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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5:36:34

탐보라 화산

탐보라 산에서 넘어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aldera_Mt_Tambora_Sumbawa_Indonesia.jpg

Mount Tambora

1. 개요2. 지리지질3. 1815년 이전4. 1815년 폭발5. 1816~1817년 여름 없는 해 (Year without a Summer)6. 인명 피해7. 여담

1. 개요

인도네시아 동부 숨바와 섬에 위치한 거대한 성층 화산이자 초화산. 최고 높이 2,722m에 커다란 칼데라(위 사진)가 있다. 1815년에 잠에서 깨어나면서 어마어마한 화산 폭발을 일으킨 것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 분화는 인류의 역사시대에 기록된 (즉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대부터) 전세계의 화산분화 중에서도 규모가 매우 크다. 규모등급으로 VEI 7 등급으로 기원 후 이 정도 화산분화는 5회 정도 일어났다. 유명한 1883년 크라카타우 화산 분화보다 화산재 양으로 8배 정도 규모이고 세계적인 기후 피해도 훨씬 더 심각했다.

당시 분출의 결과가 전 세계에 미친 여파가 대단하다... 특히 이 분출은 전설적인 분출 규모뿐만 아니라, 분화 기록이 상세히 남았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명성이 높다. 참고로 이 화산 분출에 비견하는 유사시대의 분출로는 180년경 뉴질랜드 타우포(Taupo) 호수의 하테페 분출(Hatepe eruption)[1], 백두산의 이른바 천년 분출(the Millenium Eruption)[2][3]이 있다.[4] 덧붙여 산토리니의 대폭발(이른바 Thera 혹은 Minoan Eruption)[5]이 이에 버금가는 분출을 했었다.[6]

2. 지리지질

1815년 대분화 이전에는 높이 4,200m에 달하는 커다란 산이었다고 한다. 동남아시아 원시림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을 것이며 그 풍광이 대단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19세기 전설적인 대분화를 일으키고 약 1,500m에 해당하는 산체는 종적을 감추었다. 그 때 형성된 엄청난 크기의 칼데라가 특징인데, 직경 7km에 깊이만 1km를 넘는다. 칼데라 내부 한켠에는 작은 호수가 있다.

판구조 관점에서는 전형적인 섭입대 성층 화산이다. 자바(Java) 해구로부터 북쪽 약 320km 떨어져 있고 섭입하는 해양판에서 약 190km 위에 놓여 있다. 즉 대략 200km 아래에서 끊임없이 공급되는 섭입대 마그마가 화산분출의 원동력이다. 가장 위쪽의 마그마방은 대략 3~4km 아래에 놓여있으나 구체적인 깊이는 마그마의 역학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같은 방법으로 발달한 인도네시아의 기라성 같은 활화산들 중에서도 크라카타우 화산, 토바 호수 등과 함께 가장 명성이 드높은 화산 중 하나이다.

3. 1815년 이전

숨바와 섬 곳곳에는 여러 영토들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주로 6개의 주요 왕국[7]이 중심이었으며 숲과 강 근처에 자리잡은 채로 낙농업과 채집을 통해 살아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은 1800년대 초반에 나폴레옹 전쟁과 연계되어 서구 열강들의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던 곳이었다.

그러나 1812년 처음으로 활동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흔들림이 감지되고 소규모의 분연주를 만들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활동은 점점 강해졌다. 이 기록들은 당시 그 지역에 있던 서구권 사람들에 의해 남아있다. 시커먼 분연주가 관측되었으며 그 화산재가 갑판에도 떨어졌다고 1814년에 기록되었다.

4. 1815년 폭발

첫 분출은 1815년 4월 5일 저녁에 일어났으며 약 2시간 정도 지속되었다. '인근' 군사기지에서 이 소리를 모두 들었는데, 대포 소리로 착각했으며 군대는 경계태세에 돌입하여 주변에서의 침입을 대비했다. 그러나 곧 흩날리는 화산재를 보고 이 소리의 정체를 간파했으며 폭발음은 일시적인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들려왔다. 그러나 그 소리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생했다고는[8]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록을 남긴 사람은 토마스 S. 래플스 경(Sir Thomas Stamford Raffles)[9]인데, 그가 주둔하던 기지는 오늘날 자와 섬에 있었다. 즉 탐보라 화산에서 무려 1,000km나 떨어진 곳에서 분출음을 대포소리로 착각하고 화산재가 날아온 것이었다! 심지어 이 분출은 본격적인 폭발도 아니었다. 에피타이저 이 '대포 소리'는 다른 곳에서도 기록이 남아 있다.[10] 탐보라 화산에서 북쪽으로 350km 떨어진 마카사르 (술라웨시 섬에 있음) 기지의 한 항해사는 오후 내내 남쪽에서 대포소리 같은 게 들린다고 자기 일지에 기록했다. 이 몸풀기 분출도 굉장해서, 33km 높이의 분연주를 만들어냈다.

