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03:19:48

포트 아서 총기난사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포트 아서 총기난사 사건
Port Arthur Massacre
파일:포트 아서 대학살.jpg
발생 일시
(현지시간)
1996년 4월 28일 오전 11시 45분경
발생 장소
[[호주|]][[틀:국기|]][[틀:국기|]] 태즈메이니아섬 포트 아서
사고 유형 대량살인
가해자 마틴 브라이언트(Martin Bryant)
사망 35명
부상 23명

1. 개요2. 범인3. 사건의 전개4. 호주 총기 규제의 시작5. 사건 이후6. 매체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Port Arthur Massacre

1996년 4월 28일, 호주태즈메이니아섬에서 일어난 대량살인 사건.

2. 범인

파일:마틴 브라이언트.jpg

이 사건의 마틴 브라이언트(Martin Bryant)는 1976년 5월 호주 태즈메이니아 호바트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장난감을 막 부수는 등 폭력성을 표출했다.

커서 학교에 가서는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지 못했는데 아이큐가 다른 학생들보다 낮고 조현병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 뒤를 음습하게 따라다니는 모습 때문에 '그림자' 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했으며 학교 수업도 잘 따라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마틴은 주변 반응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고 TV 시청을 취미 삼아 살았다. 12살엔 폭죽을 갖고 놀다가 사고로 다쳐 입원했는데 그 과정에서 지역 방송국과 인터뷰하기도 했다.

하지만 TV를 너무 많이 보면서 일상에 지장이 생기고 학교에서도 지적할 정도가 되자 마틴의 아버지는 이를 해결해 보려고 마틴에게 공기총을 사주고 사격장에 데려가는 등 성격을 바꿔 보려고 했으며 포트 아서에 자주 데려가며 작살총으로 낚시하기도 했다. 마틴은 총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마틴은 폭력성이 점점 커지며 새를 사냥할 때 총에 맞고 땅에 떨어진 새에게 확인사살을 하며 총을 몇 차례 더 쏜다거나 다른 학생이나 지나가는 차량에 총을 겨누기도 했다.

마틴은 결국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학교에서 나왔으며 남은 교육은 특수교육을 받는 곳에서 받았지만 교육이 끝난 뒤에도 사회에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이웃에게 총을 겨누는 등 이웃과 마찰도 자주 빚었으며 한동안 직업도 갖지 못하다가 집 정원을 정돈하는 일을 하게 됐다. 그러다 56세의 여성 헬렌 하비의 정원을 정돈하면서 친해지게 됐다. 헬렌도 사회에 쉽게 어울리지 못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둘은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둘은 동거하면서 헬렌의 정원을 가꾸고 농장도 같이 관리하고 쇼핑도 같이 가는 등 잘 지내게 되는 듯 했다. 하지만 마틴은 여전히 다른 이웃들과 갈등이 많았고 헬렌이 차를 운전할 때 운전대를 잡아 사고를 낼 뻔한 일이 많았다. 마틴이 점점 폭력성을 보이며 '사람을 쏘고 싶다.' 는 말까지 하자 아빠는 아들이 평범한 삶을 살기를 원하며 돈을 더 쓰게 됐다. 그러다가 1992년 8월 정면충돌 사고가 일어나 헬렌이 사망하고 마틴은 7개월간 입원했다. 마틴은 헬렌의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퇴원한 뒤에도 여전히 폭력성이 심해 이웃들과 갈등이 더 심해졌다.

이후 아버지가 댐에서 익사한 채 발견됐는데 사인은 자살로 추정됐다. 버팀목이 되어주던 아버지와 헬렌이 사망하자 마틴의 폭력성은 더 심해졌다. 물려받은 유산을 비싼 옷을 사는 등 사치에 썼고, 방안을 인형으로 잔뜩 꾸미고, 비싼 술을 사 마시고, 이상한 억양으로 말하고 다니는 등 이상한 행동을 보였으며 해외여행도 3년간 수차례나 다녔다. 그러다 어머니가 다니는 교회에서 한 여성과 만나게 됐고 데이트를 했으나 둘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브라이언은 영국에서 일어난 던블레인 총기난사 사건을 알게 되었고 이상하게 빠져드는 모습을 보이더니 총기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3. 사건의 전개

