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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럽 경력
1.1. AFC 아약스
유럽에서 알아주는 AFC 아약스의 유스출신으로 데뷔시즌 이미 네덜란드의 전설이였던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필두로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로날트 더부르, 에드가 다비즈, 클라렌스 세도르프, 에드빈 판데르사르, 마이클 레이저허르 등 당시 햇병아리 선수들과 함께 당시 최강팀이였던 AC 밀란을 꺾고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견인한다.[1] 클라위버르트는 이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고 전세계의 주목과 함께 특히 마르코 판바스턴의 은퇴 이후 다니엘 마싸로, 데얀 사비체비치로 만족하지 못해 반 바스텐의 후계자를 찾던 AC 밀란의 관심을 끌게 된다. 이후 두 시즌을 주전으로 활약하다 AC 밀란으로 이적한다.1.2. AC 밀란
당시 초특급 유망주로 꼽히던 에드가 다비즈, 옌스 레만와 함께 AC 밀란으로 향하는데 다비즈는 당시 최고의 딥 라잉 미드필더 였던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에게, 레만은 세바스티안 로시[2]에게 밀려 입지가 좋지 않았다. 입단 당시 마르코 판바스턴의 후계자로 주목을 받던 클라위버르트 역시 로베르토 바조, 조지 웨아등에게 밀려 후보 신세로 전락하자 불만을 품고 1년만에 팀을 떠나게 된다.[3]이후 같이 이적했던 에드가 다비즈와 옌스 레만도 한 시즌만에 AC밀란을 떠났다.1.3. FC 바르셀로나
결국 FC 바르셀로나로 헐값에 이적하여, 1년전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이적한 호나우두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최전방 공격수로 낙점된다.[4] 아약스 시절 자신을 이끌었던 루이 판할 감독과 재회하면서 드디어 기량을 만개하여, 히바우두, 클라위버르트, 루이스 피구라는 당시 상당히 강력한 공격진의 일원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다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운이 없었는지 팀을 떠날 때까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5] UEFA 유로 2000을 정점으로 슬슬 기량 하략이 눈에 띄었지만, 당시 바르샤는 루이 판할을 다시 기용하면서 히바우두와 세르히는 재계약을 포기하고 각각 AC 밀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자유계약으로 이적해버리고, 기껏 영입한 히카르두 콰레스마, 시망 사브로자, 후안 로만 리켈메 등은 이상한 포지션에 세우는 기행을 선보이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클라위버르트는 하비에르 사비올라와 투톱을 이루며 그럭저럭 스텟을 쌓아주었지만 전성기만큼의 임팩트는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바르샤는 2003-04 시즌 들어 판 할을 경질하고, 네덜란드 국대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클럽팀 감독 경험으로는 스파르타를 강등으로 인도한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임명하는 초 강수를 둔다. 레이카르트도 전반기에는 클라위버르트를 기용하였으나, 눈이 썩는 경기력으로 부진하는 모습을 보여주다 결국 사비올라에게 주전경쟁에서 밀린다.[6] 시즌이 끝나고 2004-05 여름 이적시장에서 마요르카의 떠오르던 공격수 사무엘 에투의 영입으로 결국 팀을 떠나게 된다.[7] 바르셀로나 시절 기록은 182경기 90골로 경기당 약 0.5골 꼴.1.4.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클라위버르트의 새로운 안식처는 2000년대 초반 매년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노리던 프리미어 리그 상위권 팀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였다. 비록 직전 시즌 바르샤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주전에서 밀리는 등 부침이 있긴 했지만 맨유에서 뛰던 판니스텔로이를 밀어낸 부동의 네덜란드 원톱 스트라이커였고, 아직 나이도 20대 후반으로 젊었던지라 대부분 지난 시즌의 모습은 일시적인 부진으로 보았기에 클라위버르트의 영입이 성사되자 팬들과 언론의 기대는 대단하였다. 심지어 아스톤 빌라 원정 경기에서는 홈팀 빌라의 꼬마 팬들이 상대팀 선수인 그에게 사인을 받을 정도였으니 뉴캐슬 팬들의 기대는 더 대단했다.위에서 언급된 아스톤 빌라와의 리그 4차전 원정 경기에서 전반전에 동점골을 집어넣으면서 리그 첫 번째 득점을 터트렸고[8], 순조롭게 적응 할 수 있을 듯 했으나..
