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guazhang
용형천수장(龍形穿手掌) |
1. 개요
중국 청나라 말기 탄생한 근대 중국권법. 흔히 태극권·형의권과 함께 3대 내가권으로 꼽는다.
팔괘장이란 이름처럼 특이하게도 대부분 기술이 주먹이 아니라 손바닥을 장법으로 구성된다. 다른 권법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특징이 여럿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주권(走圈)이라 불리는 팔괘장 특유의 단련법이다. 마치 탑돌이를 하듯 원을 그리며 계속 도는데, 거의 서서 도는 방식부터 아주 낮게 도는 방식까지 다양하다. '태극권은 투로에, 형의권은 삼체식에, 팔괘장은 주권에 (정수가) 다 있다.'고 할 만큼 팔괘장에서 강조하는 기본기이다. 오죽하면 주권만 3년을 연습해야 가까스로 팔괘장에 입문한다고 할 정도. 그 때문에 명성에 비해서는 의외로 전승자가 드문 무술이다.
독특한 보법과 영활한 몸놀림이 특징이다. 상대와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팔괘장 참고영상. 다만 이 영상은 우슈라 의식적으로 동작을 크고 예쁘게 하고 있다. 전통권은 좀 다르다. 팔괘장 안철균 관장을 보면 좋다.
팔괘장의 주권을 보고 빙글빙글 돌면서 싸우는 부드러운 권법이라는 인식이 강한데, 어디까지나 기본 수련일 뿐 실상은 다르다. 주권 수련을 통해 얻은 몸놀림을 갖고 싸우는 것이지 진짜 싸울 때 주권 돌거나 하진 않는다.[2] 막상 투로만 들어가도 강맹한 동작들이 많다.
컨셉이나 수풀이가 형의권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팔괘장 2대 전수자와 형의권사들의 교류가 많아 제자들의 교차 수련을 많이 했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한 예로는 산서형의에 반근공은 팔괘장의 주장과 유사하고 형의권의 동작 전환시 팔괘장의 구보와 파보를 동일하게 사용한다. 팔괘장은 통배권의 영향을 받았는데 대표적인 기술로는 천장이 있다. 2대 전수자들은 팔괘장 수련 이전에 배웠던 무술들과 기술이 섞이면서 다양한 기술과 병기가 결합되어 발전했다.
특이한 무기로 팔괘대도를 사용하는데 일반적인 유엽도를 크게 만든 형태이다. 비율까지 한손도인 유엽도 그대로 유지하는 바람에 칼날에 비해 자루의 길이가 짧기에 일본도 형태의 장도인 묘도와는 달리 두 손으로 운용하기 난감하며 때문에 동작에 한 손을 쓰는게 많다. 당연히 무게가 나가면 제대로 구현하기 힘들기에 얇은 철판 수준으로 만들어 거대한 크기에 비해 무게가 1kg 정도다. 모든 병기와 투로는 각각이 목적과 의미가 있다.
팔괘장의 제일 중요한 연공법인 주장만 3년이라는 말은 수련기간 동안 주장을 돌면서 기법과 공을 같이 닦으라는 뜻이지 딱 잘라서 3년을 돌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팔괘장뿐 만아니라 다른 무술도 마찬가지지만, 그 무술이 요구하는 기본적인 요구사항을 지키며 수련해야 제대로 된 성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각각의 수련자마다 노력과 체형 그리고 센스 등 개인차가 있기때문에 성취의 기간이 다를 수밖에 없다. 팔괘장도 중국무술의 4대병기 즉 도곤창검 등 병기술이 있고 특수병기가 다른 유파에 비해 많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자오원앙월과, 계조예 등이 있다. 팔괘대도의 수련은 팔괘장 신법과 공의 단련 목적이 크다. 모든 중국무술의 투로와 병기술의 수련은 각각의 특징과 그 수련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과문한 지식과 체험으로 다 알 수 가 없다.
