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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01 15:50:05

플레이셔 스튜디오


1. 개요2. 특징3. 평가4. 여담5. 관련 인물6. 관련 문서

1. 개요

Fleischer Studios

맥스 플라이셔(Max Fleischer,1883~1972)와 데이브 플라이셔(Dave Fleischer.1894~1979)가 1921년 설립한 스튜디오이다. 파라마운트 픽처스가 배급하였고 전성기(1930년대)에는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과 라이벌로 여겨질 정도로 유명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였다. 하지만 플라이셔가 제작한 작품들은 디즈니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았고 1942년 파산하여 페이머스 스튜디오로 재설립된 뒤 수십여 년 동안 대중한테 잊혀져 갔다.

설립자 맥스 플라이셔는 로토스코핑을 개발한 업적이 있으며 그 밖에 입체 카메라 기법도 개발했다. 배경을 사진으로 처리해서 배경만은 마치 3D 애니메이션이나 실사처럼 보이게 하는 기법이다. 예시 미국 최초의 유성 애니메이션 Song Car-tunes 시리즈를 제작한 곳이다.

이들이 만들었던 작품들 또한 대단한데 광대 코코(Koko the Clown), 베티 붑(Betty Boop), 뽀빠이, 슈퍼맨(1940년 작품) 등 21세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아는 캐릭터들이다.[1]

2.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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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셔 스튜디오가 만든 작품들 가운데 1940년판 슈퍼맨은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고퀄리티에 그야말로 컬러 애니메이션 역사상 처음으로 거대 로봇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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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슈퍼맨 애니를 보고 감명받은 인물이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 70년대에 TV판 루팡 3세를 연출할 때, 이 애니를 고대로 베끼다시피 로봇이 강도질을 하고 경찰들이 총을 쏘는 것을 그대로 그리며 오마주한 바 있다. 참고로 80년대에 금성비디오에서 이 시리즈도 더빙으로 낸 바 있다.

전성기였던 1930년대엔 디즈니와의 라이벌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었기 때문인지 월트 디즈니와 플라이셔 형제 간의 관계는 상당히 애증스러웠다고 한다. 여러 애니메이터들이 디즈니와 플라이셔를 몇 년씩 오가면서 활동하기도 했고 애니메이션 제작 기술 활용에 있어서도 무척 경쟁적이었다. 오죽하면 맥스 플라이셔의 아들인 리처드 플라이셔(Richard Fleischer)[2]가 회고하길 "내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월트 디즈니를 만나면 인상을 쓰고 다녔다."라고... 그렇지만 플라이셔 스튜디오가 파산하고 파라마운트를 떠나 업계를 전전하던 맥스와 화해하여 디즈니에서 일하던 전직 플라이셔 애니메이터들과 재회하게 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월트 디즈니. 또한 맥스의 아들인 리처드는 잠시 디즈니에서 일한 적도 있다.

플라이셔 스튜디오는 디즈니와는 차이점이 꽤 있던 회사였다. 회사 위치가 달랐고[3] 디즈니 작품의 음악이 동요나 클래식한 느낌이었다면 플라이셔는 당시 기준으로 현대적이고 팝 같은 음악을 사용하였다. 또한 플라이셔의 작품은 은근히 성적인 요소나[4] 마약 언급을 하기도 했다. 물론 대놓고 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설립했을 때부터 10여 년 동안 승승장구하던 회사였지만 운명을 결정짓는 여러 위기들이 닥쳐왔는데... 시작은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이 1937년에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완성하면서부터였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역사상 전무한 대히트를 치면서 자극을 받은 플라이셔 스튜디오와 파라마운트 픽처스도 <걸리버 여행기>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1939년에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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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자체는 괜찮은 평과 흥행(15만 달러로 제작하여 72만 달러를 벌어들임)을 했지만 문제는 짧은 제작 기간으로 인해 전반적인 준비 과정이 미비했고 그런 와중에 갑작스럽게 플라이셔 스튜디오가 마이애미로 제작 시설을 옮기면서 새로 고용한 애니메이터들과 뉴욕에서 일하던 애니메이터들 모두 숙련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급으로 완성되지 못했던 것.

