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클레어 패터슨 Clair Patterson | |
본명 | 클레어 캐머런 패터슨 Clair Cameron Patterson |
출생 | 1922년 6월 2일 |
미국 아이오와 주 미첼빌 | |
사망 | 1995년 12월 5일 (향년 73세) |
미국 캘리포니아 주 시 랜치 | |
직업 | 화학자, 환경운동가 |
모교 | 그린넬 칼리지 (화학 학사) 아이오와 대학교 (분자분광학 M.A.) 시카고 대학교 (Ph.D.) |
경력 |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지질학/지구화학 교수 |
수상 | 존 로렌스 스미스 메달 (1973) 빅터 모리츠 골드슈미트 상 (1980) 타일러 상 (1995) |
배우자 | 로나 패터슨 (1944년 결혼) |
자녀 | 4명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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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화학자이자 환경운동가. 세계 과학사와 현대 환경운동사에 중대한 업적을 하나씩 남겼다. '클레어'라는 이름 때문에 착각하기 쉽지만 남자다.[1]2. 생애
2.1. 화학자의 꿈, 그리고 반려자와의 만남
1922년에 미국 아이오와 주의 미첼빌에서 태어난 패터슨은 어려서부터 지적 호기심이 많아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도 가족들의 지원을 아낌없이 받아가며 공부했다.[2] 193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이오와주의 그린넬 칼리지에 진학했는데 그곳에서 같은 화학자 지망생이자 미래의 반려자 로나 맥클레어리를 만났다. 그린넬 칼리지에서 화학 학사학위를 취득하고, 로나와 함께 아이오와 대학교에 진학하여 분자분광학 석사학위를 얻었다. 이후 로나와 함께 맨해튼 계획에도 참여했고 시카고 대학교로 진학한 후에는 거기서 질량분석법을 익히고 거주지도 테네시 주의 오크리지로 옮겼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패터슨은 지질학자인 해리슨 브라운의 지도 하에 박사 과정을 밟았다.[3] 그 과정에서 로나와 결혼해 슬하에 아이를 4명 낳았다.2.2. 지구의 나이를 처음으로 밝혀내다
1948년 패터슨의 지도교수 해리슨 브라운이 화성암에서 납 동위체를 뽑아내는 방법을 개발하고 이를 토대로 운석으로부터 우라늄과 납의 농도를 비교하는 일을 패터슨, 그리고 같은 대학원생이었던 조지 틸턴(George Tilton)[4]에게 졸업 과제로 내주었다. 두 사람은 이 과제를 잘만 해결하면 단순히 우라늄과 납의 농도 차이를 비교하는 것을 넘어 지구의 나이까지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5] 즉시 실험에 착수하였다.[6]그런데 여기서 패터슨의 인생 전체에 가장 막대한 영향을 미친 중대한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틸턴이 조사한 운석 알갱이 속 우라늄 농도는 여러 번 측정해도 똑같은 수치가 나왔는데 패터슨이 담당한 납 농도만 계속 측정 때마다 뒤죽박죽이었다. 몇 번을 실험해 봐도 결과가 변하지 않자 패터슨은 틸턴과 자신이 실험을 위해 사용하던 실험실에서 이전에 납 실험을 한 것을 기억해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해 실험실 내부의 납을 없애려고 미친 듯이 실험실을 청소하고 소독했다. 패터슨이 20년 넘게 시달리게 된 '납과의 전쟁'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갖은 애를 써도 측정결과가 계속 뒤죽박죽으로 나오자 남은 방법은 단 하나, 실험실을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것밖에 없었다.
해리슨 브라운 또한 이 소식을 알았으므로 1953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로 전근 간 후 패터슨을 불렀다. 그곳이라면 실험실을 새로 만드는 것이 가능했으므로. 그래서 패터슨의 염원대로 칼텍에서 세계 최초로 초청정실을 만들어 패터슨은 실험을 계속할 수 있었다. 마침내 정확한 납 수치 측정에 성공, 마지막으로 아르곤 국립 연구소에 가서 운석 알갱이를 당시 최첨단 기술로 만든 질량 분석기에 넣고 이온화해 성분을 측정하여 지구의 나이가 45억 5천만 년(오차 7천만 년)임을 밝혀냈다.[7] 이 결과를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열린 회의에서 발표함으로써 패터슨은 이렇게 세계 과학사에 중대한 업적을 하나 남겼다.
