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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10 08:39:50

한니발 기스코


한니발 기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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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nibal Gisco[1] | Ἀννίβας Γέσκων
<colbgcolor=#eee8aa><colcolor=#000> 출생 미상
미상
사망 기원전 258년
카르타고
국적 카르타고
지위 카르타고 시칠리아 사령관
참전 전쟁 제1차 포에니 전쟁
-아그리젠툼 전투
-리파리 해전
-밀레 해전
-술키 해전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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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맞서 싸운 고대 카르타고 장군.

2. 행적

기원전 262년, 당해 집정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퀸투스 마밀리우스 비툴루스가 이끄는 40,000명 가량의 로마군이 시칠리아 내 카르타고 세력의 핵심 거점인 아그리젠툼으로 진격해 그 해 6월에 도착했다. 당시 아그리젠툼 수비대 사령관을 맡고 있던 그는 로마군의 포위를 예상하고 아그리젠툼 주변의 많은 주민을 성내로 들여보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당시 아그리젠툼의 인구는 50,000명으로 늘어났지만 수비대 자체의 규모는 적었다고 한다.

두 집정관은 성벽 1마일 앞에 숙영지를 세운 뒤 일부 병력만 숙영지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를 아그리젠툼 주변 밭에 널린 곡식을 수확하게 했다. 이는 실로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그들은 지난날 카르타고군이 메사나 전투에서 완패하고 로마의 동부 시칠리아 지배를 허용하는 등 야전에서 로마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으니 감히 성벽 밖으로 나올 엄두를 내지 못할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적이 경계를 소홀히 하고 경작물을 챙기느라 바쁜 틈을 타 기습했다.

한창 수확하느라 비무장 상태였던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의 급습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카르타고군은 여세를 몰아 적 숙영지를 급습했지만, 소규모 수비대가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바람에 많은 손실을 입었다. 한니발 기스코는 병력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손실을 크게 보면 좋지 않다고 여기고 성내로 철수했다. 그 후 두 집정관은 적이 예상보다 강하다는 것을 깨닫고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파견한 병사들이 무장을 확실히 갖추고 경계를 늦추지 않게 했으며, 숙영지에 더 많은 병력을 배치했다. 한니발 기스코는 적의 방비가 예전보다 강해진 걸 눈치채고 두 번 다시 습격전을 감행하지 않았다.

이 시기의 로마군은 아그리젠툼 같은 대도시를 무력으로 공략한 적이 없었기에 공성 기술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시를 봉쇄해 보급을 끊어버려서 적이 굶주림에 지쳐 항복하게 만들려 했다. 로마군은 도시를 도랑으로 둘러싸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여러 요새를 세웠다. 아그리젠툼은 바다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고원에 위치했고 항구가 없었기에, 로마군이 갖추지 못한 해군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5개월간 포위전이 이어진 끝에 식량이 바닥나자, 한니발 기스코는 본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카르타고 당국은 한노에게 대규모 병력을 맡겨 아그리젠툼을 구하게 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한노가 이끌고 온 군대에는 50마리의 코끼리, 누미디아 기병, 리구리아, 갈리아, 히스파니아 용병대가 있었다고 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보병 50,000명, 기병 6,000명, 코끼리 60마리였다고 한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보병 30,000명, 기병 1,500명, 코끼리 30마리였다고 한다. 한노는 먼저 아그리젠툼에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헤라클레아 미노아에 진출한 뒤 로마의 공급 기지인 헤르베소스를 점령하고 로마군 보급물자들을 모조리 탈취했다. 이로 인해 로마군 장병들이 굶주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전염병이 창궐했다.

한노는 적이 조속히 전투를 벌이고 싶어할 거라 예상하고 누미디아 기병에게 적 진영에 접근해 도발하라고 지시했다. 로마 기병이 진영 밖으로 뛰쳐나오자, 누미디아 기병들은 일부러 그들 앞에서 퇴각했다. 로마 기병들이 그들을 뛰쫓다가 카르타고 진영 가까이에 이르자, 누미디아 기병들이 돌아서서 로마 기병들을 공격했고 다른 카르타고군도 가세했다. 로마 기병들은 이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입고 숙영지로 패주했다. 이 승리에 고무된 한노는 아그리젠툼의 로마 진영에서 1.5마일 떨어진 토로스 언덕에 새 숙영지를 세우고 로마군을 압박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아가 창궐하고 탈영병이 속출하자, 두 집정관은 이대로 가다간 끝장이라고 여기고 평원에 전투 대형을 갖추고 적에게 회전을 벌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한노는 이대로 끌고 가면 로마군이 알아서 무너질 거라 여겼기에 거부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두 군대는 2달 동안 서로 가까이 있었고 투창을 몇 차례 교환한 것 외에는 별다른 교전을 벌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한니발 기스코는 성내의 식량 부족이 심각해져 수비대를 유지하기 힘들어지자 속히 구원해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봉화를 올렸다. 한노는 이걸 보고 그제야 회전을 벌이기로 했고, 로마군 역시 기꺼이 응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아그리젠툼 전투에서, 한노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에 패퇴했다. 한니발 기스코는 아군이 패배하자 전투 다음날 밤 용병들과 함께 도랑을 짚으로 채워 넣은 뒤 아그리젠툼에서 도주했다.[2] 다음날 아침 적이 빠져나온 것을 알게 된 로마군은 한니발 기스코를 추격했지만 뒤쳐진 적병 몇 명을 사살하거나 붙잡았을 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아그리젠툼으로 돌아와 이렇다할 저항 없이 도시를 점령했다. 로마군은 오래도록 공성전을 치르느라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린 것에 울분을 품고 있었기에 심각한 약탈을 자행하고 주민 25,000명을 노예로 팔았다.