디즈니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는 개봉 80년 이후인 2022년에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명작이 되었지만 <걸리버 여행기>는 개봉 당시에는 대박이었으나 수십 년 후에는 잊혀진 작품이 된 것이다.[5]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MrBugGoesToTown.jpg

그래도 걸리버 여행기의 초기 흥행이 그럭저럭 양호해서 두 번째 장편 애니의 제작이 확정되었고, 플라이셔는 전작의 동화스러운 분위기에서 벗어나 다시 현대적인 뉴욕 스타일로 배경을 조정하여 드로잉 작업 역량이 늘어난 애니메이터들의 노력과 에피소드적인 구조성도 더 발전된 <미스터 버그가 도시로 가다(Mr. Bug Goes to Town)>라는 신작을 만들어 1941년 12월 5일에 개봉했지만 망했어요. 제작비가 71만 달러 이상이었는데 번 돈이 24만 달러가 조금 넘는다.(...) 개봉 이전에 월터 란츠, 폴 테리, 리언 슐레진저도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을 고려했었지만 이 장편의 폭망으로 관련된 프로젝트를 취소하기에 이른다.

폭망의 이유는 이틀 뒤 벌어진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민들의 여론이 분노와 전쟁 참전에 몰려있어 그 외의 것들은 관심이 멀어진 상태였으며 유럽 시장 역시 2차 세계대전에 휩싸인 여파로 좋지 않았었고, 신작에 대한 신뢰감이 적었던 파라마운트가 홍보를 거의 하지 않은 점도 있었다. 한편, 라이벌이었던 디즈니는 총통각하의 낯짝이나 그 밖에 Out of the Frying Pan into the firing line(1942년), Education for Death(1943년)에 프로파간다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여 돈도 벌었고 종전 이후 1950년대에 파산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플라이셔는 회사가 어수선해져서인지 그런 것들도 많이 제작하지 못했다.

그 뒤 플라이셔 최후의 걸작으로 고평가받는 슈퍼맨 시리얼 애니메이션을 포함해 애니메이션 제작을 멈추지 않았지만, 한때나마 디즈니의 라이벌 소릴 듣던 수준은 아니었고 몇 년 동안 대립했던 맥스와 데이브가 서로 갈라진 것과 2번째 장편의 흥행 실패로 플라이셔 스튜디오가 파라마운트 픽처스에 매각되면서 둘 다 파라마운트를 떠나게 되었다. 이후 위의 내용대로 맥스는 월트와 재회하며 앙숙적인 관계를 해소하고 화해했지만 형제인 데이브와는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2023년 현재 플라이셔 스튜디오는 맥스 & 데이브의 가족들이 경영하고 있으며, 과거에 제작된 작품들에 대한 판권 & 상품화 관리를 위주로 운영 중이다.