본격적인 분출은 그로부터 5일 뒤인 1815년 4월 10일 월요일 (지역 시간으로) 오후 7시에 시작됐다. 3시간 쯤 지속된 분출이었고 인류 역사상 가장 강대한 플리니 분출이었다. 이 분출에 대한 목격 기록은 탐보라 화산 근처 (근처래봤자 수십km 거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인물들에 의해 남겨졌다. 그는 탐보라 인근의 족장이었는데, 산 전체가 이글거리는 불꽃이었고 여러 시커먼 연기기둥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고 한다. 1시간을 지속한 폭풍[11]이 마을을 날려버렸다고 전한다. 이후에도 지속된 분출은 수십 세제곱 킬로미터의 화산재를 더 뿜어냈고 수없이 많은 화쇄류를 지속적으로 흘려보냈다. 인근 마을은 지워졌고 화산재는 바다 건너 술라웨시 섬과 자바 섬, 인도네시아 섬까지 날아가 쌓였다. 이 엄청난 크기의 분연주는 그 모양 때문에 불사조 구름(the phoenix cloud)이라고 불렸다.

분출의 잿빛 기둥 때문에 인근 600km 반경 내의 지역은 하루에서 이틀 동안 칠흑같은 어둠 속에 있어야 했다.[12] 이 거대한 폭발은 그 소리가 기록상 수마트라 트루문까지 들렸는데 거리가 무려 2,600km나 떨어진 것이었다. 말하자면 하노이에서 일어난 폭발 소리가 서울에서 들렸다는 뜻이다. 또한 탐보라 화산에서 800km 떨어진 지역의 집이 폭발로 휘청거렸다. 화산쇄설류가 일으킨 쓰나미는 인근 해안에 피해를 입혔으나 그 규모가 아주 큰 것은 아니었고, 약 2m 정도의 것이었다고 한다.[13]

찢겨나간 나무 줄기들과 부석이 뒤섞여, 최대 5 km(...) 직경의 거대한 부유물이 플로레스 해(海)를 떠다녔다. 이 부유물은 3년 동안 인근 바다에서의 탐사를 방해했다. 1815년 8월 1~3일 쯤에 탐보라 화산에서 3,600km 떨어진 인도양에서 페어리(Fairlie)선(ship)은 부석 부유물을 발견했고, 이들은 인근 해산의 분출 결과라고 착각했다.

현대의 분석 결과로 이 화산 폭발의 에너지량은 차르 봄바의 약 400배(20000MT-20기가톤)이상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 정도면 인류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핵무기 에너지 총량의 10배를 넘는다.

5. 1816~1817년 여름 없는 해 (Year without a Summer)

화산에는 많은 이산화황이 포함되어 있다. 탐보라 화산의 분출 기둥은 무려 43 km나 되었으며, 내뿜은 이산화황의 양만 최대 100메가톤이나 되었다. 성층권에 흩뿌려진 이산화황은 대기권에 여러 영향을 미쳤다.

