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당 중앙집행위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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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민사당 제3대 중앙집행위원장 카스가 잇코 春日一幸 | Kasuga Ikkō | |
<colbgcolor=#FE0000><colcolor=white> 출생 | 1910년 3월 25일 |
일본 제국 기후현 카이즈군 히가시에촌 (현 기후현 카이즈시) | |
사망 | 1989년 5월 2일 (향년 79세) |
일본 도쿄도 | |
학력 | 나고야체신강습소 (졸업) |
의원 선수 | 14 |
의원 대수 |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
지역구 | (구) 아이치 1구 |
소속 정당 | |
약력 | 체신성(나고야 중앙전화국) 직원 아이치현의원 카스가 악기 제조 대표이사 민사당 제3대 집행부서기장 민사당 제3대 중앙집행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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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2. 생애
1910년 3월 25일 일본 기후현 카이즈군 히가시에촌 (현 카이즈시)의 한 농가에서 1남 6녀의 남매 중 유일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사나이, 원한다면 왕의 자리까지 노려라" 라는 조언을 듣고 나고야체신강습소를 졸업한뒤 나고야 중앙전화국(현 NTT 동일본 나고야지국)에 취직했다.이 시기 카스가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읽고 다다이즘에 경도되었으며, 시인이 되기로 결심해 회사를 무단 결근하고 도쿄 스기나미구에 있는 하야시 후미코 (林 芙美子, 1903~1951)[1]의 자택을 찾아가 10일 동안 그녀를 설득한 끝에 시인 이쿠타 슌케츠 (生田春月, 1892~1930)에게 그가 쓴 시를 선보일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그 로부터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자 즉시 전화국을 사직하고 시인으로 등단할 준비를 하였으나 1930년 이쿠타가 38세의 나이로 요절하며 그를 지원하던 후견인이 사라졌고, 카스가의 시인 등단은 안타깝게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에 좌절한 카스가는 모든 인생을 포기하고 나고야시 치쿠사구에 위치한 카쿠오산에서 독약을 마시고 자살을 기도하였지만 근처에 거주하던 농민으로부터 발견되어 목숨을 건졌다. 이후 매형의 가게에서 일을 돕다가 1934년 사업가로 전향하며, 무역업을 거쳐 자신의 이름을 딴 악기제조 회사를 성공적으로 경영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태평양전쟁의 종전 이후 나고야시 쇼와구의 츠루마 공원에서 펼쳐진 연설회에 시민운동가 출신 정치인인 아카마츠 이사무[2]가 "군과 옛 권력자들에 의해 일본은 패전했다. 우리(일본사회당)가 새로운 일본의 건설을 이루자"라고 연설했고 카스가는 이 연설에 감명을 받아 아카마츠와 함께 일본사회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47년 일본사회당 당적으로 나고야시의회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 그러나 곧이어 치러진 아이치현의회 선거에 출마해 첫 공직 당선에 성공한다. 1949년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대한 시위를 규제하는 조례가 입안되자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라며 크게 반발했고 그해 7월 1일 열린 현의회 본회의에서 3시간에 걸친 반대 연설 끝에 조례안을 폐안시키는데 성공하였고, 1951년 현의회 선거에서도 재선에 성공했다.
1950년 사회당 좌우파 분열 당시 우파사회당에 속했고, 1952년 제2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 아이치 1구에 입후보해 당선되었다. 1955년 사회당 통합 당시에는 우파사회당 출신 가와카미 조타로의 파벌에 소속되었다.
1960년 사회당을 이당해 민주사회당을 결성한 니시오 스에히로를 따라 신당 창당에 합류했고, 이때 중의원 38명과 함께 민사당 결당대회에 참가했다. 1965년 민사당 국회대책위원장 재직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 자민당 간사장과 깊은 교우를 맺었고, 이는 추후 자공민 노선을 실현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67년 민사당 서기장에 올랐고, 1969년에는 부위원장 겸 선거대책위원장에 올랐다. 1969-1970년 창가학회와 공명당의 정교분리 문제와 공산당 위원장인 미야모토 켄지의 과거 간첩 사건을 들고 나와 공명당과 공산당을 강하게 추궁했다.
