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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23:34:51

클레오파트라(1963)

클레오파트라 (1963)
Cleopatra
파일:cleopatra_poster.jpg
장르 <colbgcolor=#fff>드라마
감독 조셉 L. 맨키위즈
각본 조셉 L. 맨키위즈
레널드 맥도걸
시드니 부흐만
원작 카를로 마리오 프란제로
제작 월터 와그너
출연 엘리자베스 테일러
리처드 버튼
렉스 해리슨
파멜라 브라운
조지 콜
험 크로닌
체사레 다노바
케네스 헤이
로디 맥도웰
촬영 레온 샴로이
편집 도로시 스펜서
음악 알렉스 노스
배급사 20세기 폭스사
개봉일 파일:미국 국기.svg 1963년 6월 12일
상영 시간 251분 (4시간 11분)
월드 박스오피스 $57,777,778
스트리밍 파일:Disney+ 로고.svg (클레오파트라 1963년)
파일:Apple TV+ 로고.svg파일:Apple TV+ 로고 화이트.svg
상영 등급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파일:영등위_15세이상_2021.svg 15세 이상 관람가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G등급 로고.svg

1. 개요2. 포스터3. 시놉시스4. 예고편5. 등장인물6. 줄거리7. 흥행8. 제작9. 기타10. 평가

[clearfix]

1. 개요

클레오파트라 7세를 다룬 창작물 가운데에선 조셉 L. 맨키위즈가 감독한 이 1963년 영화가 제일 유명한데, 주연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클레오파트라, 리처드 버튼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렉스 해리슨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연기했다.

2. 포스터

파일:cleopatra_poster.jpg
파일:Cleopatra_1963_50th.jpg

3. 시놉시스

로마의 세력권 아래 있던 이집트는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동생이 함께 통치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며 전세계를 지배해가던 로마의 실권자 시저는 이집트의 내전을 해결하기 위해 이집트로 입성하고, 그곳에서 클레오파트라를 만난다. 그녀의 도도하고도 아름다운 매력에 이끌린 시저는 내전을 해결하고 클레오파트라를 여왕의 자리에 오르게 도와준다. 그러나 그녀의 야심은 그칠 줄 모르고 시저의 힘을 얻어 전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꿈꾼다. 결국 클레오파트라의 유혹에 빠진 시저는 로마에 부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고 둘 사이에는 아들까지 생긴다.

오랫동안 이집트에 머물렀던 시저는 다시 전쟁을 치르고 드디어 로마에 입성한다. 국민들의 시저에 대한 신뢰는 뜨겁지만 원로원의 몇몇 무리는 시저의 집권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시저의 초대로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에 오지만 시저는 결국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에 의해 살해된다. 시저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고 세계를 지배하려던 클레오파트라의 야심은 물거품이 되지만 그녀는 시저의 신임을 받던 안토니우스와 다시 사랑에 빠지는데…

4. 예고편



5. 등장인물

6. 줄거리

7. 흥행

박스오피스 성적으론 북미에서만 5780만 달러를 벌어들인 그해 전세계 최고 흥행작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은 아니다. 제작 과정에서 발생한 난항으로 제작비가 4400만 달러(2020년 기준 3억 7094만 달러)까지 치솟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당시는 개별 극장주들이 개봉 시일이 꽤 지난 영화들도 찾는 관객들이 많으면 상영했기 때문에 장기 상영이 가능했다. 최종적으로는 방송사에 방영권을 팔아서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제작비 회수 이전에 곤란을 겪던 20세기 폭스를 구원한 작품이 바로 <사운드 오브 뮤직>이다.

8. 제작

제작비 증가 원인은 엄청난 엑스트라 숫자와 해외 촬영도 있지만, 제작자와 감독의 마찰로 인한 경질 소동 때문이기도 하다. 감독 조셉 L. 맨키위즈는 2부작 동시 개봉으로 만들기 위해 현장에서 마약 복용까지 불사하면서[1] 쪽대본을 쓰며 촬영을 더디게 하고 있었고, 제작자 월터 와그너(Walter Wanger)는 한 편으로 만들길 종용했다. 그래도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제작사에 맞서 감독을 적극적으로 보호했기 때문에 맨키위즈는 끝까지 자리는 보전할 수 있었다.
파일:Cleopatra_1963_01.jpg
파일:Cleopatra_1963_02.jpg
파일:Cleopatra_1963_03.jpg
파일:Cleopatra_1963_04.jpg

감독은 주연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이 벌인 소위 '세기의 로맨스'로 촬영 현장이 파파라치들로 가득찬 게 촬영을 힘들게 한 요소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둘의 관계는 전례없을 정도로 대중의 관심을 모았고 미국 상원바티칸의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감독이 "단순히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현장의 모든 측면이 그야말로 통제불가능 상태였다"고 말할 정도로 촬영은 엉망진창이었다.

처음에 폭스는 영국 정부의 지원을 노리고 런던 인근의 유명한 파인우드 스튜디오에 60만 달러를 들여서 16m짜리 스핑크스를 포함한 대규모 야외 세트장을 지었다. 하지만 영국의 흐린 날씨에서 이집트 배경의 영화를 찍는건 불가능하다는게 곧 드러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테일러는 지독한 폐렴에 걸려 혼수상태에 빠져 수술과 회복까지 합쳐 6달동안이나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다.

