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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5-08 16:05:43

튜크스베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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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크스베리 전투
영어: Battle of Tewkesbury
파일:튜크스베리 전투.jpg
시기
1471년 5월 4일
장소
잉글랜드 왕국 글로스터셔 튜크스베리
원인
잉글랜드 왕국의 패권을 둘러싼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의 대결.
교전 세력
요크 왕조 파일:요크 왕조 휘장.svg 랭커스터 가문 파일:랭커스터 왕조 휘장.svg
지휘관
파일:잉글랜드 국장(1413-1603).svg 에드워드 4세
파일:Arms_of_Thomas_of_Lancaster,_1st_Duke_of_Clarence.svg.png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
파일:Coat_of_Arms_of_Sir_William_Hastings,_1st_Baron_Hastings,_KG.png 헤이스팅스 남작 윌리엄 헤이스팅스
파일:Arms_of_the_Prince_of_Wales_(Modern).svg.png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파일:Beaufort_Arms_(France_modern).svg.png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
파일:Arms_of_the_House_of_Courtenay_(undifferencied_arms).svg.png 데본 백작 존 코트니
파일:Coat_of_Arms_of_Sir_John_Wenlock,_KG.png 존 웬록
병력
5.000명 6,000명
피해
미상 2,000명
결과
요크군의 승리
영향
랭커스터파의 궤멸.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결과

1. 개요


장미 전쟁 시기인 1471년 5월 4일, 에드워드 4세가 이끄는 요크군과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내세운 랭커스터군이 맞붙은 전투. 랭커스터 파는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사실상 궤멸되었다.

2. 배경

1471년 4월 14일 바넷 전투 당일,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와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왕자는 에드워드 4세의 귀환을 막으려는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과 합류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웨이머스에 상륙했다. 그러나 며칠 후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가 이들과 합류하면서, 바넷 전투에서 아군이 궤멸되었고 워릭 백작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절망에 빠져 프랑스로 망명하려 했지만, 아들 에드워드는 아버지를 구하고 에드워드 4세를 타도하기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한다며 어머니를 설득했고, 서머셋 공작도 왕자의 뜻에 동의했다. 결국 마르그리트 왕비는 운명을 아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원정을 지속하는 데 동의했다. 그 후 랭커스터 가문 귀족들이 병력 상당수를 이끌고 합류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북쪽으로 진군해 웨일스로 건너가 재스퍼 튜더와 합류하려 했다. 튜더 가문은 웨일스의 귀족 가문으로 재스퍼 튜더는 헨리 튜더, 즉 후의 헨리 7세의 삼촌이었으며 웨일스는 랭커스터파의 중요 지지 기반 중 하나였다.

한편, 바넷 전투에서 승리한 에드워드 4세는 자신의 군대를 상당 부분 영지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마르그리트의 상륙을 알고 런던 서쪽의 윈저로 군대를 다시 집결시켰다. 랭커스터군은 런던을 노리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 움직임을 보이며 에드워드를 속이고자 했지만 에드워드는 이에 넘어가지 않았고, 마르그리트가 웨일스로 들어가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윈저를 떠나 서쪽으로 맹렬히 진군했다. 한편 마르그리트는 4월 30일 바스에 도착했고, 인근 브리스톨에서 대포와 일부 지원군을 확보했다. 에드워드는 마르그리트가 브리스톨에 있다는 걸 알고 전투를 벌이고자 했다. 소드베리(Sodbury) 언덕에서 전초전이 벌어졌고, 에드워드는 전투를 대비하기 위해 긴 행군으로 피곤했던 그의 군대에게 휴식을 주었다. 하지만 랭커스터군은 야간 행군으로 에드워드를 따돌리고 5월 2일에는 에드워드보다 약 24km 정도 앞서게 되었다.

랭커스터군이 웨일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웨일즈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세번 강을 어떻게든 건너야 하는 상황이었다. 에드워드 4세는 세번 강에 인접한 요충지 글로스터의 행정관 리처드 보챔프에게 명령을 보내 랭커스터군의 통과를 막도록 했다. 글로스터를 향해 밤새도록 행군한 랭커스터군은 1471년 5월 3일 아침 글로스터에 도착했다. 그들은 글로스터를 통과해 세번 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글로스터에 주둔한 수비대는 이들에게 성문을 개방하길 거부하고 방비에 착수했다. 에드워드 4세가 언제 들이닥칠지 알 수 없었기에 포위 공격은 불가능했던 랭커스터군은 다른 곳에서 세번 강을 건너기로 하고 북동쪽으로 16km를 더 행군했다. 이 과정에서 랭커스터군은 요크군에게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 일부 대포를 포기해야 했고, 이들은 글로스터에서 출발해서 북상한 요크군 지원군의 손에 떨어졌다. 5월 3일 늦은 오후, 랭커스터군은 튜크스베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세번 강을 건너려면 로어 로드 포드를 거쳐야 했는데, 이곳은 튜크스베리 수도원에서 하류로 1마일 떨어진 곳, 에이번 강과 합류하는 지점 아래에 있었다.

