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토니 스콧 Tony Scott | |
본명 | Anthony David Leighton Scott 앤서니 데이비드 레이턴 스콧 |
출생 | 1944년 6월 21일 |
영국 잉글랜드 노섬벌랜드주 타인머스[1] | |
사망 | 2012년 8월 19일 (향년 68세)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빈센트 토머스 대교 | |
국적 | 영국 |
직업 | 영화감독 |
신체 | 169cm |
활동 | 1969년-2012년 |
형제자매 | 형 프랭크 스콧[2] 형 리들리 스콧(1937년생) |
배우자 | 게리 스콧(1967~1974) 글리니스 샌더스(1986~1987) 도나 W.스콧(1994~2012 토니 스콧 사망) |
자녀 | 아들 맥스 스콧(2000년생) 아들 프랭크 스콧(2000년생)[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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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할리우드에서 활약한 영국 출신 영화 감독. 'SF의 거장'으로 유명한 영화 감독 리들리 스콧의 동생으로, 제작사 '스콧 프리 프로덕션'을 공동 창립하기도 했다.2. 경력
1970년대 영국 영화 암흑기에 형 리들리 스콧, 휴 허드슨, 앨런 파커와 함께 리들리 스콧 연합RSA으로 활동하면서 영국 광고계에서 발굴된 신인 감독 4인방 중 하나였다.작품들을 보면 알겠지만 형 못지않게 굉장한 실력을 지닌 영화 감독으로, 흥행성적은 오히려 이쪽이 더 좋은 편이다. 여러 장르에 걸쳐 다양한 영화를 만든 형과 달리 주로 현대를 배경으로 한 액션 스릴러 영화들을 만들며 대중적으로 더 어필했기 때문인 듯. 그래서 당대 최고의 흥행 제작자였던 제리 브룩하이머와 주로 함께 활동했다.
하지만 비평 면에선 형이 크게 앞서서 평론가들에게 예술적 거장으로도 높게 평가받는 경우가 많은 반면, 토니 스콧은 대중상업영화 감독이라는 평을 주로 받았다. 물론 이걸 두고서 딱 잘라 형인 리들리가 더 낫다 말할 순 없겠다. 대중상업영화라고 해서 나쁘다거나 비교하위인 것은 절대로 아니며, 대중의 평과 비평가의 평이 항상 일치하는 법도 아니니까. 일본의 권위있는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와 그의 제자들인 구로사와 기요시, 아오야마 신지 등은 마틴 스코세이지, 스탠리 큐브릭을 평가절하하고 토니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 취향으로 유명하다. 하스미는 토니에 대해 "한결같이 '운동'으로서의 영화와 마주해 왔다"고 평했다.
최근 미국 영화에서는 극히 드문 일이지만 토니의 영화에는 한눈에 그것을 알 수 있는 그만의 문체가 갖춰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카데미상부터 서(Sir) 칭호까지 뭐든지 받아버리는 형 리들리보다 훨씬 개성 있는 영화작가라고 할 수 있겠지만 토니의 국제적 평가는 부당할 정도로 낮아 거의 외면받고 있는 실정이다.
하스미 시게히코, 2004년 # [4]
하스미 시게히코, 2004년 # [4]
저는 그의 작품들을 좋아합니다. 그는 더글러스 서크처럼 존경을 받지 못했고, 너무 상업적이라고 사람들은 그를 비난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에 대해 수업을 합니다.
쿠엔틴 타란티노 #
쿠엔틴 타란티노 #
《탑건》 촬영 당시, 톰 크루즈와 함께 |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촬영 당시, 윌 스미스와 함께 |
형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영상미를 추구하는 영화들을 만들어 왔다. 리들리는 주로 고색창연하고 회화적인 영상을 중요시하는데 반해, 토니는 보다 도시적이고 현대적이고 날카로운 선이 살아있는 영상미를 추구해오고 있다. 그의 영화 미장센들을 보면 차갑고 건조하고 디지털적인 느낌이 드는 영상이 많다. 푸른 색감의 음영이 잦은 특유의 스타일은 보기만 해도 '아, 토니 스콧 영화구나.' 알 수 있을 정도.
덴젤 워싱턴과 함께 |
덴젤 워싱턴과는 페르소나의 관계일 정도로 많은 작품을 함께 했는데, 백인 감독과 흑인 배우라는 흔치 않은 조합으로 시선을 모았다.
