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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7E7E7><colcolor=#000> 콩데 공 루이 2세 Louis II, Prince de Condé | |
이름 | 루이 2세 드 부르봉콩데 (Louis II. de Bourbon-Condé) |
출생 | 1621년 9월 8일 |
프랑스 왕국 파리 | |
사망 | 1686년 12월 11일 (향년 65세) |
프랑스 왕국 퐁텐블로 궁전 | |
재임 | 콩데 공 |
1646년 12월 26일 ~ 1686년 12월 11일 | |
배우자 | 클레르클레망스 드 마예 (1641년 결혼) |
자녀 | 앙리 쥘, 루이 |
아버지 | 콩데 공 앙리 |
어머니 | 샤를로트 마르그리트 드 몽모랑시 |
형제 | 안 주느비에브, 아르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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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세기 프랑스 왕국의 명장. 부르봉 가문 출신의 콩데 공작(Prince de Condé)이자 프랑스의 혈통대공 (prince du Sang)이며, 대 콩데(Grand Condé)로 불리는 인물. 나폴레옹이 최고의 전략가 중 한 명이라고 언급했던 언급한 튀렌 자작과 거의 대등할 정도의 능력을 지녔던 인물로 튀렌 자작과 함께 프랑스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30년 전쟁에 참가해 로크루아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승리해 프랑스가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프롱드의 난이 발발했을 때 처음엔 왕실에 충성을 바쳤으나 나중엔 마자랭과 갈등을 빚다가 민중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어 스페인으로 망명한 후 스페인군을 이끌고 조국을 침략하기도 했다. 하지만 1659년 전쟁이 끝난 뒤 사면되어 프랑스로 귀환했고 루이 14세의 대외 팽창 정책에 호응해 대 네덜란드 전쟁에서 활약했다.2. 생애
2.1. 어린 시절
흔히 대 콩데(La Grand Condé)로 불리는 루이 드 부르봉(Louis de Bourbon)은 앙리 4세의 5촌 조카였던 콩데 대공(prince de Condé) 앙리 2세와 프랑스의 대귀족 가문 중 하나였던 몽모랑시 가문의 상속녀, 샤를로트 마르그리트 드 몽모랑시[1]의 둘째 자녀 겸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자 마자 부르봉-콩데 가문의 상속자에게 주어지던 앙갱 공작에 오르게 되었고 프랑스 방계 왕족들 중에서도 일부에게만 주어지던 Prince du Sang (Prince of the Blood)라는 칭호를 받아 가장 고귀하신 앙갱 공작 전하 (His Most Serene Highness The Duke of Enghien)로 불리게 되었다. 여담으로 그가 태어났을 땐 아직 루이 13세에게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왕위 계승 서열 3위였다.[2] 이후 루이는 아버지의 명으로 6년간 부르주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역사와 법학, 수학 등을 공부하며 교양을 쌓았고 이후 파리 왕립 학원에 입학했다. 그러다 17세 무렵에는 아버지를 대신에 부르고뉴를 통치하며 정치인에게 필요한 덕목들을 배웠다. 이후 루이는 1640년에 리슐리외 추기경의 조카와 정략결혼을 맺었고 군에 입대한 뒤 여러 크고 작은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2.2. 30년 전쟁
이후 성인이 된 그는 30년 전쟁에 참전하여 그의 재능을 맘껏 펼쳤는데 추락하던 스페인 제국에 결정타를 날린 로크루아 전투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2.3. 프롱드의 난
1648년 9월, 파리에서 프롱드의 난이 일어났다. 파리 고등법원의 등기권을 무력화하려는 쥘 마자랭의 정책에 법복귀족들이 반발했고, 마자랭이 판사 2명을 체포하자 법복귀족들이 조세부담에 불만을 품은 하층 수공업자들을 선동해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마자랭은 파리를 반란군에게 점령당한 채 루이 14세를 비롯한 왕실과 함께 파리를 떠나야 했다. 여기에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일명 튀렌 자작) 등 지방 대귀족들까지 프롱드의 난에 가담하면서, 왕실의 운명은 경각에 달렸다.이때 콩데는 왕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군대를 이끌고 파리를 포위했다. 여기에 튀렌 자작 소속 병사들이 지휘관의 명령에 불복종해 튀렌이 네덜란드로 도주하면서, 상황은 그에게 매우 유리해졌다. 추가로 영국에서 찰스 1세의 처형 소식이 전해지면서 제한군주제를 추구하는 법복귀족들과 공화제를 주장하는 파리 급진파 시민들 간에 내분도 일어났다. 결국 1649년 3월 20일, 루이 14세와 마자랭은 환호를 받으며 파리에 귀환했고 프롱드의 난은 진압되었다. 다만 반란을 주도한 이들은 사면되었고 튀렌 역시 용서를 받고 군직에 복귀했다.