당시 더운 날씨로 인해 랭커스터군은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을 만큼 지쳤고, 강을 건너는 도중에 에드워드 4세의 군대에게 붙잡히면 궤멸될 수 있었다. 마르그리트 왕비와 서머셋 공작은 다음 날인 5월 4일에 적군이 접근해오면 더 이상 도주하지 말고 전투를 벌이고, 그렇지 않으면 행군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한편 에드워드의 요크군 또한 50km 이상의 긴 행군을 거쳐 지쳐 있었지만, 랭커스터군에 비해 기병 및 하마보병의 비중이 높아 타격이 상대적으로 덜했다. 에드워드는 첼트넘에서 10km를 더 행군하여 랭커스터군에 5km 이내로 접근하는 데 성공했고, 랭커스터군은 5월 4일 전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3. 전투 경과

5월 4일 새벽, 랭커스터군은 튜크스베리 마을에서 남쪽으로 1마일 떨어진 곳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그들의 후방에는 에이번 강과 세번 강이 있었다. 튜크스베리 수도원은 랭커스터군 중앙 부대 바로 뒤에 있었고, 당시 고브스 홀(Gobes Hall)로 알려진 농가는 랭커스터군 진지의 중심을 표시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고브스 홀에서 밤을 보냈다가 전투 당일 전장에서 다소 떨어진 종교 시설로 급히 피신했다고 한다. 요크군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은 곧바로 전투 대형을 형성했다. 우익 부대는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가 지휘했고, 콜른브룩 개울이 그 앞에서 흘렀다. 중앙 부대는 존 웬록이 지휘했고, 명목상 총사령관인 에드워드 왕자가 중앙 부대에 함께 했다. 좌익 부대는 데본 백작 존 코트니가 지휘했는데, '개스턴'으로 알려진 낮은 산등성이에 포진했다. 작은 강인 스윌게이트는 랭커스터군 진지 뒷편으로 굽어서 에이번 강과 합류하면서 데본 백작 부대의 좌측 측면을 보호했다.

요크군은 전장에 도착한 뒤 역시 전투 대형을 형성했다. 선봉대는 에드워드 4세의 막내 동생인 18세의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지휘했다. 에드워드 4세 본인은 중앙 부대를 지휘했고, 윌리엄 헤이스팅스는 후방 부대를 지휘했다. 요크군에서 왼쪽으로 약 400야드 떨어진 곳에 울타리로 둘러싸인 튜크스베리 숲이 있었고, 숲 경계 안쪽에 기마 창병 200명이 포진해 측면 경비를 담당했다. 에드워드 4세는 이들에게 적군이 그쪽으로 공격하면 즉시 격퇴하고, 접근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행동하라고 지시했다. 그 후 그는 전군에 적을 향해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요크군 선봉대를 맡은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험난한 지형과 울타리 때문에 적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 같자 진격을 멈춘 뒤, 대포와 궁수를 동원하여 서머셋 공작의 우익 부대를 향해 집중 공격을 퍼부었다. 랭커스터군은 반격을 시도했지만, 그들의 포병은 요크군의 포병보다 실력이 부족한 데다 장기간 행군하면서 화약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대응하기 어려웠고, 이내 적군에게 압도당했다. 서머셋 공작은 적군이 퍼붓는 포탄으로 인해 많은 피해가 양산되자, 글로스터 부대에 대한 측면 공격을 개시하기로 했다. 그는 존 웬록에게 자신을 지원하라고 지시한 뒤, 요크군 좌익과 튜크스베리 숲 사이 지역으로 진격했다.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휘하 부대의 뱡향을 틀어서 서머셋 공작을 공격했다. 이리하여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튜크스베리 숲에 숨어 있던 요크군 기마 창병 200명이 오른쪽 측면에서 서머셋 공작을 공격했다. 여기에 존 웬록은 에드워드 4세가 이끄는 요크군의 나머지 군대로부터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서머셋 공작을 제대로 지원하지 못했다. 웬록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정면과 측면에서 동시에 요격당한 서머셋의 부하들은 혼란에 휩싸인 끝에 패주하기 시작했다. 일설에 따르면, 서머셋 공작은 전장을 떠나던 존 웬록과 마주친 뒤, 자신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은 그를 질책하고 철퇴로 웬록의 머리를 쪼개버렸다고 한다. 서머셋 공작의 군대가 무너지자, 다른 2개의 랭커스터 부대도 잇달아 붕괴했다. 랭커스터 장병들은 어떻게든 도주하려 했지만, 후방에 흐르던 강을 건너지 못한 자들이 추격병들에게 대거 살육되었다. 전장과 튜크스베리 수도원 사이의 지역은 훗날 '피의 초원'으로 알려졌다.

