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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9:54:12

허펑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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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하풍림.jpg
중화민국 대원수부 군사부장
상하이 호군사
정체 何豊林
간체 何丰林
한국식 독음 하풍림
영문 He Fenglin
무여(茂如)
출생 1873년 청나라 산동성 펑음현
사망 1935년?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천진무비학당
직업 군인, 정치가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5. 관련문서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안휘군벌에 속했었으나 강절전쟁으로 몰락한 이후 봉천군벌에 의탁했다. 북양정부의 마지막 국방장관이었다.

2. 생애

1873년 산동성 평음현에서 태어났다. 천진무비학당을 졸업했으며 위안스카이가 신건육군군 건설에 나서자 신군에서 교련관을 지냈다. 1912년 중화민국 건국 이후 육군 4사단 예하 여단장을 역임했고 1916년 호국전쟁 이후 위안스카이가 사망하자 돤치루이 산하의 안휘군벌에 가담했다. 1917년 절강녕릉진수사, 1920년 송호호군사에 임명되었는데 1920년 안직전쟁에서 안휘군벌이 직예군벌에게 몰락한 이후 복건독군 리허우지, 절강독군 루융샹과 더불어 안휘군벌의 몇 안남은 잔여세력이 되었다. 1922년 11월, 뤄원간 사건이 발생하자 차오쿤을 지지하였다.

1924년 9월 강소독군 치셰위안이 루융샹이 지배하는 상하이-절강성을 점령하기 위해 강절전쟁을 일으키자 송호연군 1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치셰위안의 침공에 맞섰으나 복건독군 쑨촨팡이 가세하면서 끝내 패하고 루융샹과 함께 일본 제국이 지배하는 다롄으로 망명했다. 이어 봉천군벌의 수령 장쭤린이 루융샹과의 동맹관계를 이유로 남하, 2차 직봉전쟁이 일어났다. 10월에 우페이푸의 논공행상에 불만이 많았던 펑위샹북경정변을 일으켜 대총통 차오쿤을 축출하자 10월 29일, 루융샹과 함께 귀국했고 이후 봉천군벌에 몸을 의탁하여 장쭤린을 섬기게 되었다.

1927년 4월 중국공산당의 창시자 리다자오를 체포해 처형했으며 1927년 6월 장쭤린이 대원수에 옹립되고 판푸 내각이 출범하자 기존의 육군총장과 해군총장을 합친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대원수부 군사부장, 안국군 모범단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국민당의 2차 북벌로 장쭤린이 봉천으로 퇴각하던 중 황고둔 사건으로 암살된 이후 역시나 몰락하게 되었고 모든 공직에서 사퇴한다고 통전한 이후 만주로 달아났다.

1928년 동북역치 이후 장쉐량의 측근으로 활동했으며 1929년 반장전쟁 중 장쉐량의 군사회의에 참가하여 동북군의 관내진출에 대해 논의했고 봉소전쟁 이후 1930년 1월 24일의 군사선후회의에 참석했다. 1931년 장쉐량의 동북변방군 사령장관 공서의 수석참의에 임명되었다. 이후 행적은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불분명하다.

3. 여담

진지양의 군신정권에 의하면,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군에 투항하여 한간이 되었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위키피디아에는 사망년도를 1935년으로 기재하고 있었으며 1936년에 중장으로 추서되었다고 한다.

4. 참고문헌

5. 관련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