3. 사망
2012년 8월 19일 로스앤젤레스의 빈센트 토머스 대교에서 투신자살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향년 68세. 갑작스런 비보에 그의 영화를 기억하는 수많은 이가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다. 유서는 유족들이 요청으로 비공개되었다.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의 뇌종양 진단을 받자 심한 절망감에 자살을 선택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유족 측에서 부인하였다.당시 그가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순간이 CCTV에 기록되어 있어 공중파 뉴스에 나오기도 했다(지금은 모든 영상이 삭제되었다.). 다리 위를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전혀 주저하지 않고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이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삶의 마지막 순간에 망설임이 있을 만 한데 그는 그렇지 않아, 확실히 병으로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던 것 같다는 추측을 낳았다.
2014년 11월 친형 리들리는 버라이어티지와 인터뷰 도중 동생이 삶을 마감하기 전 오랜시간 암으로 투병했음을 인정하였다.
2022년 개봉한 탑건: 매버릭의 엔딩 크레딧이 나오기 전, 1편의 감독인 토니 스콧을 추모하는 글귀가 나왔다.
사망하기 전, 리들리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자신의 차기작에 대해 매우 우울해 했는데 형이 격려를 해줬다고.
4. 연출작
토니 스콧 감독 장편 연출 작품
- [ 펼치기 · 접기 ]
- ||<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width=200> ||<width=200> ||<width=200> ||
러빙 메모리 (1979) 악마의 키스 (1983) 탑건 (1986) 비버리 힐스 캅 2 (1987) 리벤지 (1990) 폭풍의 질주 (1990) 마지막 보이스카웃 (1991) 트루 로맨스 (1993) 크림슨 타이드 (1995) 더 팬 (1996)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1998) 스파이 게임 (2001) 맨 온 파이어 (2004) 도미노 (2005) 데자뷰 (2006) 펠햄 123 (2009) 언스토퍼블 (2010)
상세정보 링크 열기
<rowcolor=#ffffff> 연도 | 작품 | 감독 | 제작 |
1971 | 러빙 메모리 Loving Memory | O | |
1983 | 악마의 키스 The Hunger | O | |
1986 | 탑건 Top Gun[5] | O | |
1987 | 비버리 힐스 캅 2 Beverly Hills Cop II O | ||
1990 | 리벤지 Revenge | O | |
폭풍의 질주 Days of Thunder | O | ||
1991 | 마지막 보이스카웃 The Last Boy Scout | O | |
1993 | 트루 로맨스 True Romance | O | |
1995 | 크림슨 타이드 Crimson Tide | O | |
1996 | 더 팬 The Fan | O | |
1998 |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Enemy of the State | O | |
2001 | 스파이 게임 Spy Game | O | |
2004 | 맨 온 파이어 Man on Fire | O | O |
2005 | 도미노 Domino | O | O |
2006 | 데자뷰 Déjà Vu | O | |
2009 | 펠햄 123 The Taking of Pelham 123 | O | O |
2010 | A-특공대 The A-Team | O | |
언스토퍼블 Unstoppable[6] | O | O |
5. 기타
- 늘 빛바랜 빨간 야구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 감독으로 활동하던 시기의 거의 모든 사진들에서 그의 빨간 모자를 볼 수 있다. 이 모자는 영화 탑건 촬영 시기에 처음 착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빛이 바래고 해져도 계속 쓰고 다녔다고 한다.
- 생전 암벽등반과 하이킹, 달리기를 매우 좋아하는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 영화 감독으로 뿐만 아니라, 광고 감독으로도 왕성하게 활동하였으며 널리 이름을 떨쳤다.
- 영화와 관련된 첫번째 제작경험은 14살 때로, 형인 리들리 스콧의 대학 졸업작품 영화를 만드는 것을 도왔을 때라고 한다.
- 영화 탑건: 매버릭의 엔딩 크레딧에서 토니를 헌정하는 문구가 등장한다.
- 2024년 리들리 스콧의 인터뷰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동생이 보고싶다고 말했다.#
6. 외부 링크
[1] 現 잉글랜드 타인 위어주 노스타인사이드 자치구 타인머스[2] 1980년에 사망했다.[3] 쌍둥이 형제.[4] 2022년 하스미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이후의 토니 스콧이나 마이클 만 같은 뛰어난 영화작가들이 몇 명 나왔고, 저도 그들의 작품을 각별히 아끼고 있지만, 두 사람의 평가는 미국에서는 극히 애매한 지점에 그치고 있어 유감스럽기 그지 없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5] 2015년 National Film Registry 등재작.[6] 그의 유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