사건 당일 오전 9시 47분 마틴 브라이언트는 집에서 나와 폭스바겐 차를 타고 출발했다. 고속도로를 타고 목적지인 포트 아서로 향하다가 11시 45분 경 시스케이프 게스트하우스에 들렸는데 그곳은 과거 마틴의 아버지가 구입하려고 했던 곳이었다. 마틴은 총을 난사하고 칼을 휘둘러 게스트 하우스 주인 부부를 살해했다. 이후 손님 몇 명이 찾아오자 손님도 살해해 총 3명을 살해하고 다시 포트 아서로 향했다. 중간에 차가 고장나 도로 한쪽에 멈춰 서 있던 사람을 보고 "시간이 되면 포트 아서의 카페에 커피 한잔 하러 와라." 는 소름끼치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오후 1시 10분 포트 아서에 도착한 마틴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음식점에서 음식을 주문한 후 먹으면서 옆자리 사람한테 "와스프는 많은데 쪽바리는 얼마 없다."는 인종 차별적 발언을 내뱉었다. 식사를 마친 마틴은 카페에 들어가 가방에서 자신의 AR-15를 꺼내 난사했다. 순식간에 12명이 사망하고 10명 넘는 사람이 중상을 입었다. 아직까지 총소리를 듣고 대피한 사람은 없었으며 몇몇 사람은 독특한 이벤트 소리로 착각하기까지 했다. 마틴은 바로 옆의 기념품 가게로 가 다시 한 번 총을 난사해 8명을 살해했다.

기념품 가게를 나선 마틴은 주차장으로 향해 지나가던 버스를 향해 사격했다. 주차된 자신의 차량에 들려 L1A1도 꺼내 쏘며 죄 없는 사람들을 죽였다. 차를 타고 도망가는 사람들도 여지없이 쐈다. 구조헬기가 도착해 부상자들을 이송하자 헬기를 향해서도 난사했다. 그러다가 주차장 요금을 내려고 기다리던 BMW 차량 때문에 밖에 나가지 못하게 되자 안에 있던 탑승자 4명을 전원 살해하고 차량을 강탈해 가져온 총과 총알을 옮겼다.

BMW를 몰고는 근처 주유소에서 토요타 운전자 1명을 협박해 납치 후 트렁크에 감금했다. 토요타에 탔던 다른 사람은 살해했다. 주유소 직원은 마틴을 막아 보려고 자기 총을 가져왔으나 그 사이 마틴은 주유소를 떠났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마틴을 추격했다. 마틴은 집으로 가면서 반대편 차선에 드라이브 바이를 했다. 중간에 시스케이프에서 다시 내려 차량들을 향해 난사했다. 시스케이프 게스트 하우스에 다시 들린 마틴은 트렁크에 감금했던 남자를 꺼내 집 난간에 묶었다. 타고 온 BMW엔 불을 질렀다. BMW는 못 버티고 얼마 안 가 폭발했다. 이후 경찰이 보이자 경찰에게 총을 난사하고 인질은 살해했다. 방송국에선 상황을 생중계하기 시작했다. 마틴은 아직 인질이 사망한 것을 모르던 경찰과, 마틴을 막으러 출동한 특수부대는 마틴의 난사와, 공항에 가야하니 헬기를 가져오라는 원하는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마틴은 무선 전화로 경찰과 통신했지만 중간에 전화 배터리가 다 되자 경찰은 마틴과 연락이 불가능해졌다.

다음 날, 마틴은 게스트 하우스에 불을 지르고 경찰에게 "나 잡아봐라!(Come and get me!)" 라며 도발했다. 경찰과 특수부대는 이 시점에서 인질이 이미 사망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얼마 후 옷에 불이 붙은 채 마틴이 뛰쳐나오자 마틴을 체포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마틴은 18시간 동안 총기난사와 칼부림으로 35명을 살해했으며 23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 사건은 호주 역사상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총기난사 사건으로 기록됐는데 너무 충격적이라 학살(Massacre)이라고 부를 정도다. 던블레인 총기난사 사건이 터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때여서 전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4. 호주 총기 규제의 시작

무려 35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사태에 호주 국민과 정부는 경악했다. 그동안 호주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사건은 그동안 있었던 사건들을 뛰어넘는 최악의 규모였기 때문이다.[1] 호주 곳곳에서 총기 규제에 대한 여론이 커지자 당시 호주 총리였던 존 하워드는 "미국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 며 강력한 총기 규제안을 발표했는데 몇몇 사람들은 이에 반대하고 존 하워드에게 살해협박까지 가했으나 존은 규제를 강행했다.

우선 민간인이 돌격소총산탄총을 소지하는 것을 금지했다. 총기 소지 면허 제도를 더 까다롭게 만들고 총기 등록제도 실시해 총기를 쉽게 소유하지 못하게 했다. 더 나아가 정부에서 직접 국민들이 소유 중이던 총을 사들인다고 발표했고, 그 결과 호주 전역의 민간인이 보유하고 있던 총기 중 20%[2]가 모였다. 이렇게 구입한 총기는 정부에서 전부 폐기처분했다.

그 결과, 호주에선 총기난사 사건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총기, 불법으로 구하는 총기는 있어서 사건이 종종 터지긴 하지만 터지는 빈도와 규모는 이전보다 훨씬 크게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자살율도 꽤 줄었다.

