(紀笏病院)에서 입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이후 황해도 서흥군 도면 두무리로 이주했고, 1921년 5월 31일 송득애(宋得碍)로부터 중화군 배화면 추당동 미 감리교회 추당동교회의 담임 목사직을 인계받았다. 1921년 7월 5일에는 윤봉진(尹鳳鎭)으로부터 황해도 서흥군 도면 두무리 미 감리교회 하두동교회, 도면 능리 능리교회, 도면 송화리 송동교회, 도면 국대리 대동교회, 도면 도동 도동교회, 소사면 송전리 송전동교회, 소사면 방곡리 난곡동교회, 세평면 간평리 매뢰동교회, 율리면 오동리 하오동교회, 구포면 운천리 운천리교회 등의 담임 목사직을 인계받았다. 1921년 10월 25일 곽정숭(郭貞崧)으로부터 용강군 용월면 계명동 미 감리교회 계명동교회당, 강서군 풍정면 연남리 교회당, 증산면 두만리 교회당, 신흥면 귀련리 교회당, 신흥면 발산외동 교회당, 함종면 송동리 교회당, 함종면 명선동 교회당, 신흥면 하청리 교회당 등의 담임 목사직을 인계받았다.

1921년 11월 7일 강서군 함종면 함종리 294번지로 이주했고, 1922년 1월 26일 담임 목사로 봉직하던 황해도 서흥군 일대 10개 교회당의 담임 목사직을 곽정숭에게 인계했다. 1923년 7월 17일 강서군 풍정면 연하리 미 감리교회 연남리 미 감리교회당, 증산면 두만리 미 감리교회당, 신흥면 구련리 미 감리교회당, 신흥면 하청리 미 감리교회당 등의 담임 목사직을 안영극(安英極)에게 인계했다. 1925년 9월 3일 함종면 송동리 미 감리교회, 함종면 함종리 명선동 감리교회 등의 담임 목사직을 김진탁(金振鐸)에게 인계했다.

1926년 4월 19일 진남포부 비석리 206번지로 이주했고, 1929년 4월 25일 이겸로(李謙魯)로부터 용강군 양곡면 천교리 미 감리교회의 담임 목사직을 인계받았으며, 자신이 시무하던 용강군 용월면 계명동 미 감리교회는 민응식(閔應植)에게 인계했다. 1931년 1월 30일 용강군 금곡면 석포리 607번지로 이주했고, 같은 날 김홍식으로부터 용강군 금곡면 하리교회, 귀림면 노하리교회, 귀림면 금사리교회 등의 담임 목사직을 인계받았고, 자신이 시무하던 진남포부 비석리교회당은 최종묵(崔宗默)에게 인계했다.

1932년 1월 24일 용강군 해운면 온정리로 이주했고, 1934년 6월 28일 강서군 신정면 구련리로 이주했다. 이후 재단법인 기독교조선감리회 유지재단의 이사에 취임했다가 1937년 6월 29일 퇴임했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201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1920년 9월 5일 동아일보 기사, 1922년 7월 3일 조선총독부 관보 제2966호에는 韓[2] 등제공파(登第公派) 28세 건(建) 항렬.[3] 1895년 이전 강서현 동부방 3개 리, 서부방 향교동+2개 리, → 1896년 평안북도 강서군 군내면 동도리·서도리·서하리·동하리, 서부면 향교리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 1949년 강서군 강서면 덕흥일리·덕흥이리·덕흥삼리·덕흥사리 → 1956년 강서군 강서읍 덕흥리 → 1978년 대안시 덕흥리 → 1979년 남포시 대안시 덕흥리 → 1983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 → 1984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4] 한예건의 큰아버지 한용국(韓用國, 1834. 4. 28 ~ 1870. 6. 20)의 장남 한제건(韓濟建, 1853. 7. 20 ~ 1916. 10. 9)의 막내 아들이 바로 한심석이다.[5] 윤양선(尹養銑)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