기원전 260년, 로마 정부는 아그리젠툼 전투의 승리에 고무되어 시칠리아 전역을 공략하기로 결의하고, 카르타고 해군이 해안 도시들에 해상 보급하는 것을 막을 함대를 신설하기로 결의했다. 때마침 이탈리아 해안가에 카르타고 퀸퀘레메(quinquereme: 5개의 노를 갖춘 갤리선)가 난파되었는데, 로마인들은 이를 모델로 삼고 전함 120척을 건설한 뒤 당해 집정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나를 함대 지휘관으로 세웠다. 함대는 시칠리아로 향하기 전에 타렌툼 항구에서 그리스계 선원들의 지도하에 해상 훈련을 실시했다.

그 후 메사나 해협으로 출진한 스키피오는 리파리 제도 수비대가 로마 편으로 귀순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리파리 제도는 시칠리아 북동쪽의 작은 섬들로, 이탈리아 본토와 매우 인접했기 때문에 그곳에 주둔한 카르타고군은 로마 공화국의 안보를 항시 위협할 수 있었다. 선원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했고 새로 건조된 선박들은 물이 새거나 지나치게 무거워서 제 속도를 내지 못하는 등 여러 문제점을 노출했지만, 그는 전투 없이 리파리 제도를 접수할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여기고 전함 17척을 차출해 그곳으로 향했다.

한편, 리파리에서 약 약 100km 떨어진 파노르무스(현재 팔레르모)에 주둔한 함대를 이끌던 한니발 기스코는 즉시 대응하기로 마음먹고, 부관 보도에게 20척의 전선을 맡겨 리파리로 파견했다. 그들은 밤에 도착한 뒤 항구를 봉쇄한 후 다음날 아침 적 함대를 향해 불화살을 퍼부을 준비를 했다. 해상 경험이 전혀 없어서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잔뜩 품고 있던 로마인들은 이 상황에 크게 놀랐다. 일부는 공포에 질려 내륙으로 도망쳤고, 스키피오는 나머지 병사들, 많은 로마 고위 관리들과 함께 생포되었다.

시칠리아 육군 사령관을 맡고 있던 가이우스 두일리우스는 스키피오가 허무하게 사로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해군 지휘권을 맡았다. 그는 바다에서 전투를 한 경험이 없고 바다에서 장기간 배를 이끈 경험도 없는 로마인들이 오랜 바다 생활에 단련된 카르타고인들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보고, 코르부스를 제작하게 했다. 코르부스가 적 선반의 갑판으로 떨어져서 쇠못을 박으면, 병사들이 이를 통해 적선으로 건너가서 닥치는 대로 도륙하는 작전이었다. 그러다가 카르타고 해군이 시칠리아 도시 밀레 인근을 약탈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즉시 함대를 이끌고 그 쪽으로 진격했다.

한니발 기스코는 적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것을 갑판 위에 단 채 천천히 접근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나머지 전투 진형 편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로마군을 향해 항해했다. 그 바람에 카르타고 함대는 일부만 전투에 참여했고 나머지는 뒤쳐졌다. 로마군은 그 사이에 코르부스를 활용해 적선을 옴짝달싹 못하게 한 뒤 배 위로 뛰어들어가 살육했다. 카르카고 해군은 50척의 선박을 잃고 도주했다.

밀레 해전에서 뼈아픈 패배를 당한 한니발 기스코는 기원전 258년 사르데냐 섬을 침공한 로마군 함대를 격퇴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가 이끄는 카르타고 함대는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파테르쿨루스가 지휘하는 로마 해군을 상대로 맞붙었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한 채 쌍방간에 손실을 입히고 철수했다. 이후 카르타고군이 술키 항구에 정박한 사이, 로마군은 안개가 짙게 깔린 틈을 타 안개 속으로 진격해 적 함대를 기습했다. 이로 인해 카르타고 해군은 40척의 함대를 속절없이 상실하고 본국으로 패주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한니발 기스코는 본국으로 돌아간 뒤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그가 전하는 또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한니발 기스코는 함대를 잃고 사르데냐 섬으로 도주했다가 그의 무능을 성토한 장병들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1] 페니키아어로 한니발은 '바알의 은총'을, 기스코는 '사쿤 신의 하인'을 의미한다.[2]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한노는 사전에 한니발 기스코에게 자신이 로마군과 전투를 벌일 때 후방에서 로마군을 치도록 했다. 하지만 이것을 간파한 로마군은 매복병을 사전에 배치했다가 한노가 쳐들어왔을 때 전방과 후방에서 요격해 대파한 뒤 한니발 기스코 역시 격파했다고 한다. 그러나 교차검증이 되지 않기에 신빙성이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