뉴캐슬은 아스톤 빌라전 종료 후 성적 부진 및 선수단 관리 실패 등을 이유로 클라위버르트를 데려왔던 바비 롭슨 감독을 경질하고 막장 감독으로 유명한 그레이엄 수네스를 선임했는데.. 이후 경기력, 성적, 팀 분위기[9]가 모두 개판으로 치닫는 막장 상황이 되어 버린데다 클라위버르트 본인도 리그 적응 실패, 부상 및 부진이 겹치면서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 하고 리그 25경기 6골로 직전 시즌처럼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10]당시 뉴캐슬의 상태가 워낙 막장이었기에 리그 최다 득점자가 벨라미[11]와 시어러의 7골일 정도로 빈공에 시달려서 클라위버르트는 리그 6골로도 팀 내 득점 2위에 오르긴 했으나 시즌 초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리그 탑급 공격수로서의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못했기에 한 시즌 만에 발렌시아 CF로 이적하게 된다. AC 밀란 시절 이후 최대의 흑역사였지만 이건 서막에 불과했다. 이 시절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배경으로 한 영화 Goal이 촬영되어서 영화에 그의 득점장면도 나온다.
1.5. 발렌시아 CF
이미 기량이 하락한 클라위버르트를 영입한 구단은 발렌시아 CF였다. 하지만 이때부터 완전히 유리몸으로 전락하면서 시즌의 대부분을 부상으로 날려버렸고, 출장한 경기들에서도 별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당시 떠오르던 신예 다비드 비야에게 완전히 밀려버려 10경기 1골을 기록하는데 그치는 최악의 커리어를 기록하고 1년 후 다시 팀을 떠나게 된다. 이때의 실책으로 2006 독일 월드컵 참가가 물거품이 되었다.1.6. 이후
이후 2006-07 시즌은 네덜란드로 복귀하나 아약스가 아니라 아약스의 라이벌인 PSV에서 뛰었고, 2007-08 시즌을 프랑스의 릴 OSC에서 보내나 이때도 계속 된 부상 및 부진으로 인해 각각 리그 3골과 4골이라는 전부 기대 이하의 활약을 보이며 쓸쓸하게 은퇴하게 된다. 특히 PSV 시절 자신의 친정팀이라고 할 수 있는 아약스와의 홈경기에서 골을 넣었으나 당시 경기에서 팀이 지고 있던 상황 탓도 있고(당시 결과는 1-5로 PSV가 패배) 그다지 기뻐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아약스 팬들에게 묘한 느낌을 주기도. 전성기 시절 전 세계를 호령했던 스트라이커의 말년이 이렇게 허무할줄 누가 알았는가. 동갑내기 판니스텔로이가 2006-07 시즌 레알 마드리드에서 피치치를 수상하고 UEFA 유로 2008에 참가하는 등 계속 멋진 활약을 보인 것과는 대조적이다.2. 국가대표 경력
뤼트 판니스텔로이, 로이 마카이 등 네덜란드의 쟁쟁한 스트라이커들이 등장하기 전 유로 2000까지는 세컨드 스트라이커 데니스 베르캄프와 콤비를 이룬 부동의 원톱 스트라이커였다. 통산 79경기 40골로 로빈 반 페르시가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네덜란드 국가대표 최다 골 기록 보유자였다. 이후 휜텔라르도 클라위버르트의 득점 기록을 경신하면서, 현재는 네덜란드 국가대표 3위의 골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UEFA 유로 1996에서는 부상으로 거의 뛰지 못하다가 조별리그 3차전이었던 잉글랜드전에서 골을 넣는 평범한 활약을 보였다.[12]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첫 경기 벨기에와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 벨기에 수비수 스탈렌스의 '강간범'이라는 욕설에 분을 참지 못하고 팔꿈치로 가슴을 가격해 퇴장을 당하는 바람에 조별리그 2차 한국전에 출전하진 못했으나 8강 아르헨티나전과 4강 브라질전에 연속 골을 넣으며 존재감을 과시했다.