그러나 콩데는 자신이 난을 진압한 영웅이라고 자화자찬하며 프롱드의 난의 원인을 제공한 마자랭의 퇴진을 요구했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매우 오만하게 굴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에 격노한 루이 14세의 어머니이자 섭정인 안 도트리슈는 마자랭의 건의를 받아들여 콩데를 그의 동생 및 매부와 함께 전격적으로 체포해 감옥에 가뒀다. 그러자 콩데의 여동생 안느 제네비에브는 스페인과 협상해 프랑스를 압박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리고 콩데에게 냉대를 당했던 아내 클레어는 보르도에 들어가 군대를 모집했다. 그녀는 남편이 자신에게 시종일관 차갑게 대하고 대우를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도 남편의 자유를 위해 싸우겠다고 맹세해 귀족들의 존경과 동정을 얻었다.
이러한 콩데 지지 세력의 거센 반발에 긴장한 마자랭은 1651년 2월 콩데와 그의 동생 및 매부를 석방시켰다. 그러나 그 직후 상급 귀족들이 봉기했기 때문에, 마자랭은 다시 파리를 떠나야 했다. 콩데는 파리를 장악하고 파리 고등법원과 연대를 도모했지만 서로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불화를 빚다가 1651년 9월 파리를 떠나 보르도에서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이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군해 1652년 4월 파리에 입성했다. 그러나 그는 스페인과 동맹을 추진하다가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그에게 분노한 파리 시민들이 봉기하자 같은 해 10월 파리에서 쫓겨나 스페인으로 망명해야 했다. 콩데가 떠난 뒤, 파리 주변에서 머물고 있던 루이 14세와 모후 안 도트리슈는 튀렌 자작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스페인으로 망명한 콩데는 복수를 꾀했다. 그는 스페인 정부를 설득해 프랑스를 전격적으로 침공하게 했다. 이후 발발한 프랑스-스페인 전쟁에서, 콩데는 튀렌 자작과 1653년부터 1658년까지 5년간 맞붙어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그러나 1658년 6월 18일 뒨 전투에서 스페인군이 튀렌에게 완패당하면서 스페인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이듬해 6월 피레네 조약을 체결해 전쟁을 마무리했다. 이로서 프랑스는 스페인 북부의 루시용과 아르투아를 비롯해 알자스 지방과 로렌 지방 등의 점령지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받았고, 그 대신 스페인에게 반란을 일으킨 뒤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카탈루냐를 반환했다.[3] 그후 콩데는 사면되어 프랑스로 귀국했지만 몇년 간 군대를 지휘하지 못하고 한직에 머물렀다.
