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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5-04 16:21:12

페리브리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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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브리지 전투
영어: Battle of Ferrybridge
시기
1461년 3월 28일
장소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페리브리지
원인
잉글랜드의 패권을 둘러싼 요크파와 랭커스터파의 대결.
교전 세력
요크 가문 파일:요크 왕조 휘장.svg 랭커스터 가문 파일:랭커스터 왕조 휘장.svg
지휘관
파일:Arms_of_Richard_Neville,_16th_Earl_of_Warwick.svg.png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
파일:Coat_of_Arms_of_Sir_William_Nevill,_6th_Baron_Fauconberg,_KG.png 포콘버그 남작 윌리엄 네빌
파일:Arms_of_Clifford.svg.png 클리퍼드 남작 존 클리퍼드
파일:Coat_of_Arms_of_John_Neville,_Baron_Neville.svg.png 네빌 남작 존 네빌
병력
미상 미상
피해
양측 통합 사상자 3,000명 발생
결과
불확실함.
영향
토우턴 전투 발발.
1. 개요2. 상세

1. 개요

장미 전쟁 시기인 1461년 3월 28일, 잉글랜드 북부로 북상한 요크군과 이에 맞서는 랭커스터군의 전투.

2. 상세

1461년 3월 2일, 런던에 입성한 에드워드 4세는 런던 시민들이 스코틀랜드인들과 결탁하여 심각한 약탈과 파괴를 각지에서 자행한 랭커스터파에게 매우 적대적인 것을 확인하고,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즉각 회의를 개최했다. 그는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형제인 엑서터 주교 조지 네빌로부터 왕위를 계승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잉글랜드 국왕으로 등극했다. 다음날 네빌가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의회는 헨리 6세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에게 무기를 들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왕위에 대한 권리를 상실했다고 발표함으로써 그의 직위를 받아들였다.

에드워드 4세는 워릭 백작의 군대와 자기가 이끌고 있는 군대, 그리고 포콘버그 남작 윌리엄 네빌과 노퍽 공작 존 모브레이 등 강력한 영주들과 합세한 뒤, 요크셔의 에어 강 너머에 자리잡은 랭커스터 진영을 향해 북상했다. 1461년 3월 27일, 선봉대를 이끈 워릭 백작은 페리브리지에서 랭커스터군이 파괴한 강둑을 판자로 수리하여 강을 건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몹시 차가운 겨울 물속에 들어갔던 많은 장병이 동사했고, 반대편에 있는 작지만 결연한 의지를 가진 랭커스터군이 쏴대는 화살비에 맞아 죽기도 했다.

랭커스터군을 가까스로 격퇴한 워릭 백작은 다리를 수리하기 위해 피츠월터 경이 이끄는 부대를 파견했으며, 이들이 숙영지를 에어 강 북쪽에 세우도록 했다. 다음날인 3월 28일 이른 아침, 클리퍼드 남작 존 클리퍼드와 네빌 남작 존 네빌이 지휘하는 랭커스터군이 강을 건너온 요크군 분견대를 공격했다. 에드워드 홀의 연대기에 따르면, 피츠월터 경은 자기 군인들이 서로 다투고 있다고 생각해 갑옷도 입지 않은 채 손에 폴랙스만 든 채 숙영지로 나왔다가 치명상을 입고 후방으로 실려갔다가 일주일 후에 사망했다고 한다. 살아남은 장병들은 워릭 백작의 본대를 향해 도주했다.

워릭 백작은 이 소식을 접하자 격노했다. 에드워드 홀에 따르면, 그는 검을 뽑아 자기가 타던 말의 가슴에 꽂아서 죽인 뒤, "도망가고 싶은 사람은 도망하라. 난 나와 함께 싸우고 싶은 자와 함께 여기에 있겠다"라고 말했다. 에드워드 4세는 다른 부하들에게도 워릭 백작과 똑같이 하라고 지시하면서, 전장에서 도망치려는 자는 누구든 죽이라고 명령했으며, 반역자를 죽인 사람은 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이후 워릭 백작이 친히 이끄는 분견대가 페리브리지 다리를 탈환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하지만 랭커스터군은 이미 강력한 방어선을 다리에 구축해뒀고, 워릭 백작은 이들을 상대로 고전하다가 다리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실려갔다.

에드워드 4세는 정공법으로는 다리 공략이 힘들다고 판단하고, 포콘버그 남작 윌리엄 네빌, 윌리엄 블런트, 로버트 혼에게 병력을 보내 강을 건너 서쪽으로 3마일 떨어진 캐슬포드로 향하게 했다. 이후 이들은 클리퍼드 남작의 측면을 요격했다. 클리퍼드 남작은 군대를 재편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사이에 에드워드 4세가 병사들을 이끌고 정면에서 공격해오자 삽시간에 무너졌다. 클리퍼드 남작은 본대가 있는 토우턴을 향해 도주했지만, 요크군 추격대가 그를 맹렬히 추격했고, 랭커스터군 본대가 주둔한 곳에서 멀지 않은 딘팅 데일의 작은 협곡에서 따라잡았고, 결국 클리퍼드 남작은 사살되었다. 한편 존 네빌은 목숨을 건져 본대에 합류했지만, 많은 병사를 상실했다. 이리하여 다리를 확보한 에드워드 4세는 다음날인 3월 29일에 랭커스터 본대를 상대로 토우턴 전투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