4. 결과

튜크스베리 전투는 에드워드 4세의 군사적 능력을 보여준 대표적인 전투로 여겨진다. 특히 전투 직전 정확한 전략적 판단과 빠른 기동으로 랭커스터파 군대가 웨일스에 도달하여 지원군을 받는 것을 성공적으로 차단하였고, 전투에서는 에드워드가 배치한 요크군 좌익의 별동대가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랭커스터군은 이 전투에서 2,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전투 도중과 전투 직후의 추격전에서 상실했다. 서머셋 공작은 추종자 15명과 함께 튜크스베리 수도원으로 도피했다. 수도원장은 에드워드 왕이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고는 수도원의 피난처에서 그들을 데려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왕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다음날 서머셋 공작과 그의 동료들이 수도원에서 나오자마자 체포한 뒤 약식 재판 후 처형했다.

파일:웨일스 왕자 에드워드의 살해.jpg
제임스 노스코트(James Northcote, 1746 ~ 1831) 작, <웨일스 왕자 에드워드의 살해>.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왕자는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 왕자는 패주 도중 적의 추격을 받고 사살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 왕자는 옛 동지였다가 에드워드 4세에게 가담한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무시당하고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클래런스 공작과 그의 부하들이 전투 후 숲속에서 슬픔에 잠긴 에드워드 왕자를 발견하고, 왕자의 간청을 무시하고 임시 방편으로 만든 블록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튜더 왕조 시기에 발간된 에드워드 홀의 <런던 대연대기>에 따르면, 에드워드 왕자가 체포되어 에드워드 4세와 클래런스 공작, 글로스터 공작 앞으로 끌려왔다. 에드워드 4세는 왕자를 정중하게 맞이하면서 왜 자신을 상대로 무기를 들었는지 물었다. 왕자가 도전적인 태도로 "나는 아버지의 유산을 되찾기 위해 당신에게 도전했다."라고 답하자, 에드워드 4세는 장갑을 낀 손으로 왕자의 얼굴을 때렸고, 글로스터 공작과 클래런스 공작이 검으로 왕자를 죽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인 <헨리 6세>에서 극화되어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이 이야기를 튜더 왕조가 요크 왕조를 잔인무도한 정권으로 매도하기 위해 지어낸 것으로 간주한다.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는 튜크스베리 전투 다음날 세번 강을 건너 탈출한 뒤 숲길을 따라 도주했다가 도중에 추격병에게 생포되었다. 그녀는 런던 탑에 수감되어 5년간 유폐되었다가 루이 11세가 몸값을 지불한 뒤 풀려났고, 앙주로 돌아가서 1482년 사망할 때까지 조용히 지냈다. 한편, '포콘버그의 서자'로 알려진 토머스 네빌이 1471년 5월 12일 ~ 5월 15일 런던 탑에 수감된 헨리 6세를 구출하기 위해 급습했지만 격퇴되었다. 헨리 6세는 그 직후 사망했는데, 정황상 에드워드 4세가 은밀히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리하여 랭커스터파는 와해했고, 에드워드 4세는 사망할 때까지 10여 년간 안정적인 치세를 누렸다. 그러나 반석 위에 오른 듯 했던 요크 왕조는 에드워드 4세 사후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조카 에드워드 5세를 폐위하고 리처드 3세로 등극하면서 또다시 혼란에 휩싸였고, 랭커스터 왕조의 마지막 잔당이었던 헨리 튜더가 이 기회를 틈타 요크 왕조를 상대로 도전하면서 보스워스 전투가 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