이는 총기난사 사건이 자주 터지는 미국에서도 큰 소식이었는지 총기 규제 얘기가 나올때면 이 사건이 미국에서 자주 언급된다.

5. 사건 이후

마틴이 왜 이런 행동을 벌였는지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를 변호한 변호사는 마틴에게서 왜 벌였는지를 들었다 밝혔으나 정확히 왜 벌였는지를 공개하지 않았다.

호주 법정은 마틴에게 징역 1035년과 종신형을 35번 선고했다. 가석방은 허가되지 않았다. 마틴의 형량은 호주 역사상 가장 긴 형량에 달했다. 현재 그를 면회하는 사람은 그의 어머니를 제외하면 한 명도 없다.

2002년 2월, 마틴은 교도소에서 자살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다.

포트 아서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공원이 세워졌다.#

6. 매체

7. 둘러보기

역대 호주의 대형 사고 및 참사
{{{#!wiki style="margin:0 -10px -5px"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word-break: keep-all; min-width: 100px; min-height:2em"
{{{#!folding [ 2020년대 ]
{{{#!wiki style="margin:-5px 0"
발생일<colcolor=#000>사망사건명
}}}}}}}}}
[ 201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2019년 9월 2일 ~ 2020년 2월 13일
479 2019-2020 호주 산불
2010년 12월 15일
50 크리스마스섬 난민선 침몰 사고
2014년 7월 17일
298 27 말레이시아 항공 17편 격추 사건
[ 200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2009년 2월 7일 ~ 3월 14일
173 2009년 호주 산불

[ 199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96년 4월 28일
35 포트 아서 총기난사 사건
[ 198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89년 12월 22일
35 켐지 버스 충돌 사고
1989년 10월 20일
21 그래프톤 버스 충돌 사고
1988년 12월 16일
21 브루톤 항공 Mu-2 추락 사고
1983년 2월 16일
75 애쉬 웬즈데이 산불
[ 197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77년 1월 18일
83 그랜빌 철도 참사
1972년 8월 28일
25 호주 공군 A4-233 추락 사고
1970년 10월 15일
35 웨스트 게이트 브리지 붕괴사고
}}}
[ 196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69년 8월 25일
21 눈가호 침몰 사고
1969년 1월 8일
23 멜버른 산불
1968년 12월 31일
26 맥로버트슨 밀러 항공 1750편 추락 사고
1967년 2월 7일
64 테즈매니안 산불
1966년 9월 22일
24 안셋 ANA 항공 149편 추락 사고
1966년 8월 13일
30 윌리엄 부스 요양원 화재
1964년 2월 10일
82 멜버른호 보이저호 충돌 사고
1960년 6월 10일
29 트랜스 오스트레일리아 항공 538편 추락 사고
[ 195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50년 6월 26일
29 1950년 오스트레일리안 국제 항공 DC-4 추락 사고
[ 194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49년 3월 10일
21 퀸즐랜드 항공 록히드 18-56 추락 사고
1946년 3월 10일
25 오스트레일리아 국제 항공 DC-3 추락 사고
1944년 9월 7일
25 카푸카 군사기지 폭발 사고
1943년 12월 22일 ~ 1944년 2월 15일
51 1944년 빅토리아 산불
1943년 12월 19일
31 카날강 항공기 참사
1943년 8월 7일
27 미 공군 C-47 추락 사고
1943년 6월 14일
40 베이커스 크릭 비행기 추락 사고
1943년 5월 8일
25 워동가 건널목 사고

[ 193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39년 1월 13일
71 검은 금요일 산불
1935년 12월 1일
31 팔링가호 침몰 사고
[ 192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27년 11월 3일
40 그레이클리프호 참사
1926년 9월 13일
26 무룰라 열차 충돌 사고
1925년 1월 26일 ~ 3월 10일
60 1925년 빅토리아 산불
1921년 9월 19일
75 물리건산 광산 참사
[ 191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12년 10월 12일
42 노스 마운트 라이엘 참사
1912년 3월 12일
150 쿰바나호 침몰 사고

[ 190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사건명
1909년 1월 31일
40 클랜 라날드호 침몰 사고
1908년 4월 20일
44 선샤인 철도 참사
1905년 9월 6일
27 로치 베나처호 침몰 사고
1902년 7월 31일
96 켐블라산 광산 참사
1901년 3월 21일
31 페더렐호 침몰 사고
||


[1] 사람이 이 정도로 많이 사망한 사건은 총기난사가 자주 일어나는 미국에서도 드물다. 미국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 중 이보다 사망자 수가 많은 사건은 2017년 라스베이거스 총기 난사 사건2016년 올랜도 나이트클럽 총기난사 사건 두 건 뿐이고 사건이 일어난 1996년까지만 해도 미국에선 30명 이상 사망한 총기난사 사건이 없었다.[2] 70만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