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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6 21:11:04

키타오 코지

파일:kitao-debut-04.jpg
이름 키타오 코지[1]
([ruby(北尾, ruby=きたお)] [ruby(光司, ruby=こうじ)])
출생 1963년 8월 12일
미에현 츠시
사망 2019년 2월 10일 (향년 55세)
치바현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스모 전적 556전 348승 184패 24무
종합격투기 전적 3전 1승 2패
1SUB
2KO
체격 201cm / 157kg

1. 개요2. 전적3. 커리어4. 파이팅 스타일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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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 스모, 프로레슬링, 종합격투기 선수. 제 60대 요코즈나이다.

2. 전적

3. 커리어

어린시절 유도사범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도를 했으나 이후 초등학교에서 스모 경기장이 만들어지고 나선 스모를 시작했다. 초등학교시절부터 아마추어 대회에서 우승하고 중학교시절부터 피지컬이 상승해 시코[2]로 상대를 제압할 정도였고 적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고교경기를 했는데 고등학교 선수들을 압도할 정도였다. 이에 각계각층에서 특급 유망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후 부모님에게 5년안에 데뷔하지 않으면 스모를 그만둔다는 각오를 하고 체육관에 입문해 수련을 시작했다.

1979년 데뷔해[3] 엄청난 피지컬[4]로 승승장구하며 데뷔 6년만에 요코즈나에 등극했다. 하지만 요코즈나에 등극한 후 지속적인 경추, 무릎부상으로 인해 제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우승전적이 없는 요코즈나라는 불명예도 얻었다. 1988년 스승과의 갈등이 폭발해 체육관을 나오며 스모계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스포츠 모험가라는 이색적인 타이틀을 붙이고 사실상 연예계에 발을 붙였다가 1990년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입단해 프로레슬링에 데뷔했다.[5] 그러나 요코즈나라는 타이틀로 인해 특별대우를 받았지만 파워에 비해 단조로운 경기패턴과 연습을 게을리하면서 혹평이 이어졌고 이에 관객들에게 험한 말까지하며 이미지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결국 쵸슈 리키의 협박으로 인해 신일본을 퇴단했다. 하지만 완전한 퇴단이 아닌 타 단체로의 이적이 확정된 퇴사라 비판을 많이 받았다.[6]

SWS에 입단한 후 괜찮은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그 해 4월 1일에 열린 경기에서 불만을 품고 시멘트 매치를 저질러 반칙패를 당했다.[7] 이 사건으로 프로레슬링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알려져 뭍매를 맞았다. 징계를 받았으나 주변 프로레슬러들의 증언으로 결국 SWS에서도 해고당했다.

해고 후 종합격투기에 도전했고 UWF와 계약해 통해 종합격투기에 데뷔했다. VTJ에서 페드로 오타비오를 상대로 엘보로 경기를 포기하며 TKO패했다.

UFC 9에서 마크 홀과 맞붙어 40초만에 코가 골절되어 닥터 스탑으로 TKO패했다.

Pride 1에서 네이선 존스를 상대로 키락으로 서브미션을 거뒀다.[8][9] 3전을 끝으로 종합격투기 커리어를 끝냈다.

프로레슬링에 복귀 후 1년도 채 안되어 1998년 은퇴를 선언했다.[10]

은퇴후 성격도 많이 온화해지며 일본스모협회와의 앙금도 완전히 해소했다. 기후현에서 나이프 디자이너로 일했고 격투기계와 일절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2003년부터 폭음과 폭식으로 인해 당뇨병에 걸렸고 상태가 심각해 발목절단 권유까지 받았다. 2010년 초반부터 거동을 하기 힘들 정도로 심해졌고 2013년 만성 신부전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하다가 2019년 2월 10일 치바현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언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4. 파이팅 스타일

5. 여담



[1] 스모 등록명은 후타하구로 코지(双羽黒 光司)[2] 흔히 경기전 발을 들어서 지면을 강하게 밟는 행위[3] 이 시기에 데뷔한 선수들이 꽃의 산파치조라해 명성을 떨친 선수들이 많았다.[4] 데뷔 당시 195cm였고 농구선수 피지컬이라는 평을 받았다.[5] 이 즈음 WWF(현 WWE)의 레슬매니아 7에 텐류와 팀을 짜서 WWE의 인기 태그팀 데몰리션과 경기를 가졌고 승리했다. 사실상 키타오 코지의 프로레슬러로서는 가장 빛나는 시절이었을 듯하다.[6] 이후 키타오의 스모입단 동기인 야스다 타다오가 신일본으로 왔을땐 어떠한 푸시도 주지 않았다라는 건 사실이 아니고 사실 야스다 타다오는 부족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IWGP 월드 챔피언에 오른 적이 있었다. 이는 당시 이노키즘으로 인한 폐해였는데 당시 야스다 타다오는 종합격투기 시합에 나가서 1승을 거둔 적이 있었고, 이 때문에 제대로 된 프로레슬링 실력도 없는 그를 신일본에서 푸시해서 챔피언 자리에 올려쳤기 때문. 당연하지만 현재 신일본에서는 흑역사 오브 흑역사이다.[7] 상대는 같은 스모선수 출신인 존 텐타. 어스퀘이크나 골가 등의 기믹으로 유명한 선수다. 성격은 점잖은 편이었으나 싸움 실력은 당대의 프로레슬러 중에서도 탑급이라 정말로 작정하고 싸웠다면 키타오가 오히려 밀렸을 것이다.[8] 네이선 존스가 져줬다는 게 정설이다. 사실 키타오의 실력으로 유명한 싸움꾼이었던 네이선 존스를 실력으로 이기는 건 거의 불가능했고 또, 원래 PRIDE는 이런 식의 승부조작 경기가 많았다.[9] 네이선 존스는 프로레슬러들 중에서도 하쿠와 함께 역사상 실전으로 1, 2위를 다투는 싸움꾼이었다.[10] 은퇴 사유는 후에 밝혀졌지만 자신의 딸과 함께하고 싶어서였다. 은퇴 후에도 딸에게 현역 시절 이야기를 하지 않아 딸은 죽기 직전까지 키타오의 현역시절을 몰랐다고 한다.[11] 아무리 일본에서 재일교포 차별이 심하다고 해도 스포츠 업계처럼 실력 우선주의인 곳에서는 그런 횡포가 많지 않았고 실제로 높은 위치에 오른 재일교포도 다수 있었다. 물론 프로레슬링 업계에서도 역도산의 영향도 있어서 재일교포도 꽤 있는 편이다. 신일본만 해도 쵸슈 리키나 호시노 칸타로, 카네모토 코지 등이 재일교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