2.4. 대 네덜란드 전쟁
콩데는 한직에서 조용히 지내는 동안 그의 사유지인 샹틸리 성당에서 프랑스의 희극 작가 몰리에르(Molière)와 장 라신(Jean Racine), 시인 부알로(Boileau)와 장 드 라 퐁텐(Jean de La Fontaine) 등 여러 문인들과 교류했다. 이 시기 그와 아들 앙리 쥘 드 부르봉이 폴란드의 국왕 선출 선거에 관련해 협상을 벌였다. 그들의 오랜 로비 끝에, 1674년 5월 19일 루이 14세가 선호했던 얀 소비에스키가 폴란드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콩데는 1668년 겨울 프랑스군을 이끌고 프랑슈콩테 공격을 지휘해 단 15일 만에 아르투아, 브장송 등을 점령했다. 이리하여 콩데는 루이 14세로부터 신임을 완전히 회복하여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자리잡았다. 그후 1672년, 콩데는 튀렌 자작과 함께 대 네덜란드 전쟁에 참전했다.1672년 4월에 발발한 대 네덜란드 전쟁에서, 프랑스군 12만 명이 네덜란드로 진군했다. 이들은 둘로 나뉘어 하나는 튀렌 자작이 지휘해 샤를루아에서 출발했고 다른 하나는 콩데가 지휘해 스당에서 출발했다. 두 부대는 친 프랑스 성향의 중립 지역인 리에주 주교령을 통과하여 마스트리흐트 근처에서 합류했다. 그러나 1972년 7월 12일 톨후이스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입은 그는 알자스에서 요양하며 예비병들을 훈련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1673년 전장에 복귀한 콩데는 프랑스군이 점령한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방어를 맡았다. 1674년 네덜란드 총독 빌렘 3세가 브뤼셀에서 네덜란드-스페인-오스트리아 동맹군을 집결시킨 후 그대로 남하하여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프랑스 점령지를 공략하려 했다. 콩데는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이들과 정면 대결하지 않고 5주 동안 요새에 틀어박혔다. 이에 빌렘 3세는 콩데를 전면전으로 끌어내기 위해 곧바로 파리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적이 파리로 진군하고 있다는 급보를 접한 콩데는 기병 500기를 먼저 보내 세네페에서 빌렘 3세의 진격을 저지했고, 나머지 후속 병력을 이끌고 적의 후미를 따라잡았다.
이때 빌렘 3세의 병력은 62,000명이었던 반면 콩데가 이끄는 프랑스군 병력은 44,200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빌렘 3세의 병력은 연합군이다보니 지휘계통에 혼선이 많았던 반면, 콩데는 그 자신이 시종일관 전장을 주도했다. 1674년 8월 11일 벌어진 세네페 전투에서, 콩데는 타고 다니던 말이 세번이나 죽어서 바꿔탔을 정도로 용감하게 싸웠다. 이 전투는 어느 쪽의 승리라고 단정할 수 없을 만큼 양측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빌렘 3세가 이끄는 연합군의 사상자는 14,000명이었고 콩데의 프랑스군 사상자는 10,000명이었다. 다만 빌렘 3세는 파리 진군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철수해야 했다.
1675년 초, 콩데는 알자스에 주둔한 튀렌과 합세했고 튀렌의 겨울 원정에 동참하여 원정이 성공할 수 있도록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런데 1675년 7월 27일 잘스바흐 전투에서 튀렌이 전사하자, 합스부르크 제국군 지휘관 라이몬도 몬테쿠콜리 장군은 프랑스군의 알자스 숙영지인 사베른과 아그노를 공격했다. 이에 루이 14세는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지키던 콩데를 알자스로 파견했고, 콩데는 최선을 다해 맞서 싸워 몬테쿠콜리의 신성 로마 제국군을 다시 라인 강 너머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2.5. 말년
몬테쿠콜리와의 대결이 종식된 후, 콩데는 통풍에 걸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군직을 은퇴하여 여생을 샹틸리 성에서 보냈다. 그는 샹틸리 성에서 종교활동에 전념하다가 1686년 11월 11일 퐁텐블로 궁전에서 사망했다. 향년 65세.[1] 대 콩데의 뒤를 이어 루이 14세 시기에 맹활약하였던 프랑수아 앙리 드 몽모랑시의 고모이다.[2] 1위는 루이 13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 드 프랑스였고 2위는 그의 아버지, 앙리 드 부르봉-콩데였다.[3] 그러나 프랑스는 당시 이미 중앙집권화가 많이 이루어졌는데 비해 카탈루냐는 봉건국가 그 자체였기 때문에 자치권을 요구하던 카탈루냐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