이산화황은 더 많은 구름을 응집시켜 햇빛을 차단하며 그에 따라 대류권 온도가 떨어진다. 엄청난 양의 이산화황이 전 세계 성층권에 섞이면서 세계 기후가 휘청거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휘황찬란한 석양이었다. 주황색, 붉은색의 지평선과 보랏빛과 분홍색의 서녘, 가끔식 섞여드는 검은 부분이 특징이었다. 1816년 봄과 여름 내내 끊임없이 '건조한 안개(dry fog)'가 관찰됐다. 바람이 불어도 사라지지 않은 이 괴이한 안개는 이산화황이 성층권에 있어서 태양광이 희미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심지어 맨눈으로 흑점을 관찰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결국 엄청난 양의 이산화황이 핵겨울과 비슷한 이른바 '화산겨울'(Volcanic winter) 효과를 일으키면서 대류권은 온도가 떨어졌고, 따뜻해야할 시절에 냉기가 휘몰아쳤다. 연간 세계 평균기온이 섭씨 0.4-0.7도 정도 떨어졌다. 6월 4일, 즉 여름에 코네티컷에 서리가 내렸고, 6월 6일에는 알바니, 메인, 뉴욕과 데니스빌에 눈이 내렸다! 코네티컷과 페어필드, 트렌톤, 뉴저지까지 살을 에는 강추위가 몰아쳤다.[14] 안그래도 알려지지 않은 1809년의 화산 폭발로 그 시절 1810년대 초반에 이미 유럽과 북미권이 그리 따뜻하지 않았는데,[15] 탐보라 화산 폭발로 인한 한랭화 효과가 추가적으로 나타나면서 당시 나무의 나이테에는 비할 데 없는 차가운 여름이 기록되었다. 그래서 당시 민중들에겐 그 시절이 "여름 없는 해"로 알려졌다. 전 유럽에 걸쳐서 대규모 흉작과 기아가 만연해 민심이 흉흉해지고 머지않아 세상이 끝나고 심판의 날이 닥치리라는 종말론적 분위기가 감돌았다.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서 200여만 명이 아사하는 등 20여 년 전 출간된 멜서스의 인구론이 예언한 기아로 인한 맬서스 트랩이 실현되는 듯이 보였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암울한 분위기도 이런 절망적인 사회분위기에서 탄생하였다. 기원 후에 이보다 심한 이상기후는 '가장 살기에 끔찍한 년도'로 불리는 536년부터 10년간의 전세계적 냉해 정도.

조선에서는 순조 16년(1816) 흉작의 기록이 보인다. 순조 14년(1814)의 호구 조사는 790만명이었으나 순조 16년에는 659만명으로 격감했다. 130만명이 줄어든 것이다. 이 모두가 아사했을 리는 없지만 흉년과 기근으로 인해 화전민이나 도적이 되는 등으로 호구 조사에서 이탈한 듯하다. 걷혀야 할 조세도 쌀은 25,000석이 모자라고 무명도 300동이 부족했다. 세입은 부족했지만 경상도에 구호미 8,000섬을 긴급 방출하는 등 이유로 세출은 오히려 늘어나 조선 후기 재정 붕괴를 가속화했다.머니투데이 기사 참조 조선왕조실록 기록 참조

안도 히로시게[安藤広重] / 우타카와 히로시게[歌川 広重](1797~1858)가 만든 도카이도 53역참 중 16경 '간바라[蒲原]' [16][17] 그림도 탐보라 화산 폭발과 연관되어 있다는 추측도 존재한다. 간바라 지역은 눈이 내리지 않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당 작품에 작가가 쓴 말에 의하면 간바라에 눈이 내린것은 순전히 상상으로 그린 것이며 실제로는 작가들의 일생 동안 간바라에는 눈이 온 적이 없다.

6. 인명 피해

많은 기록이 소실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한 피해를 산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기후의 일시적 요동으로 인해 미친 피해는 더욱 판가름하기 어려운 법이다.

탐보라 화산 인근 지역의 피해는 말 그대로 참혹했다. 인근 마을과 부족국가가 모두 폐허가 됐다. 당시 일종의 구호팀(mercy-finding mission) 기록에 따르면 "이 참상은 눈뜨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생존자들은 먹을 걸 찾아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위생이 악화되고 물이 오염됨[18]과 동시에 영양부족에 시달리자 사람들은 병에 걸렸다. 설사는 다반사, 굶어 죽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화산 가스 중에는 플루오린도 섞여있었으며 약 18 메가톤이 쏟아졌었다. 이 플루오린은 땅에 섞여들어가 가축을 죽였고 인간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미세한 화산재 먼지는 기관지염을 일으켰음에 틀림없었다.[19] 추산에 따르면 질병에 대하여, 홍역으로 31%, 설사(탈수)로 29%, 호흡기 질환으로 22% 정도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근거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탐보라 인근 지역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적게는 60,000명, 많게는 120,000명 정도로 보고 있다.[20][21]

유럽과 미국의 기록에서는 1816년과 1817년의 농사가 여름의 서리 때문에 망했다고 전한다. 뉴잉글랜드의 많은 가축은 먹을 게 부족해서 1816~1817년 사이의 겨울을 버티지 못했다. 영국에서의 피해도 사실 매우 컸는데, 작물이 비실비실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음식이 없어 구걸을 해야했고, 북쪽과 남서쪽 아일랜드는 밀, 오트, 감자 수확에 실패하여 기근에 시달렸다. 독일에서도 이는 심각했는데, 특히 시골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의 경우에도 2년 연속으로 처참한 흉작으로 인하여 극심한 식량난의 고통에 시달렸다. 즉, 서유럽과 중유럽 전체가 2년간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 여파로 여러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그들 폭동의 구호는 "빵이 아니면 피를! (Bread or Blood)"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유럽 동쪽의 러시아와 미국의 경우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은 영향이 적었던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와 미국 애팔래치아 서쪽 지역에서 재배된 대량의 밀이 무역을 통해 미국의 뉴잉글랜드와 유럽으로 수송되며 아예 식량 자체를 구할 수 없는 최악의 파국만은 면할 수 있었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정부 차원에서 대량의 식량을 수입하여 수입가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하여 피해를 줄이려고 노력했고 독일의 경우 정부가 직접 나서지는 않았지만 사회 지도층에서 자발적으로 식량을 수입하여 낮은 가격에 판매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하게 인상된 식량 가격을 빈민층은 지불할 수 없었고 결국 유럽 전체에서 아사자가 급증하였다.

