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소제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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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前 축구선수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프랑크 소제 Franck Sauzée | |
본명 | 프랑크 가스통 앙리 소제 Franck Gaston Henri Sauzée | |
출생 | 1965년 10월 28일 ([age(1965-10-28)]세) | |
프랑스 오베르뉴론알프레지옹 아르데슈 오브나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185cm | |
직업 | 축구선수 (미드필더[1] / 은퇴) 축구감독 축구해설자 방송인 | |
소속 | 선수 | FC 소쇼 (1983~1988)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88~1990) AS 모나코 (1990~1991)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91~1993) 아탈란타 BC (1993~1994) RC 스트라스부르 (1994~1996) 몽펠리에 HSC (1996~1999) 히버니언 FC (1999~2001) |
지도자 | 히버니언 FC (2001~2002) | |
국가대표 | 39경기 9골 (프랑스 / 1988~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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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Le God (신)
프랑스의 前 축구선수이자 現 축구 방송인.
마르세유 시절 3차례의 리게 앙 우승과 1992-93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며 90년대 초중반 프랑스 최고의 미드필더로 이름을 날렸다.
2. 클럽 경력
2.1. FC 소쇼
소쇼에서 프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1983년 8월에 FC 루앙을 상대로 데뷔무대를 밟았으며 이때 그의 나이는 고작 17살이었다. 1987년, 팀은 리그 되로 강등당했으나 1년만에 다시 리그 앙으로 복귀했다. 그는 1988 쿠프 드 프랑스 결승전에 출전했으나 메츠를 상대로 승부차기 끝에 패했다.2.2.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기
1988년, 소제는 마르세유에 입단한다. 그리고 두 시즌 연속으로 리그 우승과 한 차례 쿠프 드 프랑스 우승을 이끌며 성공적인 마르세유 시절을 보냈다.2.3. AS 모나코
1990년에 그는 모나코로 이적한다. 1990-91 시즌 동안 당시 모나코의 감독이었던 아르센 벵거 지휘 하에 그의 두번째 쿠프 드 프랑스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1991 유러피언 컵 결승에 진출했으나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에게 승부차기에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2.4.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2기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파비앵 바르테즈, 프랑크 소제, 마르셀 드사이, 루디 푈러, 바질 볼리, 에릭 디 메코, 장자크 에들리, 알렌 복시치, 디디에 데샹, 아베디 펠레[2], 조슬랭 앙글로마. |
그러나 영광의 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2-93 시즌 마지막 경기 상대인 발랑시엔의 선수들이 자수하는 바람에 마르세유의 승부조작 사실이 밝혀지고 만 것이다. 팀은 다시 한번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나 베르나르 타피 클럽 회장이 상대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그 결과 2부리그로 강등됐었으며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 또한 박탈당하고 말았다. 상황이 안좋게 되자 팀의 스쿼드가 해체되는 일이 발생했고 구단의 황금기를 이끈 주역 중 한명이었던 소제도 팀을 떠나야만 했다.
2.5. 아탈란타 BC
그 후 세리에 A의 아탈란타에 입단했다. 그러나 그를 영입했던 프란체스코 귀돌린 감독이 단 10경기 만에 경질되었고 소제도 16경기 출전에 그치고 말았다. 결국 팀은 시즌 내내 부진한 경기력 끝에 세리에 B로 강등되었다.2.6. 히버니언 FC
아탈란타를 떠난 후 5년간 스트라스부르, 몽펠리에를 거쳐 1999년에 스코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히버니언에 입단한다. 그는 플레잉 코치로 활동하며 2001년에는 스코틀랜드 컵 결승에 진출했고 리그 3위를 기록하며 UEFA 컵 진출권을 획득하는데 큰 역할을 하며 짧은 기간이었지만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현재까지도 히버니언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외국인 선수 중 한명으로 기억되고 있다.3. 국가대표 경력
90년대 초중반 리게 앙 무대에서 최고의 미드필더로 군림했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전성기때는 대표팀이 암흑기를 걷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월드컵에는 한번도 출전하지 못했고 UEFA 유로 1992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국제 메이저대회였다.1994 FIFA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소제는 예선 전경기에 출전하여 뢰 블레에서 고군분투했으나 팀은 최종전 불가리아와의 홈경기에서 충격의 역전패를 당한 뒤 월드컵 본선행이 좌절되자 28살의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그야말로 프랑스 축구의 저주받은 세대의 대표적인 선수.
4. 지도자 경력
히버니안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중 감독 알렉스 맥리쉬가 레인저스 FC로 떠나자 소제는 그의 후임자로 임명되었다. 1919년 이후로 비스코틀랜드인이 감독을 맡은 사례가 되었고 이는 팬들도 놀라게 했던 결정이었다. 당시 선수로 활약하던 소제는 아킬레스건 부상을 앓아오고 있었고 감독 직무에 집중하기 위해 선수 은퇴를 선언했다.허나 그는 지도자로서 경험이 일천했고 15경기에서 단 1승만 거두며 불안한 행보를 보였다. 심지어 리그에서는 한 경기도 이기지 못했다. 결국 최하위였던 세인트 존스톤에게 패하며 2002년 2월, 69일 만에 경질되고 만다. 팬들은 애초에 경험이 부족한 소제를 선임한 보드진에 대해 크게 불만을 표했으며 되려 그가 안타깝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이때를 계기로 소제는 지도자 대신 축구전문가 및 해설의 길을 걷게되었다.
5. 은퇴 이후
히버니언에서 감독생활을 마친 후 고국으로 돌아온 소제는 프랑스 텔레비지옹의 축구전문가로 활동했으며 카날+에서 6년간 축구해설로 일했다. 그는 카날에서 경기에 대한 분석과 월요일 밤의 축구 토크쇼에 출연했다. 그는 2008년 카날을 떠나 리게 앙 중계를 맡은 오렌지에서 근무하다가 2012년 여름, 다시 캬날로 돌아와 축구전문가 및 해설로 열렬히 활동 중이다.6. 기록
6.1. 대회 기록
-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88~1990 / 1991~1993)
- 디비지옹 1: 1988-89, 1989-90, 1991-92
- 쿠프 드 프랑스: 1988-89
- UEFA 챔피언스 리그: 1992-93
- RC 스트라스부르 (1994~1996)
- UEFA 인터토토컵: 1995
- 히버니언 (1999~2001)
- 스코틀랜드 퍼스트 디비전: 1998-99
6.2. 개인 수상
- 옹즈 드 옹즈: 1991
-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 1992-93
[1]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스위퍼 등 여러 포지션을 섭렵한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다.[2] 덧붙이자면 안드레 아이유와 조던 아이유의 아버지가 아베디 펠레이다.[3] 이때부터 명칭이 유러피언 컵에서 UEFA 챔피언스리그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