[13] 당시 한국의 방송이나 신문지상에서는 주전공격수인 클라위버르트가 한국전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네덜란드와 해볼만 하다라는 정말이지 상상하기 힘든, 그야말로 드립을 치기도 했을 정도였다.[14] 이후 클라위버르트는 UEFA 유로 2000에서 유고슬라비아전 해트트릭 포함, 5골을 넣어 공동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4강전에서 프란체스코 톨도가 지키는 이탈리아를 뚫지 못하고 그만 탈락하고 말았다. 이후 2002년 월드컵은 예선 탈락해 버렸고,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한 UEFA 유로 2004 때는 국대 승선은 했으나 딕 아드보카트가 그를 여러 가지 문제로 기용하지 않아 결국 UEFA 유로 2004가 마지막 국대가 되었다. 그리고 몇달 후인 2004년 10월, 데니스 베르캄프가 가지고 있던 네덜란드 대표팀 최다 득점 기록(37골)을 갈아치웠으나,[15] 이 해가 클라위버르트가 국가대표로 뛴 마지막 해였다.
3. 플레이 스타일
튼튼한 몸싸움과 터프한 플레이로 최전방을 초토화시키던 스트라이커로 전성기 시절 헤더와 타겟맨으로써 골 결정력은 물론이고 상대 센터백을 몸싸움으로 괴롭히는 터프한 플레이에 능했다. 이 때문에 센터 포워드나 전통적인 투 톱의 빅 타겟으로도 모두 활용할 수 있었다. FC 바르셀로나에서는 우측 루이스 피구,좌측 히바우두 두 윙포워드의 공간을 확보하고 찬스를 골로 만드는 원톱 플레이를 주로 했고, 네덜란드 국가대표에서도 같은 원톱 롤을 소화했다. 바르셀로나가 잠깐 라도미르 안티치 감독이 들어와서 4-4-2로 전환했을때도 하비에르 사비올라와 함께 투톱으로 나서서 제 역할을 해냈다. 한마디로 만능 공격수. 심지어 양발에 중거리 슛 역시 위협적이였다.1990년대 후반까지는 원톱으로써 기량이 출중해서 뤼트 판니스텔로이, 로이 마카이, 피에르 판호이동크, 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 등의 출중한 스트라이커를 전부 밀어버렸던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부동의 원톱이다. 이 당시 로이 마카이는 라리가의 득점왕 출신이다. 하셀바잉크, 판니스텔로이는 EPL 득점왕 출신이었다.[16] 그리고 판호이동크는 리그 수준이 약간 떨어져 있어도 에레디비시에서 득점왕을 석권한 선수다.
[1] 이 우승을 마지막으로 아약스는 현재까지 챔스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감독은 이후 바르셀로나, 바이에른 뮌헨등에서 성공적인 감독생활을 했으나 특유의 똥고집으로 최악의 결과를 도출시키고 항상 경질된 루이 판할였다. 그 중 압권은 히바우두를 왼쪽날개로 고정시켜 버린 것이었다. 요즘 축구판으로 따지면 리오넬 메시를 왼쪽 윙포워드만으로 출전시키는 정신나간 짓을 벌였다고 비유할 수 있다.[2] 밀란 제너레이션 시절의 주전 골키퍼. 클럽에서의 위용과 다르게 국가대표에서는 시대별로 디노 조프, 잔루카 팔리우카, 잔루이지 부폰 등에게 밀려서 인지도가 낮은편.[3] 세리에 A 경기는 당시는 18팀 34경기 체제였는데 클라위버르트는 26경기를 출전하여 7골을 넣었다. 어린 선수치고 적지 않은 골을 넣었지만 팀의 레전드인 판바스턴의 후계자이자 즉시 전력감으로 데려온 선수치곤 실망스러웠다, 이후 밀란은 2년 후에 안드리 셰브첸코를 영입하고 나서야 판바스턴 이후 확고한 주전 스트라이커를 손에 넣는다.[4] 호나우두의 후계로 영입된 선수는 히바우두지만 상기했다시피 판 할감독은 히바우두를 왼쪽 윙포워드로 고정시킨다.