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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2:03:45

팅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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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페루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2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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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lba de Pádua Lima.jpg
이름 에우바 지파두아 리마 "팅"
(Elba de Pádua Lima "Tim")
생년월일 1915년 2월 20일
사망년월일 1984년 7월 7일 (향년 69세)
국적 파일:브라질 국기(1968-1992).svg 브라질
출신지 브라질 합중 공화국 하파이나
포지션 포워드
신체조건 171cm | 68kg
소속팀 보타포구 FC (1931-1933)
SC 코린치안스 (1933)
포르투게자 산치스타 (1934-1936)
플루미넨시 FC (1936-1943)
나시오날 (1944)
상파울루 FC (1945-1947)
보타포구 FR (1947)
올라리아 (1947)
보타포구 FC (1947-1949)
아틀레티코 후니오르 (1950-1951)
국가대표 16경기 1골 (1936-1944)
감독 올라리아 (1947)
보타포구 FC (1947-1949)
아틀레티코 후니오르 (1950-1951)
방구 AC (1951)
방구 AC (1953-1956)
CA 페호비아리우 (1957-1958)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 (1959)
방구 AC (1959-1960)
과라니 FC (1961-1963)
방구 AC (1963-1964)
플루미넨시 FC (1964-1967)
CA 산 로렌소 (1967-1968)
CR 플라멩구 (1969)
CR 바스쿠 다 가마 (1970)
코리치바 FC (1971)
보타포구 FR (1972)
코리치바 FC (1973)
산투스 FC (1974-1975)
과라니 FC (1975)
EC 비토리아 (1975-1976)
아메리카 FC (1977)
콜로라두 EC (1978)
코리치바 FC (1979)
방구 AC (1980)
상조제 EC (1981)
페루 대표팀 (1981-1982)
AA 인테르나시오나우 (1983)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생활2.3. 감독 생활2.4. 사망
3. 스타일 & 평가
3.1. 선수3.2. 감독
4. 수상
4.1. 선수
4.1.1. 클럽4.1.2. 국가대표
4.2. 감독

[clearfix]

1. 개요

브라질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1]

2.1. 어린 시절

에우바 지파두아 리마는 1915년에 히파이나(Rifaina)의 한 농장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철도 공무원이었다. 어렸을 때 팅의 가족들은 그를 티(Ti)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1923년에 티는 아버지를 잃었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라면서 히베이랑 프레투(Ribeirão Preto)의 길거리 축구를 즐겼다. 그러다 티는 축구에 대한 재능을 발견하게 되었고 티의 별명이 팅(Tim)으로 바뀐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28년, 12살의 팅은 히베이랑 프레투를 연고지로 하는 축구팀인 보타포구 FC에 입단하면서 본격적으로 축구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유소년팀에서 두각을 나타낸 팅은 성인팀에 승격되었고 1934년에 포르투게자 산치스타로 이적했다. 포르투게자 산치스타에서 팅은 실력을 더욱 끌어올려 1936년에는 파울리스타 대표팀[2]에 선발되었고 이스타지우 상자누아리우[3]에서 2대0으로 파울리스타 대표팀이 승리하는데 공헌했다.

1936년에 팅은 플루미넨시 FC로 이적했고 플루미넨시는 5차례의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우승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구가했으며 특히 호메우와의 콤비 플레이가 유명했다.

1943년에 플루미넨시를 떠난 팅은 저니맨 커리어를 보냈지만 상파울루 FC에서 2번 더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챔피언이 되었다. 팅은 1947년, 올라리아에서부터 선수 겸 감독이 되어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2.2.2. 국가대표

팅의 셀레상 데뷔전은 1937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개막전이었던 페루전이었다. 이 대회에서 팅은 El Péon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전당포 주인처럼 브라질 팀원들을 이끌어서 붙은 별명이라고 한다. 팅은 이 대회에서 브라질의 6경기에 모두 출전했지만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다.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와 비겨도 우승을 차지하게 되는 유리한 상황이었지만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에 패해 아르헨티나와 다시 최종전을 치러야 했고, 최종전 연장전에서 또 발목을 잡히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팅은 1938년 월드컵에 셀레상의 일원으로 참가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재경기만 출전할 수 있었다.