2. 동해천의 생애
팔괘장은 허베이성 출신 무술가 동해천(董海川, 1797?-1882)[3]을 시조로 삼는 무술로 공식적인 역사는 중국 무술 중 매우 짧다.[4]통설에 따르면 동해천(董海川)은 1797년/1813년 중국 허베이성 문안현(文安县)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해(海)지만 후에 개명하여 해천(海川)이라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문무에 능했던 아버지에게 글과 무술을 함께 배웠는데, 소림권을 바탕으로 이런저런 무술을 익혔다. 장성하여 무술을 연구하기 위해 남쪽 지방으로 약 10여년 세월 동안 여행을 떠났는데, 이 과정에서 안후이성 구화산에서 배운 권법이 팔괘장의 원형이 되었다고 한다. 북경체육대학원 강과무(康戈武)는 연구를 통해 동해천이 여행 초기 번자권을 배웠고, 남방 도교의 단련법인 전천존(轉天尊)을 접한 뒤 주권을 도입하고, 팔괘 사상을 결합해 창안한 권법이라고 밝혔다.
동해천은 무술을 대성한 뒤 느닷없이 내시가 되어 왕부에 들어간다.[5] 이후 오랜 세월동안 무술과 무관하게 숙왕부에서 일을 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전국구 고수로 명성을 떨쳤다. 어느 날 숙왕이 친구들을 초청해 연회를 열었고 흥을 돋우기 위해 휘하 고수에게 무술 시범을 보이게 했다. 한참 관람하던 도중 차를 내오라고 했는데, 막상 동해천이 차를 내오자 몰려든 구경꾼들이 방해가 되어 숙왕에게 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한 손에 쟁반, 한 손에 차주전자를 들고서 훌쩍 담을 뛰어넘어서 차를 바쳤다. 숙왕은 이 광경을 보고서 비로소 동해천이 고수인 줄 알고 동해천에게 시범을 보이게 한 뒤 크게 만족하여 왕부의 경비를 맡겼다.
3. 동해천의 제자들
이후 동해천은 왕족도 가르치면서 유명세를 탔고, 왕부에 고수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문하생이 모여들었다. 동해천 사후 묘비에 이름이 오른 제자는 69명이다. 이 가운데 윤복(尹福)ㆍ정정화(程廷華)ㆍ송장영(宋長榮)ㆍ사계동(史計棟)ㆍ마유기(馬維祺)ㆍ유봉춘(劉鳳春)ㆍ번지용(樊志涌)ㆍ양진보(梁振蒲)를 8대 제자로 꼽는다.- 윤복: 별명은 수봉(오래 사는 봉황).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소림 나한장을 하다 후에 북경에 와 동해천의 제자가 되었다. 만두장사를 했으며, 청수한 모습에 피부가 희고 체형이 여자 같아 말라깽이 윤이라 불렸으며 공력이 비범했다. 팔괘장을 자기에 맞게 고쳐 우설장(소혓바닥 장)을 사용했다. 우설장은 엄지를 구부리고 네 손가락을 펴서 딱딱한 장을 사용한다. 후에 궁중에서 관리를 하며 많은 황족들에게 팔괘장을 가르쳤다. 1840년 생으로 69세로 사망했다. 원주를 소림권법 보법과 비슷하게 돌았다.
- 정정화: 별명은 응방(당연히 좋은 향기). 어려서부터 씨름을 배웠으며 북경에서 안경점을 했다. 동해천 제자 중에 공력이 가장 으뜸이며 동해천과 기세가 가장 비슷하다. 팔괘장의 원래 이름인 '무극권요신팔괘연환장'을 했으며 원주를 많이 돌았다. 용장(용의 할퀴는 발톱처럼 움푹한 손 모양의 장)을 사용했다. 팔형장을 낮은 자세로 연습했다. 원주는 동해천과 같은 탕니보를 했다. 정정화의 일화는 팔괘장에서는 가장 유명한 전설이다. 1900년 8월 14일 유럽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했을 당시 정정화는 독일군 부대에 단신으로 침입하여 맨손으로 수십 명을 살상했으나, 독일군의 집중 사격을 받아 사망했다. 1848년생으로 향년 52세였다.
- 사계동: 목공소를 했으며 여러 무술을 했다. 특히 발차기를 잘 했는데 동해천의 장법에 져서 제자가 되었다. 탕니보 외에 학보, 닭보 등 발을 높이 들며 원주를 했다. 동해천 딸과 결혼하여 만년에 동해천과 같이 살았다. 많은 무기술을 팔괘장에 접목시켰다. 장은 검지, 식지 두 개를 곧게 세우고 엄지를 동그랗게 했다. 1835년생 73세 사망.