[5] 바르셀로나의 대외컵 암흑기 시즌은 드림팀 1기 말년이던 1994년도 AC 밀란에게 결승전에서 4:0으로 떡실신 당한후부터 2004-05 시즌 전까지 계속 유지된다. 심지어 클라위버르트 합류 전 시즌에는 솁첸코에게 농락당하며 예선에서 떨어지는 수모까지 겪는다.[6] 참고로 사비올라는 빅&스몰의 투톱 스트라이커로 바르샤식 4-3-3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수이다. 이런 타입의 선수에게 밀렸다는 것은...[7] 이 직후 4-3-3 전술을 채용함으로써 투톱 전문인 하비에르 사비올라 역시 임대를 전전한다. 사비올라의 경우 팀을 제대로 잘못 만나 망한 케이스지만.[8] 경기는 이후 뉴캐슬이 3골을 더 허용하며 2:4로 패배했다.[9] 당시 뉴캐슬에는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닌 선수들이 다소 있었으나 롭슨 감독이 해당 선수들에게 아버지 소리를 들을 정도로 통제하고 있었기에 자잘한 트러블들이 자주 터지거나 팀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들은 있어도 심각한 문제가 터지진 않고 어떻게 유지되고 있었으나, 롭슨 감독이 경질 당한 후 후임으로 온 수네스가 특정 선수들을 일방적으로 팀에서 배제하거나 엉뚱한 포지션으로 기용하는 등의 상황이 벌어지자 해당 선수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기 시작했고.. 나중엔 하다하다 리그 경기에서 같은 뉴캐슬 선수들끼리 서로 주먹을 날리며 싸움이 일어나 상대팀 선수가 말릴 정도로 막장이 되었다.[10] 그나마 컵대회에서는 좀 달라서 FA컵 16강에서 쿼드러플에 도전했던 무리뉴 1년차의 첼시를 상대로 1-0 승리를 이끄는 결승골을 성공시키고 8강전에선 토트넘을 상대로 선제 결승골을 뽑아내는 등의 모습을 보였고, UEFA컵에서는 1차 예선에서 4골을 뽑아내는 등의 모습을 보여서 시즌 37경기 13골로 시즌 두 자릿수 득점은 달성할 수 있었다.[11] 수네스와의 불화로 인해 반 시즌만 뛰고 겨울 이적시장에서 셀틱으로 임대 이적 했다.[12] 물론 이 득점은 네덜란드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득점이었다. 클라위버르트의 이 골이 만회골이었는데, 만약 이 골이 없었다면 네덜란드는 스코틀랜드에게 득실차에서 밀려 토너먼트에 진출하지도 못할뻔 했기 때문이다.[13] 물론 4강 브라질전에서는 무수한 찬스들을 날려 먹었다. 그나마 동점골을 넣어 위안을 삼아야했다.[14] 당시 한국 경기에 뛰지 않아서 한국에서는 네덜란드 부동의 국대 스트라이커라는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라는 말은 사실과는 다르다. 신문기사만 검색해봐도 알 수 있지만, 이미 1998년 즈음에는 유럽 축구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쌓여가는 시기였다. 당시에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의 세부적인 사항들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AC 밀란이라는 명문팀에서 뛰는 클라위버르트가 데니스 베르캄프와 더불어 주전 투톱이고, 클라렌스 세도르프가 미들의 핵이라는 사실은 국내에 잘 알려져 있었다. 다만, 우리가 그들과의 격차를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15] 클라위버르트의 최종 네덜란드 대표팀 기록은 40골.[16] 그러나 판니스텔로이가 득점왕을 먹은건 02-03 시즌이며 클라위버르트는 하향세를 타고 있었다. 즉 판니스텔로이가 전성기에 들어서기 시작한 시점과 달라서 반니를 그냥 묻어버렸다고 보기엔 무리가 조금 있다. 그냥 UEFA 유로 2000까지 부동의 주전이었다고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