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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저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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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국 청주성 6.jpg

파일:청주성 중국 5.jpg
중국5A급여유경구인 청주고성 (青州古城) 일대

1. 개요2. 역사
2.1. 광고성2.2. 청주자사부 익도2.3. 형왕부2.4. 현대

1. 개요

파일:칭저우 중국 4.jpg

青州市
Qingzhou / Tsingchow

산둥성 웨이팡에 속한 현급시. 산둥성 중앙부, 쯔보시와 웨이팡시 사이의 평원에 위치한다. 인구는 96만명으로, 현급시지만 웬만한 중소 지급시 수준으로 많다. 지명은 옛 중국의 9주 중 하나인 청주 (青州)에서 유래되었다. 옛 지명은 광고 (廣固), 익도 (益都) 등이었지만 남북조 시대부터 임치를 대신하여 청주 자사부가 위치했기 때문이다. 청주 좌씨의 관향인 청주 역시 이곳이다.

다만 근대 들어 소외되었는데[1], 그 덕에 시내에는 옛 건물이 다수 보존되었다. 시가지를 관통하는 난양강의 북안에 있는 송성과 남안에 있는 부재문 사이의 구도심이 관광지화 되어 있다. 도시 서남쪽의 타산석불은 북위 ~ 수·당대에 조성된 중요한 불교 유적이다. 시가지 북쪽 칭저우스베이역에는 지칭고속철도가 지난다. 다만 청주고성의 접근에 있어서는 칭저우스역 (青州市站)이 더 편리하다. 그외에 중국 인민해방군 로켓군 부사관학교가 자리한다.

2. 역사

파일:청주성 중국 4.png
청주 고성 일대

상고대에는 동이족의 땅이었다. 하·상대에는 상고씨 (爽鸠氏), 계즉씨 (季则氏), 방백릉씨 (逄伯陵氏) 등이 다스렸다. 그후 주나라제나라를 거쳐 일대에는 임치군 (臨淄郡)이 설치되었고, 이후 한나라의 개국공신 한신이 분봉된 제국 (齊國)의 일부가 되었다. 다만 기원전 204년 그의 봉토가 초국으로 이전되자 일대에는 제군 (齊郡)이 들어섰고, 현 시가지 서남쪽에는 제군 (동시에 유씨 제후국) 산하의 광후국 (廣侯國)이 설치되었다. 수차례 제후국의 설치와 폐지가 반복된 끝에 기원전 110년 일대는 군현제의 제군으로 확립되었고, 기원전 106년에는 상위 행정 구역인 청주 (青州)에 소속되었다. 후한 대인 서기 43년 재차 유씨 제후국이 들어섰으나 결국 제군으로 돌아갔고, 현 시가지에 광현 (廣縣)이 설치되어 그에 속하였다.

2.1. 광고성

영가의 난의 혼란이 지속되던 311년, 청주 자사 조억 (曹嶷)은 기존의 광현성을 버리고 현 시가지 북서쪽에 광고 (廣固)를 세워 자신의 거점으로 삼았다. 석륵에 복속하여 자치를 누리던 조억은 세력을 다진 석륵이 323년 아들 석호 휘하 4만 대군을 보내어 광고를 포위하자 항복하였다.[2] 이후 후조, 전연, 전진, 후연을 거쳐 399년 선비족 군웅 모용덕이 점령한 후 천도하며 남연의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불과 10년 후 동진의 실권자 유유가 북벌의 첫 대상으로 남연을 택하여 진군한 끝에 409년 봄 임구성을 점령한 후 광고를 포위하였다. 그해 6월 광고의 외성이 함락되자 남연 황제 모용초는 내성으로 피신하였고, 여러 남연의 인사들이 항복하였다. 그리고 410년 2월 광고의 내성이 함락되었다.[3]

2.2. 청주자사부 익도

이후 유유는 광고를 허물고 동양성 (東陽城)이 세워 북청주 (北青州)의 치소로 삼았으나, 곧 청주로 환원시켜고 전통적인 중심지인 임치로 치소를 옮겼다. 반세기 가량 이어진 유송의 지배 후 469년 산동을 점령한 북위헌문제보복으로[4] 동양성을 허물었다. 이로써 도시는 일시적으로 쇠퇴했으나 효문제의 치세인 517년에는 동양성 남곽, 즉 남양성 (南陽城)이 축조되었다. 북제 문선제의 치세인 556년에는 본래 수광 (서우광시)에 있던 익도현 (益都縣)이 동양성으로 이전되어 향후 지명은 익도로 고정되었다. 동시에 청주 자사부가 임치에서 익도 (남양성)로 이전되었고, 향후 천년 이상 고정되었다. 수·당 대에 익도는 주현제 혹은 군현제에 따라 청주 혹은 북해군 (北海郡)의 치소였다.

2.3. 형왕부

파일:중국 청주 3.jpg
명나라 대의 형왕부 (衡王府) 유적

북송 대에 익도는 산동 동부에 세워진 경동동로(京東東路)의 치소였고, 금나라 대에는 산동동로 (山東東路)의 치소가 되어 익도총관부 (益都总管府)가 설치되었다. 원나라 대에는 산동동서도 (山东东西道) 선위사 (宣慰司)의 치소였다. 원대에는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많은 무슬림들이 정착하였고, 칭저우에는 원대 중원 지방에 세워진 3대 모스크 (청진사) 중 하나로써 1302년에 건립된 진교사 (真教寺)가 남아있다. 명나라 대에는 본래 청주부 (青州府)의 치소였지만 1487년 성화제가 자신의 5남 주우휘 (朱祐楎)를 청주를 기반으로 한 형왕 (衡王)에 봉하며 1499년 형왕부 (衡王府)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황자의 처소로써 형왕부는 황궁의 축소판으로 화려하게 세워졌고, 당시 익도성 일대는 국가 속의 국가로 여겨질 정도로 번영하였다. 홍루몽이나 요재신편과 같은 작품에서 언급될 정도로 거대했던 형왕부는 명청교체기에 사라졌고, 현재는 2개의 화려한 석패방만이 남아 옛 영광을 증언할 뿐이다.

2.4. 현대

파일:청주 중국 옛.jpg
명대에 건립된 만년교와 성벽의 옛 사진

신해혁명 후 청주는 폐지되고 산둥성 이두현 (益都县)만이 남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웨이팡의 전신인 창웨이 지구 (昌潍地区)에 편성되었다. 그렇게 현으로 유지되던 1986년 이두현은 현급시로 승격되며, 1300년 이상 중심을 맡았던 칭저우 (青州)로 개칭되었다.

[1] 그래서 한때는 이름답게 산동성을 대표했던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급시조차 아닌 현급시로 전락한 것으로 보인다.[2] 하지만 항복했음에도 양국으로 압송되어 처형된다[3] 이후 모용초는 건강으로 압송되어 참수되었다[4] 남연과 북위는 모두 선비족이 세운 나라였다