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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13:33:55

케리 폰 에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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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rry Von Erich

1. 개요2. 커리어3. 단 한 번의 불운4. 여담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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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0년 2월 3일 ~ 1993년 2월 18일
188cm, 115kg

미국의 프로레슬러. 프리츠 폰 에릭의 넷째아들로, 본명은 케리 진 애드키슨(Kerry Gene Adkisson)이다.

뉴욕 주 출생으로 한바퀴 돌아서 상대를 주먹으로 공격하는 토네이도 펀치(디스커스 펀치)와 아버지의 기술인 아이언 클로를 주 기술로 사용했다. 육상 종목으로 장학금을 받으며 휴스턴 대학에 입학했지만 1학년 때 중퇴하고 프로레슬러가 된다.

2. 커리어

케리 폰 에릭을 링네임으로 해 아버지의 단체 WCCW(WORLD CLASS CHAMPIONSHIP WRESTLING)에서 활동할 때 형인 케빈과 데이비드보다 스타성이 있다고 평가받았다. 당시 릭 플레어, 마이클 헤이즈와의 명경기들을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가 선정하는 올해의 경기 10위 안에 올렸다. 한편 친형제인 케빈 폰 에릭&마이크 폰 에릭과 함께 더 폰 에릭스로서 더 프리버즈[1]와 대립해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에서 선정한 1984년 올해의 경기를 남겼다.

차기 월드 챔피언으로 유력했던 형 데이비드 폰 에릭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대신 도전해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1984년 5월 6일에 릭 플레어를 이기고 NWA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에 등극했다. 1986년 6월 4일에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는데, 이후 상태가 악화된 오른쪽 다리를 의족으로 대체한다. 그 이후에도 AWA, 신일본 프로레슬링 등 여러 단체에 출전해 프로레슬러로서 좋은 기량을 선보이지만, 사고의 후유증으로 약물중독에 시달렸다.

WWF에서는 텍사스 토네이도라는 링네임으로 활동하며 WWF 섬머슬램(1990)에서 '미스터 퍼펙트' 커트 헤닉을 이기고 WWF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에 등극했다. 하지만 동생 마이크와 크리스가 연이어 자살하고, WWF와의 계약이 해지되었으며 마약 소지를 수차례 들켜 실형을 선고받는 등 불운이 겹치자 끝내 1993년 2월 18일 텍사스주 덴튼 카운티에 있는 아버지의 목장에서 .44 매그넘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쏴서 자살함으로써 33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생일이 지난 지 15일 뒤였다.

3. 단 한 번의 불운

오토바이 사고 이전 1986년까지는 육상선수 출신 답게 신체능력도 뛰어났고 드롭킥도 높은 타점으로 잘 사용했으며 브롤러 타입으로써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오토바이 사고 이후 그의 프로레슬링 인생은 제대로 꼬이기 시작했는데 몇 차례의 수술에도 도저히 다리가 회복될 기미가 안 보이고 심지어 엄청난 격통까지 찾아오자 결국 오른쪽 다리를 무릎 아래로 절단하고 의족을 착용해야만 했다.

물론 사고 이후 불굴의 의지로 재활하고 복귀에 성공했지만 당시 단체에서는 케리의 오른쪽 다리가 의족이라는 사실이 외부에 절대 알려지지 않도록 업계의 프로레슬러들에게 입단속을 철저히 시켰으며, 그래서 당시 프로레슬링 팬들은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진실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케리는 이때부터 부츠도 환부가 안 보이도록 무릎 위까지 올라오고 솔이 달린 부츠를 신었으며 사고를 당해 전과 같지 않은 상황에 처한 자신이 싫었는지 절대로 부츠를 벗지 않았다고 한다.

복귀 후의 그는 사고 이전의 스피디한 브롤러 타입의 파이팅과 링을 뛰어넘어 입장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움직임도 사고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느려져 상대 선수가 그의 움직임에 맞춰 경기를 해야 했다. 유튜브에서 케리 폰 에릭의 86년 이전 경기 모습과 86년 이후 경기 모습을 비교해보면 일반 라이트팬들이 보기에도 확연할 정도로 차이가 심하다. 심지어 제리 롤러와 경기 때는 롤러가 운동능력이 쩔어주는 타입도 아니고 반칙을 섞은 얍삽한 스타일의 선수임에도 그 롤러보다 훨씬 움직임이 굼뜨다는 걸 알 수 있다. 거의 스탠딩 상황에선 더치 와이프 수준. 그러다가 위기에 빠졌을 때 토네이도 펀치로 연타를 날리는 게 유일한 옵션이었을 정도. 실제로도 당시 경기는 거의 롤러의 리드로 이뤄지다시피 했다.

거기다 케리는 사실 수술 후에도 지속적인 격통에 시달렸고, 이를 견디기 위해 모르핀, 헤로인마약성 진통제를 대량으로 사용하다 마약에 중독되어 신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피폐해지고 만다. 훗날 프로레슬링 팬들은 케리가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을 겪었던 게 아니냐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 격통은 이 후 마약소지를 사유로 징역 선고까지 받고, 이로 인해 레슬링 업계에서 쫓겨나고, 이 후 자살이라는 최악의 결말로 이어지게 되었다.

안 그래도 폰 에릭 패밀리의 형제들이 케빈만 제외하고 모조리 자살, 사고로 조기에 생을 마감하는 등 가문에 저주라도 있는게 아니냐는 팬들의 말까지 나온 상황. 폰 에릭 패밀리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재능이 뛰어났고 사고만 없었더라면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하며 은퇴한 뒤에도 레전드로 대우 받으며 WWE 무대에 초청도 받고 간혹 이벤트 매치도 뛰었을 법 했건만 불의의 사고 한번이 인생을 꼬아버린 불행한 케이스.

4. 여담

5. 둘러보기

파일:WWEHOF.jpg
2009년 WWE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PWI 로고.png PWI 선정 올해의 선역
지미 스누카
(1983)
케리 폰 에릭
(1984)
헐크 호건
(1985)
파일:PWI 로고.png PWI 선정 올해의 경기
1984년 5월 6일
데이비드 폰 에릭 메모리얼
퍼레이드 오브 챔피언스
NWA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릭 플레어 vs 케리 폰 에릭


[1] 버디 로버츠, 테리 고디, 마이클 헤이즈로 구성된 패뷸러스 프리버즈[2] 이런 레이시 본 에릭을 처음 영입한 인물은 존 라우리나이티스였는데 무능하면서도 빈스의 비위를 잘 맞춰서 고위직에 오른 것과 WWE 신인들의 등용문인 NXT를 당시 입원한 트리플 H 대신 맡아 WWE의 인재풀을 박살내고 이 선수들 대부분이 AEW에 가도록 만든 것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3] 당시 레이시 본 에릭은 레슬링 경력이 전혀 없는 모델이었으며, 켈리 켈리알리샤 폭스 또한 이런 방식으로 모델에서 레슬러로 전향했는데, 존 라우리나이티스가 이렇게 운동 선수 출신도 아니면서 얼굴만 예쁜 여성들을 모아 프로레슬링계로 입문시키는 역할을 했다.[4] 다만 그쪽의 사인은 타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