2.3. 납과의 전쟁
패터슨은 지구의 나이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납을 제거하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에 이후에도 납 관련 연구를 이어갔다. 마이크로그램 단위인 납을 보통의 암석으로 단리하고 동위체의 조성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처음에는 대서양과 태평양, 북극 등지에서 퇴적물을 채취해 납 농도를 비교하였는데 퇴적물 속 납 농도에 비해 당시(1950~1960년대) 환경에 인위적으로 배출한 납의 양이 무려 80배에 달하고 납의 지구화학적 사이클이 현저하게 방해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그래서 샘플도 심해수, 그린란드의 얼음 등 더 다양하게 채취하여 연구했다. 표층에서 채취한 납 농도와 심층에서 채취한 납 농도를 비교했는데 나머지 금속 원소들을 제외하고도 3~10배나 더 많은 차이가 났다. 패터슨은 자연적인 납 농도 증가 사이클의 2배를 훨씬 웃도는 이 현상에 의문을 품었다.
이후 실험에 사용한 공백에 보여진 혼입물로 초점을 돌려 그린란드에서 얻은 빙상 코어로부터 테트라에틸납(Tetraethyl lead)이 연료로 사용되어 위험해질 때까지 계속 늘어났음을 알았다. 실험 결과에 납이 계속 혼입되는 원인도 시중의 다양한 공산품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다양하게 납을 사용하며 이로써 대기가 납으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유연가솔린으로부터 결정적인 힌트를 얻기도 했고 공중위생상 엄청나게 중대한 발견이었기에 패터슨은 남은 생을 납 제거에 전부 쏟아붓겠다고 다짐했다.
패터슨은 이를 정리하여 1965년에 논문을 발표하고 납 사용 반대 운동을 전개하며 이후 20년 동안 납을 이용해 재미를 보던 업계와 전면전에 돌입했다. 기업가들은 즉시 지원을 끊고 대학에 패터슨 퇴출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기업가 편에 서서 납에 문제가 없다고 대중들을 설득했던 로버트 키호(Robert A. Kehoe)[8] 같은 납 관련 권위자와도 정면충돌을 피하지 않았다. 키호는 테트라에틸납을 다루는 노동자의 혈액을 검사하며 현재 자연계에 존재하는 납 농도와 혈중 납 농도에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악영향이 없다는 입장을 펼쳤으나 패터슨은 자연계가 이미 납으로 오염되었다는 논지를 펼치면서 페루 등지의 미라에서 표본을 추출하여 혈중 납 농도가 20세기 들어서 급격하게 증가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 그의 연구를 방해하기 위해 에틸 사의 로비 활동과 기업가 토머스 미즐리의 유산(테트라에틸납, 클로로플루오로카본 사용) 같은 납 지지 기업들이 납 연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물밑 활동을 벌이는 것에 맞서 거세게 저항했다. 빌 브라이슨이 쓴 <거의 모든 것의 역사>라는 책에서 당시 납 관련 기업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인들이 패터슨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패터슨과 키호를 대상으로 번갈아 진행한 청문회에서 패터슨의 주장이 많이 지지받자 1973년 환경보전기관에서 납 사용 절감을 선언하고 미국 전역의 모든 휘발유에서 납 사용량을 단계적으로 절감해 1986년에 완전히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인의 혈중 납 농도는 1990년대 후반에 80%까지 줄어들었다.
이후로도 식료품에 사용되는 납 성분 절감에도 앞장서고 78쪽에 달하는 납 사용 규제 의견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이 의견서의 내용을 현재도 대부분의 국가들이 받아들여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시행 중이다.
이로써 현대 환경운동사와 관련해서도 중대한 업적을 남긴 패터슨은 1995년에 향년 73세로 캘리포니아 시랜치에서 눈을 감았다.