남아시아의 인도에서도 탐보라 화산 폭발로 기후 변화가 나타나면서 몬순 현상이 교란되어 식량 생산이 어려워지며 고통받았고 청나라의 경우에도 남서부 운남 지방에서 탐보라 화산 폭발로 인한 남아시아 몬순 현상이 교란된 여파가 미치면서 1816~1817년의 2년간 극심한 냉해가 지속되었고 대흉작으로 인한 식량 부족으로 아사자가 속출했다. 하필 운남 지방은 1815년에 가뭄으로 흉작이 든 상태여서 잉여 식량이 부족해진 상황이었는데 여기에 다시 2년간 대흉작이 들면서 운남순무아문이나 운귀총독부 차원에서의 구호 대책 실행으론 식량 부족 문제의 해결이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운남 지방이 가장 피해가 컸으나 청의 다른 지방에서도 식량 생산이 저하되어 당시 청 조정에서도 파국적인 식량 부족에 직면한 운남 지방을 구호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유럽이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면서 유럽인의 미국으로의 이민이 대폭 증가하였고 북미 지역 내에서도 역시 극심한 냉해로 식량 생산이 힘들어져 고통받던 캐나다와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을 떠나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으로의 이주가 급증했다. 덕택에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에서는 뉴잉글랜드와 유럽으로 밀의 수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밀가격이 폭등하여 경제가 활성화되고 여기에 대규모의 이주민이 들어오면서 도시가 급증하고 농토가 대량으로 만들어지는 급격한 개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즉, 미국의 서부 개척이 가속화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미국 경제의 버블로 이어졌는데 문제는 1818년에 유럽과 미국 뉴잉글랜드의 기후가 회복되어 식량 생산이 정상화된 것이다. 이들 지역에서는 식량 생산이 정상화되며 밀의 수입이 급감하였고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 지역에선 밀의 수출이 급락하면서 밀가격이 폭락하였다. 결국 1819년에 미국의 경제 버블은 붕괴되고 미국에서의 첫번째 경제 공황이 일어났다.

한편 이 기근으로 인해 1816년에서 1819년에 걸친 심각한 전염병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티푸스와 페스트였다. 벵갈의 콜레라 유행도 1816년에 일어났다.[22] 특히 벵갈의 콜레라는 무역 항로를 타고 전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20년간 어마어마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여기에 유럽의 아일랜드에선 800,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티푸스에 시달렸으며, 44,300명이 기근과 이질(Dysentery), 열병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당시는 나폴레옹 전쟁 직후였기 때문에 피해가 더 컸다. 게다가 아일랜드는 영국 정부의 자유방임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어떤 구호대책도 없었던 것이 피해를 키웠다.

결국 탐보라 화산 폭발로 인한 극심한 2년간의 냉해를 포함한 기후 변화로 나타난 대흉작이 발생하여 이로 인한 식량부족과 전염병으로 유럽과 미국, 그리고 아시아에서 수백만명~수천만명이 죽었다.