- 양진포: 별명은 찬정(빛나는 팔각정). 동해천 만년에 사기동 집에 같이 거주하며 배웠다. 그래서 사파와 비슷하다. 제자 중에 가장 어렸으며 총명했고 공부를 잘해서 많은 것을 새롭게 창편해서 팔괘장을 세상에 잘 알렸다. 또한 무기술을 팔괘장에 접목시켰다. 1863년생 69세 사망.
- 장점괴: 본명은 아닌 듯하고 점괴라는 이름은 '점을 보는 기이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번개손이라는 별명을 지어 불렀다. 형의권을 배워 팔괘장과 접목시켜 형의팔괘장을 만들었다. 정정화 방식으로 연습하여 그 기세와 공력이 정정화에 근접했다. 그의 제자 중에 강용초가 1920년대에 상해에서 팔괘장 책을 펴서 팔괘장을 세상에 알렸다. 1859년생 80세 사망.
- 류덕관: 64수장(류씨직탕팔괘장). 64식은 원주를 돌지 않는 팔괘장 투로에서 예외적인 경우다. 동해천 시절부터 전해진 실전수법을 정리하여 직선투로로 해서 군대교습용으로 만든 것이다. 류덕관은 2대 제자. * 이진청: 음양 팔반장.
- 마귀: 성격이 기이하여 일생 혼자만 연습하고 제자를 두지 않았다 한다.
- 번지용: 별명은 번분자(성이 번씨인 미친 사람).
4. 계보
한 가지 재미있는 부분은 동해천 사후 팔괘장의 분파 과정이다. 어떤 무술이 파가 나뉘면서 '정통성' 문제가 불거지는 과정을 보면 스승의 사후 친족과 수제자가 '내가 친아들/수제자니까 제대로 배웠고 너님은 야매'하고 다투는 패턴이 흔하다. 그런데 동해천은 단기교습의 대가로, 제자를 받을 때도 생초짜뿐만 아니라 이미 무술을 익혀 나름대로 수준급이라 할 사람들도 다수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들에게 굳이 한 가지 가르침을 강제하지 않고 제자들의 경력에 맞춰서 가르쳤다. 그래서 제자마다 자신이 배운 대로 특징이 명확히 갈렸고 자연스럽게 파가 나뉘었다. 일례로 사계동은 발차기를 잘했기 때문에 사파 팔괘장은 다른 팔괘장에 비해 발차기 기술이 많으며, 정정화는 씨름을 해서 정파 팔괘장에는 씨름 기술이 있다.동해천이 거세한 내시라서 문파를 이어받을 친혈육이 없었다는 말도 있지만 오해. 동해천이 취직한 곳은 황궁이 아니라 왕부라서 굳이 거세를 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날 팔괘장의 양대 주류라면 윤복의 윤파 팔괘장과 정정화의 정파 팔괘장이다. 윤복의 후인으로 궁보전[6], 마귀 등이 유명했고, 정정화의 후인은 이문표ㆍ손록당[7], 양파 팔괘장 양진포의 3대 후인 이자명이 특히 명성을 떨쳤다. 이처럼 팔괘장은 팔괘문파의 장문인이란 개념이 아예 없고, 모든 교육과정을 다 마치면 X파 팔괘장 전인이 될 뿐이다.
이 외에도 음양팔괘장이란 무술도 있다. 전씨 가문에서 가내무술로만 이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팔괘장과는 투로나 움직임이 상당히 다르다. 팔괘장이 주로 단쌍환장과 팔괘연환장을 수련하는데 반해, 음양팔괘장은 동물의 형상을 본뜬 투로 8개가 있고, 제대로 수련한다면 투로 하나당 1년쯤 걸린다고 한다. 기본인 음양어장까지 합친다면 최소 9년은 수련해야 한다는 말이다.
음양팔괘장이 등장한 이후에 ‘동해천은 팔괘장의 창시자인가?’ 와 ‘동해천은 팔괘장의 시조가 아니다’ 는 논문이 무술잡지에 발표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음양팔괘장측의 하는 사람들이 낸 소문이었다.