3. 기타
행적을 보면 알겠지만 그야말로 '20세기의 숨겨진 영웅'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만약 패터슨이 없었다면 지구의 나이가 알려지기까지 시간이 더 걸렸을지도 모르고 인류의 혈중 납 농도가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높아져 인류가 자멸했을지도 모른다.[9]논문 발표할 때 작성자 명단에 항상 실험에 같이 참여했던 자신의 제자를 첫 번째로 놓고 자신은 두 번째 순서로 기술했다. 제자들을 세상에 더 널리 알리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지독한 결벽증 환자였다. 납 중독 위험성 연구와 지구의 나이를 측정하는 연구를 할 때의 일 때문이었다. 일평생을 납과 싸운 사람답게 지구의 나이를 측정할 때도 대기 중의 납 성분 때문에 측정결과에 오류가 생길까 우려해서 자신의 연구실을 허구한 날 물청소를 하고 절대로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후에 납 중독에 대해 연구한 결과를 보고 패터슨은 본인도 납에 오염되어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시달려서 자기 자식들을 안아주기도 꺼렸을 정도였다. 그런데 정작 이런 성격 때문에 그의 연구를 방해하려는 석유회사들의 협박에는 눈 하나 깜짝도 하지 않았다.[10]
다큐멘터리 코스모스 2014년 리부트작의 7화가 패터슨의 삶을 다루었다. 다큐를 마무리하면서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다음과 같은 말로 7화를 마친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입을 모아 환경문제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기득권층은 여전히 그들의 과학자를 고용해 논점을 흐리려고 하고 있지만, 자연은 결코 속지 않을 것입니다.[11]
2022년 11월 2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위에서 설명한 납과의 전쟁에 대해 다루었다.[1] 20세기 초중반까지 '클레어'라는 이름은 남자 이름으로 간주되었다. 이 이름을 여자 이름으로 주로 사용하게 된 때는 빨라도 1960-70년대 이후부터다.[2] 아버지가 우편 배달부였고 어머니는 스쿨 보드의 일원이었다.[3] 그동안 로나는 적외 분광 연구에 참여했다.[4] 조지 틸턴 또한 이 실험을 하면서 우라늄 전문 지질화학자가 되었다.[5] 다큐멘터리 코스모스 2014 리부트작 7화에서는 해리슨 브라운이 언급하는 것으로 소개되었다.[6] 이때 운석 시료도 활용했는데, 미국 애리조나주의 베링거 크레이터를 만든 운석의 파편을 사용했다.[7] 패터슨의 연구 성과를 최초로 전해들은 사람은 패터슨의 어머니다.[8] 1893년생 의학자로 제너럴 모터스(GM) 및 납 첨가제(테트라에틸납) 제조사 에틸의 지원을 받아 납 독성에 관한 연구를 이끌었고 1920년대 에틸의 공장에서 납중독 사망이 속출함에도 불구하고 일정량의 납 노출이 안전하다는 논리를 폈다. 실질적으로 납 독성을 전문으로 한 연구자는 키호 외에는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키호는 업계의 비호를 받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대적할 상대가 없는 권위자이기도 했다. 다만 패터슨의 발표 시점에서 키호는 이미 고령으로 연구에서 물러난 상태였기 때문에 패터슨과 키호가 직접 경쟁한 것은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유해물질 테트라에틸납과 염화플루오린화탄소(CFC, 속칭 프레온)이 모두 GM 엔지니어 토머스 미질리의 작품이라는 것이고 키호는 이들 물질의 무해성을 강변하는 연구를 했다. 미질리가 55세로 단명한 반면 키호는 생전 자신의 연구가 모조리 부정되는 가운데 99세까지 살아 한참 어린 패터슨과 비슷한 1992년에 사망했다.[9] 실제로 납은 로마 제국이 멸망한 원인 중 하나로도 지목된다.[10] 어차피 정치인들을 포함한 미국의 높으신 분들이 그의 뒤를 봐 주었으므로 그깟 석유 재벌들은 재벌 따위로 밖에 안 보였을 것이다. 그에게 불멸의 명성을 가져다 준 납 중독 연구비용은 미국 정부와 각 군의 관계자들이 대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패터슨 박사의 강직한 성격을 생각하면 정치인들의 지지가 없었어도 기득권층의 협박과 회유에 꿈쩍했을 리도 없다.[11] 즉, 환경 문제를 경고하며 목청을 높인 패터슨과 기득권층에 고용된 키호를 비교하며 패터슨의 업적을 높이 세우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