7. 여담



[1] 아마 남반구에서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진 화산 구조일 것이다. 약 2.65만 년 전과 1.8만 년 전에도 매우 강력한 분출이 있었다. 이 두 분출은 탐보라 분화를 넘어서는 VEI 8로 기록되어, 타우포 화산지대(Taupo Volcanic Zone, TVZ)에 많은 과학자들이 관심을 갖게 만든 매력 포인트가 되었다. 이 당시 뉴질랜드는 무인도였다. 마오리족이 뉴질랜드에 정착한 것은 13~14세기 무렵.[2] 대략 서기 1000년에 분출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최근의 정밀 Ar-Ar 연대측정 결과로는 대략 946년 언저리에 일어난 분출이라 생각한다.[3] 백두산은 주변에 국가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강력한 분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풀리지 않은 점들이 꽤나 있다. 정확한 분출 규모나 양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4] 탐보라 화산까지 이들 세 폭발을 기원후 3대 폭발이라고도 부른다.[5] 기원전 1600년 무렵에 일어난 강력한 폭발인데, 현대적 기준에 따르면 VEI 7급이라고 추정한다. 다만 이 분출 역시 정확하게 기록된 내용이 없다.[6] 이런 분출이 흔한 건 절대 아니지만, 지질학적 규모로 볼 때 이들을 뛰어넘는 강력한 화산 활동도 있어왔다. 토바 호수, 라가리타, 옐로스톤 등의 화산 분출과 대규모 화산암 지대(Large Igneous Provinces, LIPs)를 만든 분출들의 규모는 상상하기가 어려운 규모이다.[7] princedom or sultanates.[8] 끽해봐야 자바섬에 있던 메라피 화산이라고 생각했다.[9] 싱가포르의 건설자.[10] 헌데 1883년 폭발한 크라카타우 화산 폭발 때는 폭발음이 4,000km 떨어진 곳에서도 들렸다고 하며 호주뉴질랜드 해안에 주둔하던 영국군이 이 소리를 듣고 아군이 함포 훈련이라도 하나?라고 기록을 남겼을 정도이다.[11] 화산쇄설류였을 것이다.[12] 비유적인 게 아니라 어찌나 어두운지, 눈 바로 앞에 손을 갖다대도 손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것도 하루 종일. 그 와중에 그 어둠 속에서 화산재는 계속 내리고 있었으니 지옥이 따로 없다. 햇빛은 4월 12일 정오쯤 되어서야 처음으로 이 지역을 다시 비추기 시작했다.[13] 진짜 끔찍했던 화산기원의 쓰나미는 크라카타우 화산의 것. 탐보라 화산이 가장 큰 분출이었다면, 크라카토아는 가장 "격렬한" 분출이었다.[14] 참고로 뉴저지는 스페인과 같은 위도다. 다만 직접비교는 어려운 것이, 해양성 기후로 난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스페인과 대륙동안성의 뉴저지는 원래도 겨울 기온이 많이 차이난다. 사실 북한의 가장 추운 지역들도 스페인과 위도가 비슷하다.[15] 빙하를 통한 조사에서 탐보라 화산 폭발 6년 전인 1809년에 북반구의 적도 지역에 가까운 열대 지방의 알려지지 않은 화산(유력후보는 크라카타우 화산으로 본다.)이 폭발하여 기온이 하락하는 한랭화 효과가 나타났는데, 이 한랭화 현상이 정상으로 회복되던 와중에 탐보라 화산이 폭발하면서 1816~1817년에 걸친 매우 강력한 한랭화 현상이 일어났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빙하 연구에서 1809년 화산 폭발로 인한 한랭화는 탐보라 화산 폭발의 절반을 약간 넘는 수준으로 나타났다.[16] 현재의 시즈오카현 중부 간바라쵸[17] 이 그림은 위저의 두번째 앨범 Pinkerton의 앨범아트로도 쓰였다.[18]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은 살기 위해 화산재가 섞인 물을 마시고 있었다.[19] 실제로 탐보라 화산과 물리적 양상이 비슷했던 피나투보 화산 분출 당시에 피난캠프에서 수백명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20] 게다가 화산으로 인한 직접 피해(화산쇄설류나 화쇄난류, 화산성 쓰나미)는 최소 20,000명에서 최대 40,000명을 추산된다. 게다가 더 끔찍한 건 앞에 저 피해는 겨우 1815년에 기록 된 내용이다.[21] 2018년 현재(인구수 약 7,600,000,000명) 기준으로 해도 엄청난 규모인데, 저때의 세계 인구는 겨우 10억으로 지금의 인도보다도 인구가 적었던 시절이다. 즉 지금으로 환산한다면 최대 100만 명 정도라는 어마어마한 수치가 나온다.[22] 벵갈의 경우 콜레라 유행이 탐보라 화산 때문인지 학설이 대립했으나 2010년대로 넘어와서 최근 연구 결과는 탐보라 화산 폭발로 남아시아에서도 몬순 현상이 교란되는 극도의 기상 이변이 일어났던 것이 밝혀졌고, 이런 몬순 현상의 교란이 그 전보다 사람에게 더 치명적인 콜레라의 변종 발생을 벵갈 지방에서 유도하여 대규모 콜레라의 유행을 가속화했다는 학설이 학계에서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23] 사상자 등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당시 추정 규모와 쓰나미가 발생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2004년 남아시아 대지진과 피해 유형 등에서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