1971년 니시무라 에이이치 위원장의 급사로 치러진 당 위원장 선거에서 소네 에키 전 부위원장을 꺾고 민사당 제3대 중앙집행위원장 자리에 올랐다. 이후 사사키 료사쿠 서기장 - 츠카모토 사부로 부서기장 등의 인사들을 등용하면서 18년동안 이어지는 당 내 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1972년 제3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사회당과 공산당의 선전으로 전회대비 의석수가 10석이나 줄어드는 패배를 당했다. 1973년 나고야시장 선거에서는 반공주의 입장을 고려하여 자민당이 추천한 현직 시장 스기토 세이를 지지하였지만, 스기토는 사회당, 공산당이 추천한 혁신 계열후보 모토야마 마사오에게 패배했다.
1974년 대립 관계에 있던 사사키 료사쿠 서기장을 부위원장으로 승격시키고, 자신의 측근인 츠카모토 사부로를 서기장으로 승격시켰다.[3]
1977년 11월 당위원장에서 사임했고, 당 상임 고문으로 취임했다. 후임 사사키 위원장과 츠카모토 위원장 시절에도 상임고문으로서 당내에 영향력을 남겼다.
1989년 2월 리크루트 사건으로 인해 카스가의 최측근이던 츠카모토 사부로가 위원장에서 사실상 쫓겨나고 반 카스가파인 나가스에 에이이치가 위원장이 되면서 카스가의 당내 영향력이 크게 줄었다. 그러다 5월 2일 나고야시립 대학병원에서 폐렴으로 투병 중 향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정치적 성향
정치경력 초창기에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심취하고 GHQ에 의한 시위 규제 반대 연설을 하는 등 꽤 혁신적 면모를 보였지만, 우파사회당 참여 이후 점차 우경화 되며 민사당 합류 이후에는 반공주의 사상을 크게 내세우며 일본공산당 등 좌파 진영을 크게 비판했다. 그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란 증거다", "인간을 경시하는 악마의 사상인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이 인간의 책무다"라며 공산주의를 굉장히 혐오했고, 당시 군부 권위주의 반공 정권인 박정희 정부와도 개인적인 인맥이 있었으며, 시류에 따라 실리를 중시해 공명당과 함께 중일국교 정상화를 지지했다.[4]4. 소속 정당
<rowcolor=white> 소속 | 기간 | 비고 |
| 1945 - 1950 | 창당 정계입문 |
| 1950 - 1955 | 분당 |
| 1955 - 1960 | 합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60 | 신당 창당을 위해 이당 |
| 1960 - 1969 | 창당 |
| 1969 - 1989 | 당명 변경 사망 |
5. 선거 이력
<rowcolor=#fff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6 | 나고야시의회 선거 | 나고야시 나카무라구 | | - (-%) | 낙선 | |
1947 | 아이치현의회 선거 | - (-%) | 당선(1위) | 초선 | ||
1951 | 아이치현의회 선거 | - (-%) | 재선 | |||
1950 |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아이치현 제1구 | | 31,402 (8.4%) | 당선(4위) | 초선 |
1953 |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40,142 (10.6%) | 재선 | |||
1955 |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43,386 (10.2%) | 3선 | |||
1958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94,601 (16.4%) | 당선(2위) | 4선 |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80,827 (14.6%) | 당선(4위) | 5선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18,505 (18.6%) | 당선(2위) | 6선 |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4,618 (21.9%) | 7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0,564 (23.0%) | 당선(2위) | 8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9,047 (27.7%) | 당선(1위) | 9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5,017 (26.5%) | 10선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7,219 (20.7%) | 11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3,040 (19.6%) | 12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5,998 (18.0%) | 13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2,346 (16.4%) | 당선(3위) | 14선[5] |
6. 여담
- 쇼와 시대 일본 국회에서 손꼽히는 달변가로 유명했으며, 그의 연설은 카스가 절(春日節)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일본 코미디언들의 단골 성대모사 소재가 되었다. 그의 연설[6]
- 중소기업(악기제조 회사)을 경영한 대표이사로서 중소기업기본법을 제정하고 민사중소기업정치연합을 결성하는 등 중소기업 정책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카스가 본인 부터가 노동자 출신이어서 아이치현의 중소기업 경영자로부터 두터운 지지를 받았으며 아이치현을 전국 굴지의 민사당 텃밭으로 만들었다.[7]
- 민사당 2대 중앙집행위원장이었던 사사키 료사쿠와는 오랜 라이벌 관계였다. 카스가는 자공민 노선을 선호했지만 사사키는 우파사회당, 공명당과의 연계를 중요시해 사공민 노선을 주장했다. 그러나 사사키가 위원장이 되었을 때 카스가는 사사키를 지원해 줬다.[8] 하지만 사사키가 위원장에서 물러나고 그 후임으로 카스가의 비서 출신이자 최측근이었던 츠카모토 사부로가 위원장에 취임하자 사사키의 측근인 나가스에 에이이치가 이의를 제기했고, 당 상임고문인 카스가 역시 이에 맞서 "니 놈이 한 말은 오장육부가 끓어오르는 기분이다!"라고 면전에서 윽박을 질렀고, 카스가의 호통을 본 사사키가 재떨이를 쥐어잡고 카스가를 노려보는 등 주먹다툼 일보직전 까지 갔다.
