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蒲壽庚, ?~?송말원초 시기의 아랍계 부호이다. 일명은 포수경(蒲受畊)이고, 호는 해운(海雲)이다.
2. 생애
2.1. 남송에서
생년 미상으로, 선조는 아라비아인 또는 페르시아인이라 한다. 6대조 포맹종(蒲孟宗)이 사천(四川)에서 광주(廣州)로 이사하여, 송 신종(神宗)의 상서좌승(尙書左丞)이 된 이후에 명문이 되었다. 아버지 포인빈(蒲仁賓) 때 천주(泉州)로 이사했고, 순우(淳祐)[1] 10년(1250년) 무렵 형 포수성(蒲壽成)과 함께 해적 토벌에 공을 세웠다.함순[2] 10년(1274년), 해구가 천주를 습격했고, 관병은 이를 막아낼 힘이 없었다. 이에 포수경과 그의 형인 포수성은 자금을 내어 민단을 조직하여 해구를 격퇴한다. 그 공으로 포수경은 복건안무사(福建按撫使) 겸 연해도치제사(沿海都置制使)의 관직을 받아, 복건 지역의 병사, 민정의 요직을 맡는다.
2.2. 원나라에서
1276년 남송 조정은 포수경을 복건,광초무사 총해박 겸 주시박(主市舶)에 임명하였고 동년 2월 원나라의 군대가 임안[3]을 함락시키고 사 태후가 각지에 항복하라는 조서를 내리자, 포수경도 그에 따라 투항하였다. 원나라는 포수경이 해상 업무에 익숙하고, 해상 선박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듣는다. 이에 총사령관 백안(伯顔)은 불백(不伯), 주청(周靑)을 보내 포수경, 포수성 형제를 초무하였고 포수경은 이에 투항한다.포수경은 원에 투항한 후, 세조에게 중용된다.
이 때 장세걸은 두 왕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천주를 수도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에 항복하였던 그는 장세걸 등 어린이를 황제로 세운 것이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여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자 부족으로 인해 장세걸은 포수경의 선단을 공격하고 약탈하자 이에 포수경이 격분하여 그와 맞서 싸웠고, 장세걸은 이후 천주를 공격했으나 격퇴당했다. 포수경은 송나라의 황실을 도살하고 취안저우를 3개월 동안 지켰다.
지원14년(1277), 소용대장군(昭勇大將軍), 민광도제거복건광동시박사(閩廣都提擧福建廣東市舶事), 진국상장군(鎭國上將軍),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임명되었으며 강서행성(江西行省)을 책임지게 되었다.
1278년 3년 복건행성참지정사로 임명되었고 행중서성사어복주(行中書省事於福州), 진무빈해제군(鎭撫瀕海諸郡)으로 승진한다. 동년 팔월, 복건행성중서좌승, 진무빈해제군으로 임명된다.
1279년 2월, 세조는 양주(揚州), 호남(湖南), 감주(贛州), 천주(泉州) 등 4성(省)에서 일본 침공용 전함 600척의 건조를 명하였는데, 포수경은 그 중 200척의 건조를 명받았다.
이에 포수경(蒲寿庚)이 상주했다.
해선(海船)을 200척 만들라고 한 조칙(詔)이 있었습니다만, 지금 완성되어 있는 배는 50척입니다. 백성들은 실로 매우 고생하며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세조는 이를 받아들인 뒤 포수경에게 명한 200척의 건조를 중단시켰다.이후 동년 3월 광동성 지역에서 벌어진 애산 전투에 참전하여 남송 잔당을 없애는 데 기여한다.
1284년 8월에는 강회 등 외행성의 중서좌승 겸 천주분성 평장정사로 임명된다.
이후 그의 기록은 알 수 없다.
3. 기여
포수경은 송나라를 버리고 원나라에 항복하여, 취안저우 항을 전쟁의 파괴로부터 보호하였고, 중국의 해외 무역이 계속 발전할 수 있게 하였으며, 원나라 시대에 취안저우항이 세계 최대의 무역항 중 하나가 되는 기초를 마련했다.4. 후대
원말명초 시기 포씨 일족은 멸족되었고 주원장은 명나라를 건국한 뒤 포씨 일족들을 탄압하였다. 주원장은 칙령을 반포하여, 천주의 포씨 일가 중 남은 자들은 모조리 군대에 가게 하여 영원히 군노(軍奴)로 삼아 이들을 군적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고, 영원히 공부하여 관직에 나오지 못하게 한다. 포씨 일족의 여성들은 모두 교방사(敎坊司)에 넣어 대대로 창기(娼妓)나 노비가 되게 했다.태조는 포씨 성을 지닌 사람은 글공부를 해서 관직에 나갈 수 없게 했다.
《민서》
《민서》
우리의 태조 황제는 천주 포수경, 공승부(孔勝夫)의 자손은 관직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이는 그의 선조들이 원군을 도와 송을 멸망시킨 죄 때문이다.
《송원통감》
《송원통감》
5. 논란
5.1. 번객회회설
20세기의 연구자들은 모두 포수경이 아랍인이 한화된 후예라고 간주하였다.포수경은 서역인이다.
고조우,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고조우,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포수경은 서역[4]인이다.
『송사(宋史)』
『송사(宋史)』
송나라 유민 정사소가 저술한 『심사·구서·제대송충신문』에서는 포수경을 포수경(蒲寿畊)이라고도 하며 그의 조부는 남번인이라고 하였다.
약 1890년 독일인 힐더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포수경의 포자는 아랍의 보통 사람 이름인 Abu(Abon)의 음역이며, 포수경의 성도 이로부터 유래되었다.
5.2. 서촉망족설
일부 연구자들은 취안저우의 《포씨 족보》에 따르면, 포수경의 선대는 아랍 계통으로, 본적은 쓰촨성 낭주이며, 포종맹 이후 아버지의 이름은 포사빈이고, 서촉의 왕족 출신으로 대대로 학문이 깊었으며, 관료 집안 출신으로 쓰촨성에서 취안저우로 이주했다고 한다.6. 기타
- 원나라 때 편찬되었던 《송사》와 명나라 때 편찬되었던 《원사》에는 별도의 열전이 없고, 민국 시기 커샤오민에 의해 편찬되었던《신원사》에 그 열전이 있지만 몇 줄로 그의 행적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