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38><colcolor=#fff> 호주 자치령 제10대 빅토리아주 경찰총장 토머스 블레이미 Thomas Blamey GBE, KCB, CMG, DSO, CStJ, ED | ||
본명 | 토머스 앨버트 블레이미 경 Sir Thomas Albert Blamey | |
출생 | 1884년 1월 24일 | |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호주 식민지 뉴사우스웨일스주 와가와가 | ||
사망 | 1951년 5월 27일 (향년 67세) | |
호주 자치령 빅토리아주 하이델버그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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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와가와가 문법학교 | |
복무 | 호주 자치령 육군 (1906~1950) | |
최종 계급 | 원수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
재임기간 | 제10대 빅토리아주 경찰총장 | |
1925년 9월 1일 ~ 1936년 7월 9일 |
1. 개요
호주의 군인.2. 생애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소규모 동네 와가와가 출신으로 오스트레일리안 풋볼 선수로 활동했다. 학교를 졸업 후 교사로 생활하다가 1906년 호주 자치령 장교 후보생과정을 수료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1910년 대위로 진급하고 영국, 인도에서 복무했다. 1914년 소령으로 진급했다.1차 대전이 발발하자 전쟁부 정보부서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윌리엄 브리지스 소장이 지휘하는 호주 원정군 제1사단 소속이 되어 이집트로 향했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제임스 매케이 대령을 구원하는 공을 세웠다. 1915년 사단 정보참모로 있었고 중령으로 진급해 제2사단 병참참모로 지냈다.
이후 서부전선으로 이동해 포지에르 전투에서 포지에르를 점령한 공으로 훈장을 받았고 대령을 거쳐 임시계급 준장까지 올라 존 모나시 중장 휘하 호주군 참모장이 되었다. 전쟁 후반 힌덴부르크선을 돌파하는데 공을 세웠다.
전후 귀국해 육군본부 작전부장을 지내고 참모차장을 거쳐 제국참모본부 호주 대표로 참가했다. 빠른 진급 속도를 보이며 호주 자치령군 내에서 질투를 많이 받았다. 1925년 빅토리아 경찰청장으로 임명되었다. 다만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폭력적이고 무자비하게 진압해 비판을 많이 받았고 1936년 사임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하고 중장으로 진급했고 제1군단장이 되어 팔레스타인을 거쳐 중동사령부 소속이 되었다. 그리스 침공이 시작되자 그리스로 투입되어 추축군과 전투를 치렀고 북아프리카 전선 당시엔 리비아에 배치되어 전투를 치렀다. 다만 뛰어나고 과감한 군사적인 능력에 비해 부하들을 너무 가혹하게 대한다는 평을 받았다.
토브룩 전투 직전 호주로 돌아왔고 더글러스 맥아더가 있던 남태평양 전선에 투입되었다. 당시 코코다 트랙 전투를 지휘하던 제7사단장 아서 앨런을 해임했고 맥아더와 미군 수뇌부들과 갈등이 심했다. 다만 전장에 대해 세부적으로 파악해 물자와 병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했고 무모한 공격을 자제하며 피해를 최소화했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의 항복조인식에 호주 대표로 참석했다. 참전 군인의 복지에 힘쓰다가 1950년 호주군 최초로 원수로 진급했다.[1] 1년 뒤 뇌출혈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