이런 주장들은 북경팔괘장연구회의 간부인 강과무, 조대원, 저국용 등이 현지 조사를 통해 거짓임이 드러났으며 강과무는 ‘팔괘장 원류의 연구’ 라는 장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이 논쟁을 종료하였다. 현재는 음양팔괘장이 팔괘장 3대에서 갈라져 나간 사람이 최근에 창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5. 국내 전파
태극권이나 영춘권과 달리 각종 서브컬처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지명도가 낮았던 팔괘장이지만, 의외로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다. 화교를 통해 한국에 들어온 대표적인 중국무술인 소림권, 당랑권, 팔괘장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1953년 인천에 정착한 화교 노수전(盧水田)은 인천 차이나타운의 중국사찰인 의선당에서 아들 노수덕[8]과 유순화[9] 등 화교들에게 팔괘장을 가르쳤고, 이들에게 배운 한국인 제자들에 의해 인천을 중심으로 팔괘장이 보급되어 인천팔괘장으로 불리게 된다.
노수전이 생전에 자신의 계보를 중시하지 않아서 제자들은 귀동냥한 이름 몇몇과 자세를 놓고 어느 파 팔괘장인지 추측이 난무했다고 한다.[10] 여러 단서를 통한 추적 끝에 정정화 계열의 정파 팔괘장으로 밝혀졌다. 제자들은 노수전의 사부를 '이경오', '왕두' 로 알고 있었는데, 정정화의 제자 이문표의 호가 경무(敬武)였던 것.[11] 이문표의 소개로 역시 정정화의 제자인 왕종경에게 팔괘장을 수련하였고 왕종경의 별칭이 왕두이다. #
노수전의 화교(華僑) 제자로는 유순화 - 필서신(인천 정무문)으로 이어지는 계열이 있다.
한국인 제자로는 노수전에게서 배운 전대성과 박복남팔괘장이 유명하며 이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팔괘장을 전파하였다. 그리고 전대성의 제자인 인천 의산체육관 안철균동해천 묘역의 인천팔괘장비과 홍흔무술관의 신성일은 한국에서 인천팔괘장을 배우고 중국에 가서 더 배웠다. 자칭 노수전의 마지막 제자인 김상호-장정근팔괘검(호:의림)-노세준(용의무관)으로 이어지는 한국팔괘장보존회도 인천팔괘장의 계보를 잇는다. 노수전 노사는 영(永)자배, 아들 노수덕 유순화 전대성 박복남 등은 강(强)자배, 안철균 박정순 서중원 신성일 신성화 김상호 등은 예(藝)자배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김상호는 전대성의 다음 대수에 해당하며, 노수전 노사의 직계 제자 항렬이 아니다.
현재 중국 베이징에서도 팔괘장의 기본적인 원리를 따라 수련하면 팔괘장으로 보고있으며 동해천이 제자들에게 가르칠때 소림권을 수련하던 윤복과 솔각, 금나 수련하던 정정화에게 팔괘장을 가르치며 2대에서는 기존 수련했던 무술과 팔괘장이 혼합되 윤파 또는 정파 팔괘장의 특징이 생긴 것이므로 인천에 자리잡은 팔괘장은 기존에 장권계통을 수련했던 노수전이 팔괘장을 배우면서 정립된 팔괘장으로 국내에 전파되어 인천에서 수련하고 있는 인천 고유의 팔괘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팔괘장의 원리에서 벗어난 수련과 지도를 하는 계파는 팔괘장이라고 볼 수 없으며, 팔괘장에서 갈라져 나간 새로운 무술 분파로 보아야 한다. 노파팔괘장을 주장하는 분파는 인천 노수전 팔괘장 주류와 다르며, 노수전 팔괘장을 대표하지 않는다.
노파팔괘장은 팔괘장과 북파소림, 당랑권이 결합하여 분파한 새로운 무술로 보아야하며, 이미 팔괘장이 아니어서 노파의 주장대로 '노파권'으로 불러야 함이 타당하다. 노파팔괘장은 정통 동해천팔괘장도 아니고 인천 노수전 팔괘장도 아니며, 음양팔괘장처럼 팔괘장의 새로운 분파 인 셈이다. 현재 노파팔괘장 명칭을 사용하는 곳은 김상호[12]-장정근-노세준[13] [14] 분파이다. 인천팔괘장의 주류에서는 노파팔괘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한-중수교 이후 중국에서 배워온 사례도 있다. 양파는 서울팔괘장연구회 한병철ㆍ한병기, 대한팔괘장연구회 이만수[15], 부산 신룡무관의 백경로 관장, 김종윤태극권센터의 김종윤 관장[16]이 있다. 기타 정인 내가권 김정인[17] 그리고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북경 정파팔괘장 을 배운 송진헌씨와 이동준씨가 있으며 송진헌씨는 하남에서 형의팔괘장과 산서에서 송씨형의권도 학습을 하였다. 경기도 부천에 천진에서 고식정파팔괘장을 배워온 이백씨가 수련모임을 하고있다.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한 후 들어온 팔괘장은 거의 양파 팔괘장이다. 중국에서도 비주류인 팔괘장이 한국에서 이 정도면 제법 있는 것 아닐까? 현재 우리나라에 들어온 중국 전통권 중 태극권을 제외하면 팔괘장이 가장 크다.
