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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30 23:44:17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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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드툴루즈로트레크[1]
Henri de Toulouse-Lautrec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hotolautrec.jpg
본명 앙리 마리 레몽 드툴루즈로트레크몽파
(Henri Marie Raymond de Toulouse-Lautrec-Monfa)
출생 1864년 11월 24일
사망 1901년 9월 9일 (항년 36세)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신장 152cm[2][3]
가족 아버지 알퐁스 드 툴루즈로트레크
어머니 아델 드 툴루즈로트레크
남동생 리샤르 드 툴루즈로트레크
직업 화가
사조 탈인상주의

1. 개요2. 생애3. 창작물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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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화가. 탈인상주의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몽파는 1864년, 남프랑스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인 툴루즈 가문[4][5] 출신의 알퐁스 샤를 드 툴루즈로트레크몽파(Alphonse Charles, Count of Toulouse-Lautrec-Monfa, 1838~1913)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뼈가 극히 약했던[6] 그는 14살에 의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다리의 성장이 평생 멈춰 버리는 장애를 갖게 된다. 때문에 사진에서 볼 수 있다시피 엄청난 단신이었는데, 한번은 술집에서 스케치를 하다가 연필을 놓고 가려고 하자 옆에서 술마시던 손님이 "무슈, 지팡이 두고 가셨구려"라며 조롱하는 일도 있었다고. 그런데 오히려 로트레크가 더 크게 빵터지며 웃었다고 한다.

때문에 그의 아버지, 툴루즈로트레크 백작은 앙리가 어렸을 때 부터 그를 없는 아들 취급하였고 이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마음 고생이 심했다. 그나마 앙리의 어머니 아델(Adèle Zoë Tapié de Celeyran, 1841~1930)이 앙리를 열심히 돌봤기에[7] 어머니와는 관계가 매우 좋았다. 장애 때문에 외부 활동을 거의 할 수 없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재능을 보였던 예술 활동에 몰두한다. 어머니의 후원으로 당대 파리의 거장 화가였던 레옹 보나(Leon Bonnat)에게서 예술 교육을 받은 이후 몽마르트 언덕에 정착한다.

어머니와 달리 아들을 무시했던 아버지는 아들이 화가로 유명해질 무렵에 찾아와서는 집에 두었던 그의 여러 그림들을 태워버리기까지 했다. 당연히 앙리는 아버지를 증오했고 대화도 하지 않았다. 이래놓고 사후 아들의 작품들이 루브르 박물관에 진열되자 그제서야 아들을 인정한다고 우디르급 태세 전환을 선보였고 당연히 어머니는 이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 시기 고흐와 교류[8]를 갖기도 하면서 후기 인상주의 예술가들의 서클에 활발히 참가하던 그는 물랑 루즈의 포스터를 그려주면서 생계비를 유지하는 한편[9] 무용수성매매 여성들을 그리면서 소외받은 아픔과 신체 장애에 대한 한을 달랬다.[10] 이와 같은 도시 하층 계급 여성들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을 놓고 훗날 앙리의 동료 에두아르 비야르(Eduardo Vuillard, 1868~1940)는 "귀족적인 정신을 갖췄지만 신체에 결함이 있던 그에게 신체는 멀쩡했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한 매춘부들이 묘한 동질감을 줬을 것이다."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매춘과 더불어 앙리의 삶에 위안이 되어줬던 것은 술이었다. 그것도 압생트와 같은 독한 술을 즐겨 마셨다. 그냥 마시는 것도 아니라 술에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이것저것 섞어 마시는 스타일. 그러다 개발한 게 독하기로 소문난 칵테일 어스퀘이크. 결국 잦은 폭음은 그의 건강을 빠르게 해치게 된다. 게다가 매춘에서 얻은 매독까지 더해지면서 결국 툴루즈는 1901년 9월 9일, 만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유언은 "Le vieux con!"(바보 같은 노인네). 툴루즈가 배우자와 자녀 없이 사망한데다, 남동생 리샤르(1867~1868)도 어린 시절 요절했으니 아버지의 작위였던 툴루즈로트레크 백작위는 단절되었다. 어차피 1870년 프랑스 제2제국 멸망 이후 프랑스는 쭉 공화정이었던지라[11] 이름뿐인 지위[12]는 의미는 없겠지만.

그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던 그림상 모리스 조이앵(Maurice Joyant, 1864~1930)은 그가 죽자 그를 기리며 로트레크 미술관을 세웠으며 어머니도 여기에 많은 돈을 내면서 도와 아들의 이름을 남기고자 노력했다.

3. 창작물

4. 여담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또한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2] 증거[3] 142cm라는 말도 있다. 근거: https://driehausmuseum.org/blog/view/tragedy-brilliance-the-life-of-henri-de-toulouse-lautrec[4] 더 정확히는 툴루즈 가문의 분가인 툴루즈로트레크 가문 출신이었다.[5] 툴루즈 가문은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대제의 열두 동료(Charlemagne's twelve peers)로 불리던 프랑스 최고의 대귀족 가문이었고 그들의 수장인 툴루즈 백작은 한 때 남프랑스의 1/3을 지배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지닌 영주였다. 그렇게 강력했던 툴루즈 가문이 왜 공작 가문이 아닌가 하면 그 당시만 해도 작위 인플레가 시작되기 전이라 공작이 그리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서유럽의 작위 체계는 단순하게 공작(Duke)-후작(Marquis)-백작(Count)-자작(Viscount)-남작(Baron)으로 서열을 구별하기엔 굉장히 복잡한 면이 많다.[6] 이는 서유럽 귀족가문 특유의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적 질환으로 추정된다.[7] 앙리가 사망할 때도 그의 어머니가 곁을 지켰다.[8] 후에 성격차이로 멀어졌지만 고흐의 그림을 모욕하는 사람과 결투를 신청하고 같이 전시회를 하기록 약속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9] 다만 원체 뼈대있던 집안인지라 굳이 포스터를 안그려도 생계 유지에는 애로사항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개무시하니 정신적 고통은 더욱 심해서 집을 나와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10] 아이러니하게도 나중에 물랑 루즈가 크게 번창하면서 물관리 명목으로 그를 내쫓는다.[11] 물론 프랑스 제2제국 멸망 직후인 1870년대에 부르봉 본가의 앙리 5세나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의 필리프 7세를 옹립하려는 여러 시도는 있었다. 툴루즈로트레크의 사망 시점에도 과거보다 힘이 줄었지 복고여론과 의석이 상당수 있긴 했다. 허나 제대로 힘을 써보기도 전에 양차대전이 쐐기를 박아서 영영...[12] 그나마 툴루즈로트레크의 사망 시점에는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구 귀족들을 예우상으로나마 작위를 붙여서 불러주기는 했다. 이 조치는 1970년대 데스탱 때 폐지되었다.[13] 수상은 하이 눈게리 쿠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