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키타오 코지[1] ([ruby(北尾, ruby=きたお)] [ruby(光司, ruby=こうじ)]) |
출생 | 1963년 8월 12일 |
미에현 츠시 | |
사망 | 2019년 2월 10일 (향년 55세) |
치바현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스모 전적 | 556전 348승 184패 24무 |
종합격투기 전적 | 3전 1승 2패 |
승 | 1SUB |
패 | 2KO |
체격 | 201cm / 157k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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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 스모, 프로레슬링, 종합격투기 선수. 제60대 요코즈나이다.2. 전적
- 주요 승: 네이선 존스
- 주요 패: 페드로 오타비오, 마크 홀
3. 커리어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도를 했으나 이후 초등학교에서 스모 경기장이 만들어지고 나선 스모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마추어 대회에서 우승하고 중학교 시절부터 피지컬이 상승해 시코[2]로 상대를 제압할 정도였고 적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고교 경기를 했는데 고등학교 선수들을 압도할 정도였다. 이에 각계각층에서 특급 유망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후 부모님에게 5년안에 데뷔하지 않으면 스모를 그만둔다는 각오를 하고 체육관에 입문해 수련을 시작했다.1979년 데뷔해[3] 엄청난 피지컬[4]로 승승장구하며 데뷔 6년만에 요코즈나에 등극했다. 하지만 요코즈나에 등극한 후 지속적인 경추, 무릎부상으로 인해 제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우승전적이 없는 요코즈나라는 불명예도 얻었다. 1988년 스승과의 갈등이 폭발해 스모계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스포츠 모험가라는 이색적인 타이틀을 붙이고 사실상 연예계에 발을 붙였다가 1990년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입단해 프로레슬링에 데뷔했다. 그러나 요코즈나라는 타이틀로 인해 특별대우를 받았지만 파워에 비해 단조로운 경기패턴과 연습을 게을리하면서 혹평이 이어졌고 이에 관객들에게 험한 말까지 하며 이미지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러다가 당시 신일본의 현장 감독이자 매치 메이커였던 쵸슈 리키와의 말싸움 끝에 신일본을 퇴단하고 SWS[5]로 이적했다.[6]
SWS에 입단한 후 괜찮은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었으나[7] 1991년 4월 1일에 열린 고베 월드 기념 홀 대회에서 불만을 품고 시멘트 매치를 저질러 반칙패를 당했다.[8] 이 사건으로 프로레슬링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알려져 뭍매를 맞았다. 징계를 받았으나 주변 프로레슬러들의 증언으로 결국 SWS에서도 해고당했다.
해고 후 키타오는 무도가의 길을 걷고 싶다며 종합격투기 전향을 발표했지만 당시만 해도 종합격투기 단체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결국 1년 후인 1992년 3월 프로레슬링 단체인 UWF 인터내셔널과 계약하며 프로레슬링 무대로 복귀했다. 다만 그 후 1996년부터는 종합격투기 대회에도 출전하기 시작했다.
1996년 4월 15일에는 Universal Vale Tudo Fighting 1 대회에서 페드로 오타비오를 상대로 종합격투기 데뷔전을 가졌고, 오타비오의 엘보 공격 연타에 탭아웃을 치며 TKO패했다.
1996년 5월 17일에는 UFC 9에서 마크 홀과 맞붙어 40초 만에 코가 골절되어 닥터 스탑으로 TKO패했다.
1997년 10월 11일에는 Pride 1에서 네이선 존스를 상대로 키락으로 서브미션 승리를 거뒀다. 이 경기를 끝으로 종합격투기 대회에는 더 이상 출전하지 않았다.
그 후 1998년에는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프로레슬링 무대에서 은퇴했다.[9]
은퇴 후 성격도 많이 온화해졌고, 요코즈나 모임에도 참석하는 등 일본스모협회와의 관계도 개선했다.[10] 기후현에서 나이프 디자이너로 일했고 격투기계에 일절 관심을 갖지 않았다.[11]
하지만 2003년부터 폭음과 폭식으로 인해 당뇨병에 걸렸고 상태가 심각해 발목절단 권유까지 받았다. 2010년 초반부터 거동을 하기 힘들 정도로 심해졌고 2013년 만성 신부전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하다가 2019년 2월 10일 치바현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언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4. 여담
- 스모 선수답게 대식가였다. 마쿠시타 시절에는 후원자와의 식사 때 3kg의 스테이크를 먹고 나서 바로 덮밥, 오므라이스, 볶음밥, 차슈라멘, 가츠동 등을 시켜서 거의 다 먹었다고 한다.
- 스모 선수 시절에는 소속 도장의 동문 선배들이 엄격하게 연습을 시키면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고향에 돌아가겠다며 실제로 도장을 뛰쳐나온 적도 있어서 도장의 지도자조차 코지가 기분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대해야 했다고 한다.#
- 아내인 요시에와는 스모 선수 시절에 만나 스모계에서 은퇴한 후 결혼했다. 코지가 당뇨병에 걸린 이후부터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요시에는 코지의 곁에서 간호했다.#
- 신일본 프로레슬링 시절 연습을 게을리 하자 현장 감독이 였던 쵸슈 리키가 그럴꺼면 그만둬라 라는 말에 "꼬우면 링에서 한판 붙던가, 조센징 주제에"라고 했다가 계약 해지당했다.[12]
[1] 스모 등록명은 후타하구로 코지(双羽黒 光司)[2] 흔히 경기전 발을 들어서 지면을 강하게 밟는 행위[3] 이 시기에 데뷔한 1963년생 선수들은 꽃의 산파치조라고 불렸다.[4] 데뷔 당시 195cm였고 농구선수 피지컬이라는 평을 받았다.[5] 1990~1992년에 존재했었던 일본의 프로레슬링 단체. 텐류 겐이치로가 세웠다.[6] 다만 이 당시 신일본은 트러블 등으로 인한 해고가 아니라 키타오의 동의를 얻은 원만한 퇴사라는 식으로 발표하긴 했다. 덧붙여서 키타오의 퇴단 후 키타오의 스모 입단 동기인 야스다 타다오가 신일본으로 왔을땐 키타오 코지처럼 특별 대우하지 않고 엄격하게 단련시켰다고 한다.[7] 이즈음 WWF(현 WWE)의 WWF 레슬매니아 VII에 텐류 겐이치로와 태그팀을 짜고 출전해서 WWF의 인기 태그팀 데몰리션과 대결해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8] 상대는 같은 스모선수 출신인 존 텐타. 어스퀘이크나 골가 등의 기믹으로 유명한 선수다.[9] 7월 18일에 은퇴 경기를 하고 10월 11일에 PRIDE.4 대회에서 은퇴 세리머니를 했다.[10] 2003년에는 코지 자신이 현역 시절 몸담았던 스모 도장 타츠나미 헤야의 어드바이저에 취임해서 1년 가량 재임하기도 했다.[11] 은퇴 후에는 집에서 현역 시절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코지의 딸은 아버지를 키가 크고 다양한 취미를 가진 사람 정도로 생각했었다고 한다.[12] 아무리 일본에서 재일교포 차별이 심하다고 해도 스포츠 업계처럼 실력 우선주의인 곳에서는 그런 횡포가 많지 않았고 실제로 높은 위치에 오른 재일교포도 다수 있었다. 물론 프로레슬링 업계에서도 역도산의 영향도 있어서 재일교포도 꽤 있는 편이다. 신일본만 해도 쵸슈 리키나 호시노 칸타로, 카네모토 코지 등이 재일교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