3. 평가

플라이셔 스튜디오의 작품들은 윈저 매케이가 제작한 공룡 거티, 리틀 네모 등의 작품에서 시도했던 영상 & 애니메이션의 결합을 실사 영상의 인물, 물체들과 캐릭터가 자연스레 소통하는 구조로 발전시켰으며, 상당수의 작품들의 배경은 광란의 20년대에서 대공황 시기이던 당대의 도시가 기반이 되었다.[6] 기본적인 카툰형 디자인의 캐릭터들이 움직이면서 팔다리, 몸체가 부자연스러워지는 유연성의 도출과 아예 다른 물체나 캐릭터로 변형하는 연출 또한 두드러져 묘사되었다. 이런 점들이 겹쳐 플라이셔 스튜디오의 작품들은 애니메이션 내부의 형상, 물체들과 캐릭터가 뒤섞이는 애니메이션(Deranged Animation)을 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앞서 서술하였듯 1930년대는 캡 캘러웨이, 루이 암스트롱 등의 인기 재즈 뮤지션이 나오는 실사 뮤직 비디오의 삽입과 종종 성적인 유머가 연출되는 베티 붑과 신문에 연재된 코믹 스트립을 원작으로 제작한 뽀빠이 시리즈가 많은 인기를 끌던 플라이셔 스튜디오의 최전성기이자 회사의 대표 캐릭터로 불린 시기였음엔 분명하였다. 이런 추세는 1934년 헤이즈 오피스의 영화 제작 규정 개정으로 베티 붑의 캐릭터 디자인과 멤버 설정 변경, 애니메이터들의 파업이란 악재를 겪으면서 하락할 전조가 보였으며, 업계의 경쟁자인 월트 디즈니를 의식하여 그에게 본격적으로 도전하려 걸리버 여행기, 컬러 클래식(Color Classic) 등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제작하다가, 내외적인 여러 사건 사고의 여파로 인해 1942년 스튜디오가 파라마운트 픽처스에 인수되면서 페이머스 스튜디오로 개명당하고 인력들이 물갈이당하여 퀄리티도 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 다르지 않은 수준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것은 플라이셔 스튜디오의 작품이 세계적인 영향력에서도 후발 주자인 디즈니 작품들한테 밀려나서 소외당하고 외면받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텔레비전기에 맥스 플라이셔가 개발한 애니메이션 기법인 로토스코핑을 랄프 박시가 잠시 작품 제작에 활용한 일도 있었고, 존 크릭팔루시는 인터뷰에서 플라이셔 단편의 캐릭터 신체 동작에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일도 있었다. 68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언더그라운드 코믹스를 그리며 활동한 로버트 크럼(Robert Crumb) 등의 일부 미국인 만화가들과 데즈카 오사무의 초창기 작품들에서도 플라이셔 스튜디오 단편들에 대한 오마주가 드러나 있으며, 배트맨 TAS[7], 컵헤드, Bendy and the Ink Machine의 애니메이션 연출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등 훗날 형성된 다수의 애니메이션 팬덤과 관련된 역사가들, 업계의 애니메이터들한테 참고 작품으로 자리매김했으며, 현재는 미국 애니메이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제작사로 대대적인 재조명을 받게 되었다.

4. 여담

5. 관련 인물

6. 관련 문서


[1] 다만 뽀빠이와 슈퍼맨은 원작이 따로 있고 슈퍼맨의 경우 2020년대 기준으로 이미 판권이 워너 브라더스에게 있기 때문에 파라마운트가 다시 슈퍼맨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건 불가능하다.[2] 1940년대 이후 고전기 할리우드 감독으로 유명하다. 대중적으로는 마이크로 결사대가 유명하며, 구로사와 기요시봉준호가 열렬한 지지자로 꼽힌다.[3] 디즈니는 캔자스, 플라이셔는 뉴욕 시.[4] 베티 붑만 봐도...[5] 사실 작품 자체도 백설공주보다는 좀 떨어진다는 평. 두 작품 다 로토스코핑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백설공주는 로토스코핑으로 만든 캐릭터(백설공주, 왕비 등)와 그냥 만화 캐릭터(난쟁이들)이 조화를 이룬 반면 걸리버 여행기에서 나온 걸리버는 다른 캐릭터들과 달리 이질적이었다. 쉽게 말해서 걸리버는 같은 작품인데 캐릭터 간의 그림체가 달랐다.[6] 관련 작품들의 내적 연출은 몽환적인 구조와 아방가르드적인 면모가 있는 독일 표현주의가 주로 반영되어 있는데, 이는 스튜디오의 설립자인 맥스 & 데이브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의 유대계 미국인이었던 배경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7] 폴 디니를 위시한 애니메이션 스탭들이 플라이셔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슈퍼맨 시리얼 애니메이션에 직접적인 제작 동기를 얻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일이 있었다.[8] 다만 두 스튜디오가 직접 맞붙은 적은 없다.[9] 다만 파라마운트 애니메이션은 비매각된 플라이셔 단편들의 판권뿐만 아니라 파라마운트 카툰 스튜디오의 작품들과 테리 툰즈가 만든 작품들의 판권도 같이 소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