연세대학교 원주미래평생교육원에서 전 박정순교수에게 팔괘장 강좌를 들을 수 있다. 박정순 교수는 노수전 노사 생전에 직접 배우고 함께한 제자이다.
음양팔괘장은 음양팔괘문의 정민영 노사 이 외에도 몇몇 전수자들이 있다고 알려졌지만 무슨 연유인지 대외적으로 나서지 않는 양상이다.
6. 관련 문서
- 격투기 무술 관련 정보
- 노수전 관련 정보(노수전 전기 수필)
https://blog.naver.com/bagua?Redirect=Log&logNo=221108611058
[1] [18][2] 엽문(영화) 2를 보면, 원탁 위에서 영춘권 사부 엽문과 대결하는 팔괘장 사부가 접전과 접전 사이마다 주권을 도는 모습이 보인다.[3] 보통은 동해천의 생년이 1797년이라고 하지만, 1813년이라는 설도 있다.[4] 다만 엄밀히 말하면 중국의 다른 무술 유파들도 무술의 체계는 고작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잡힌 것들이 많고 그 이전의 연원들은 불분명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이전의 연원들이 전해져 내려오는 유파라도 해도 신빙성이 있을만한 증거를 찾기가 어려운데, 애초에 창시했다는 인물이 실존한 인물인지 여부조차 불분명한 경우가 허다하다. 과거의 무술에서 이름만 빌려와서 유서깊은 무술이라고 하는 경우들도 있는데, 이에 비하면 오히려 팔괘장은 나름 그 연원과 계보가 명확한 편이라 실제적인 역사가 특별히 짧다고 볼수 없다.[5] 황궁이 아닌 왕부라 굳이 거세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내시 설은 와전된 것이 분명하다.[6] 만화 권아를 보신 분은 산동소패왕 에피소드에서 나오는 이 이름을 기억할 듯하다.[7] 내가삼권을 모두 배운 고수로 손식 태극권을 창안했다. 생전에 중국 무술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물급 인사였다.[8] 1933년생, 작고[9] 중국음식점인 대창반점 운영, 작고[10] 하지만 중국어를 못하는 한국제자들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설(說)일 뿐이다. 노수전은 1세대 화교라 한국어가 어늘함은 당연하지만, 중국 출신인데 설마 중국어를 못할까? 단지 한자에 어두웠을 뿐이다.[11] 무의 중국 발음이 오(wǔ)로 들린다.[12] 인천에서 원신팔괘도라는 무술을 창시하여 도장을 열었는데, 팔괘문의 이름을 걸 수 없었다고 한다.나중에 원신팔괘도가 노파팔괘장으로 개명을 한다.[13] 팔괘창술이라며 가르치는것은 팔괘창이 아니라 중국북파무술의 흔하디 흔한 '12연창'이며, 도법과 검법도 팔괘문의 것이 아니다. 팔괘장 기술도 팔괘와 타무술이 섞여있다. 다른무술을 가르치면서 팔괘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사람은 한마디로 팔괘장이 아니다.[14] 호구커플에 출연하여 호두쌍구를 들고 염호구와 대결하였으나,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무력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자신이 맞은것도 모르는 듯, 맞은후에도 상대를 계속 때리는 황당한 모습을 보여주어 시청자들의 비웃음을 샀다.[15] 2019년 암으로 별세[16] 김종윤 관장은 양파 이외에 윤파, 정파, 강용초계열의 형의팔괘장 등을 배웠다고 한다.[17] 아주 오래전에 왕수금의 일본인 제자인 사토 킨베이가 일본펜클럽 회장 자격으로 한국에 1주일 방문했을때, 김정인씨는 당시 중2였고 그때 몇시간 배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