팅은 그 이후 1940년의 훌리오 로카 컵과 1942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출전했고 브라질 대표팀에서 총 16경기 출전, 1골을 기록했다.

2.3. 감독 생활

1951년에 아틀레티코 후니오르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한 팅은 자신이 스승으로 여기던 온디누 비에라(Ondino Vieira)의 뒤를 이어 방구 AC의 감독이 되었다.

팅은 방구 AC 이외에도 많은 팀들을 지도했지만 플라카르에 의하면 팅의 지도력은 방구 AC에서 가장 빛났다고 한다. 하지만 팅의 감독 생활에서 첫 우승은 1964년 플루미넨시 FC 시절에서야 찾아왔다. 그리고 그의 감독 커리어 최고의 순간은 아르헨티나CA 산 로렌소의 메트로폴리타노 무패 우승이었다.

1981년, 팅은 스페인 월드컵 지역 예선을 앞둔 페루 대표팀을 맡아 본선에 진출시켰다. 당시 페루는 테오필로 쿠비야스, 엑토르 춤피타스 등 스타 플레이어들이 많이 배출된 역대 최강의 시절이 끝나고 조금씩 내려오던 팀이었다. 전성기의 페루는 1970년1978년에 월드컵 본선 진출, 1975 코파 아메리카 우승 등 쏠쏠한 성과를 거두던 팀이었지만 1982년 월드컵 개막 무렵의 페루는 사정이 달랐다. 수비의 핵 춤피타스는 만 39세로 이미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고 쿠비야스도 선수 생활의 황혼기에 접어드는 33세 노장이었지만 그들을 대체할 후배들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4] 페루는 A조 최하위, 최종 성적 20위로 탈락했다.

2.4. 사망

팅은 1984년, 간부전과 위출혈로 사망했다. 그의 관은 플루미넨시 FC의 깃발에 덮여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3. 스타일 & 평가

3.1. 선수

선수 시절 팅의 장기는 드리블이었다. 상파울루의 지역 신문 폴랴 지상파울루(Folha de S.Paulo)에서는 "가린샤에 비견될만한 쉽고 알랑거리는 드리블러"라는 평을 내린 적이 있다.
10여년간을 그와 같이 뛰면서 그가 실수한 것을 본 기억이 없다.
도밍구스 다기아
지능적이고 뛰어난 위치 선정, 뛰어난 드리블러, 예측불허의 패스, 효율적인 골게터
마르셀루 두아르테

3.2. 감독

팅은 자신이 지도하는 선수들과 잘 지내는 덕장 스타일의 감독이었다. 때때로 내부 결속이 잘 안 된다는 비판이 있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 선수들이 그를 존경해서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플라카르에서는 그를 브라질 축구 역사상 최고의 전략가로 소개한 적도 있고 선수들에게 전술을 가르치기 위해 버튼식 작전판을 종종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우리가 그(팅)에 대해 말할 때 항상 그는 발명가, 전략가라고 이야기해야 했다.
그는 브라질 축구계에 에이리어 헤더를 도입한 선구자였다. 라이트 윙이 골라인 근처에 가서 크로스를 올리는 대각선으로 상대의 진영에 돌파해 들어가서 골을 넣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도 바로 그였다. 아마 버튼과 이야기하면서도 미친 사람 취급 받지 않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축구의 선생이었고 교수였다.
아데미르

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4.1.2. 국가대표

4.2. 감독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상파울루 주 대표팀.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 A가 창설되기 이전엔 정기적으로 히우지자네이루 주 대표팀과 시합을 가졌다.[3] CR 바스쿠 다 가마의 홈구장으로 현재도 사용하고 있다.[4] 그 둘에 비견될 만한 후배들은 페루에서 지금까지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