이런 난리를 못 버티고 기존 감독인 루벤 마물리안(Rouben Mamoulian)은 10분 분량만 촬영한체로 사임해버린다. 폭스는 이미 700만 달러를 손해본 상태였지만 어떻게든 영화를 완성시키려고 대타로 맨키위즈를 고용한다. 그는 테일러가 입원해있는 동안 그녀를 제외한 대부분의 배우들을 교체하고, 각본을 다시 썼다. 또 영국의 세트장을 매몰비용으로 처리하고 로마의 치네치타로 세트장을 옮긴다. 문제는 당시 이탈리아에는 70mm 필름인 Toad AO를 처리할 수 있는 곳이 없어서 매일 매일 그날의 촬영분을 비행기로 미국에 보내서 현상을 해야했다는 것.

새로 캐스팅된 배우들도 문제였다. 렉스 해리슨은 매일 새로운 사람들한테 시비를 걸 정도로 같이 일하기 어려운 배우였다. 유부남인 리처드 버튼은 첫눈에 테일러와 사랑에 빠졌다. 버튼은 이전에도 밥먹듯이 바람을 피다가도 결국에는 아내에게 돌아가는 걸로 유명했는데, 테일러와의 사랑은 버튼의 아내가 로마로 쫓아올 정도로 커지고 만다. 버튼은 어쩔 수 없이 테일러와 결별하겠다고 발표하고 테일러는 진정제를 과다복용했다 병원에 입원하는 소동을 벌인다. 그러고도 둘은 촬영 내내 대놓고 연애를 하는데 감독이 "컷"을 외쳐도 키스를 그만두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질질 끄는 촬영으로 인해 폭스는 맨키위즈를 해고했다. 하지만 테일러의 반대와, 엄청난 촬영분량을 다른 감독이 편집하는게 불가능했기에 그를 다시 고용해야 했다. 감독은 이집트에서 촬영한 전투 장면이 맘에 안든다거 스페인으로 옮겨서 다시 찍었는데 그 과정에서 200만 달러를 더 쓴다. 촬영이 완료됐을 때는 이미 2년하고도 반이 지나버렸다.

이후 감독은 전성기만큼은 활동하지 못했다.[2] 그래도 렉스 해리슨, 커크 더글러스, 헨리 폰다, 로런스 올리비에 등 당대 최고의 탑스타들과 끝까지 함께 하긴 했다.

20세기 폭스사는 테일러와 버튼의 연애로 인해 영화에 차질이 있었다며 7500만 달러의 손해배상액을 청구하는 소송을 걸었고 극장주들도 이에 덩달아 합류했는데 실제론 두 사람의 스캔들이 영화 홍보의 일등공신이었기 때문에 몇 달 뒤 없던 일처럼 무마되었다.

9. 기타

조운 콜린스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 조운 크로퍼드 등도 클레오파트라 역 물망에 올라 스크린 테스트를 받은 바 있다. 조운 콜린스는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폐렴으로 생사를 헤맬 때 대체 배우로 물망에 올라 대기하고 있었지만 회복한 테일러가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오면서 미수에 그쳤다.

참고로 촬영시점인 1960년대는 이집트와 이스라엘간 전쟁이 여러번 일어났을 정도로 적대관계가 극에 달해있었다. 이러한 시대상속에서 유대교인인[3]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클레오파트라역을 맡는다는 소식이 이집트에 전해지자 이집트 내에서 자국의 역사를 가지고 영화제작자들이 장난하냐면서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고, 이집트 정부도 이집트에서 촬영을 하려 했을 때 입국을 막았지만 정작 영화가 나온 뒤엔 생각외로 이집트 홍보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블랙리스트 조치를 취소했다. 영화 내에선 이집트 언급이 총 122회 나온다.

방송국에 방영권이 당대 최고액으로 팔렸다.

영화는 개봉 당시 소동의 크기에 비해 세월의 흐름을 나름 잘 버텨낸 편이나 맨키위즈의 뜻대로 만들어졌다면 더 뛰어난 작품이 됐을 거라는 게 영화역사가들의 중론이다.[4] 제작자에 의해 잘려나갔던 촬영분들은 그야말로 전세계에 뿔뿔히 흩어졌는데, 다행히도 이 영화를 광적으로 좋아하고 우연찮게 재력까지 갖춘 일부 팬들의 도움으로 소실됐던 필름의 상당량을 찾아냈고, 맨키위즈의 원래 비전대로 편집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창작한 부분이 있다. 천문학자 소시게네스(Sosigenes; Σωσιγένης)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율리우스력을 만들 때 조언을 구한 사람인데, 여기에선 클레오파트라의 교사이자 조언자로 나오고 나중엔 로마 사절로 가게 된다. 게다가 아우구스투스는 포룸 로마눔에서 이 소시게네스를 살해하면서 이집트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기까지 한다.

10.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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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XX위{{{#!wiki style="display:inline-block; display:none; margin-left: 0.5em")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9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고 4개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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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업 속도를 높이는 방법으로 많이 쓰던 그 시절 관행이었다.[2] 실제로 이 영화는 맨키위즈의 전성기를 끝내버린 영화로 꼽힌다. 얼마 안 있어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가 도래하면서 산업적 물갈이가 일어났고 하향세였던 맨키위즈도 밀려났다. 그나마 말기 두 작품으로 깔끔한 마무리한 편.[3] 유대인은 아니지만 유대교 신자다.[4]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맨키위즈의 의지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최종편집본을 처음 본 직후 크게 동요해 구토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