- 1988년 리쿠르트 사건으로 민사당 위원장인 츠카모토가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사임 위기에 몰렸을때, 사사키 료사쿠와 나가스에 에이이치 등 당 내 사사키파는 츠카모토의 즉각 해임을 요구했지만 카스가는 자신의 측근인 츠카모토를 옹호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러나 여론의 강한 비판을 이기지 못하고 츠카모토는 결국 사임했다.
- 카스가가 사망하기 직전 병상에 누워 있을때, 사사키가 카스가의 병실에 방문해 자신이 가져온 소바를 직접 카스가에게 먹여주는 등 둘 사이의 관계는 영원한 맹우 관계로 남았다.
- 유흥가로도 알려져, 다수의 애인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지만 카스가는 이 스캔들을 부정하지 않고 쿨하게 모두 인정했다고 한다.
- 카스가가 설립한 카스가 악기 제조공업은 야마하 등 유명 악기 메이커의 제품을 OEM 생산하는 걸로 알려져 있었다. 한때 회사가 잘나간적도 있었지만, 만년 들어 실적이 부진해 회사를 매각 하라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자 "나는 내가 만든 회사를 포기 할 수 없다" 라는 의견을 표하며 그가 사망할때까지 회사를 유지시켰다. 카스가 악기는 그의 사후인 1996년 부도 처리 되며 끝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현 중의원 의원 카와무라 타카시, 민사당 3대 중앙집행위원장 츠카모토 사부로 등이 그의 비서였다.
[1] 쇼와 시대 초창기의 대표적인 여성문학 저자이며 방랑기 (放浪記), 밥 (めし), 뜬구름 (浮雲) 등의 대표작을 남겼다.[2] 아카마츠 히로타카의 부친이다.[3] 카스가는 자민당, 공명당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자공민 연합파, 사사키는 사회당, 공명당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사공민 연합파였기 때문에 정책면에서 자주 마찰을 빚었다.[4] 당시 김종필 등 한국 정부 인사들을 만나기 위해 청와대를 방문한 적도 있다. 그밖에도 당시 야당인 신민당의 초청으로 1977년 한국 방한 당시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 한 적이 있다.[5] 1989.5.2 임기 중 사망[6] 참고로 쇼와시대 정치인 성대모사는 자민당은 무조건 다나카 가쿠에이, 야당은 카스가 잇코 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그의 연설 기법은 유명했다.[7] 실제로 아이치현은 사회당, 공산당 등의 야당이 힘을 쓰지 못하고 민사당의 영향력이 다른 지방보다 강했는데, 이는 전국구 거물 정치가였던 카스가의 영향이 컸다고 판단된다.[8] 사사키가 위원장을 맡고 있던 시기, 한 젊은 의원이 사사키에 대한 불만을 카스가에게 털어놓자 "그런 일은 없다. 와가하이(이 몸)가 사사키파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이 위원장을 돕는 것이다." 라고 말하며 사사키에 대한 쉴드를 쳐준 일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